시베리아 기행문으로 쓰려다 소설이 된 『유정』
춘원 이광수(1892~1950)의 유명한 소설 『유정』이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이광수의 『유정』은 당초 기행문으로 구상됐던 것이다. 그는 청년 시절 자신이 경험했던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의 이야기를 신문에 기행문 형식으로 실으려고 했다가 소설로 만들어 연재하게 되었다.
『유정』이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1933년 10월은 이광수가 7년간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자리에 있다가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였다. 이광수는 이해 8월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했다. 『유정』은 말하자면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옮긴 후 처음 쓴 ‘신고작(申告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광수는 『유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한 7년 후인 1940년 10월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시인, 1901~1950, 납북)이 운영하던 월간지 <삼천리>에 실은 ‘『단종애사』와 『유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전에도 시베리아 방랑 시절에 한 번 보기는 했지만, 그 후 재차 하얼빈에서 치치하얼을 거쳐 만주리로 갈 때 보주선(寶州線, 만주서부선 즉,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연결되는 철로) 그 일망무제한 넓은 벌을 석양에 지나가게 되는데, 붉은 낙조의 세례를 받는 광야의 특유한 풍경은 실로 한 장관을 정(呈)하고(주 : 나타내고) 있어서 그것을 꼭 한 번 기행문으로 쓰려고 마음먹고 <동아일보>에 쓰려 하다가 그만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기자 중지했으며, 그 후 이야기를 집어넣어서 소설화시키는 것도 매우 좋으리라 생각하고 ‘유정’이란 제목을 붙여 소설화시킨 것이다.” (<삼천리>, 1940. 10)
그런데 위의 글을 보면 “재차 하얼빈에서 치치하얼을 거쳐 만주리로 갈 때”란 말이 나온다. 이광수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던 1914년 당시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만주로 지나갔다. 만주 북쪽 도시 만주리를 지나면 얼마 안 가 러시아 영토인 치타에 도착한다. 그것이 최초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동쪽 노선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를 지나는 지금의 노선은 1916년에 완공됐다.
이광수는 시베리아 치타에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했다. 22세 때다. 그 후 다시 시베리아에 갔던 기록은 없으나 18년 후인 1932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만주를 시찰했던 적은 있다. 기록에는 당시 이광수가 시찰차 갔던 곳은 심양, 안산, 대련 등 남만주 지역이었다. 그래서 “재차”라는 그 대목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유정』을 쓰게 된 동기
이광수는 해방 후인 1948년에 쓴 『나의 고백』에도 다음과 같이 『유정』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적어놓았다.
“나는 한 달 동안 추정(秋汀, 독립운동가 이갑의 호)의 말동무를 하다가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밤, 기차로 물린(穆陵, 우리말로는 목릉이며 현재 중국어 발음으로는 무링)을 떠나서 치타로 갔다. 치타는 아라사(러시아) 땅으로서 바이칼 주의 수부(首府, 수도)다. 눈 덮인 몽고 사막과 흥안령을 넘어서 시베리아로 달리는 감상은 비길 데 없이 광막하여서 청년 나의 꿈을 자아냄이 많았다. 나의 소설 『유정』은 이 길을 왕복하던 인상을 적은 것이다.” (『나의 고백』, 춘추사, 1948. 12)
대한제국 무관 출신인 독립운동가 추정 이갑(李甲, 1877~1917)은 해외에서 독립운동 중 1911년경 러시아에서 병을 얻어 당시 거의 전신마비 상태로 지린성 무링에서 요양 중이었다. 이광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링으로 가 약 한 달간 추정의 말동무 겸 편지 대필 등을 하였다.
『유정』은 <조선일보>에 1933년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재됐는데, 연재에 앞서 9월 22일 <조선일보> 지면에 『유정』을 예고하는 다음과 같은 작자의 말이 실렸다.
“나는 인생 생활을 움직이는 힘 중에 가장 힘 있는 것이 인정인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높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도 인정인 것을 믿습니다. 돈의 힘으로도, 권력의 힘으로도, 군대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힘을 인정의 힘으로 할 수 있으리만큼 인정에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순전히 정으로만 된 이야기를 써보고 싶습니다. 사랑과 미움과 질투와 원망과 절망과 희한한 흥분과 침울 등등, 인정만으로 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최석이라는 지위 있고, 명망 있고 양심 날카로운 중년 남자와 남정임이라는 마음 깨끗하고 몸 아름다운 젊은 여자와의 사랑으로부터 생기는 인정의 슬픈 이야기를 써보자는 것이 이 『유정』이라는 소설입니다.
나는 22~23세의 도무지 아무것에도 구속을 받지 않는 열정에 타는 어리던 시절로 돌아가서 열성이 쏟는 대로 이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뜨겁고 아름답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지이다 하고 빌 뿐입니다.”
(<조선일보>, 1933. 9. 22)
이처럼 이광수의 22~23세 시절 시베리아 방랑의 경험은 그의 일생을 통해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장편 소설 『유정』(1933)은 물론이거니와 『어린 벗에게』(단편, 1917), ‘시베리아의 이갑’(수필, 1931), ‘무명씨전’(단편,1931), 『그의 자서전』(장편,1936), 『다난한 반생의 도정』(자전,1936), 『나의 고백』(자전, 1948) 등 많은 작품 속에 흔적을 남겼다.
이 가운데 시베리아 이야기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것이 『그의 자서전』과 『나의 고백』이다. 이 작품들을 보면 러시아와 시베리아에 대한 이광수의 애착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광수는 중학 시절 이래로 톨스토이를 숭배하는 톨스토이주의자이기도 했지만, 시베리아 치타에서의 경험과 러시아인들에게서 받은 인상 또한 러시아에 대해 좋은 기억을 평생 갖게 하였다.사실 치타에 가기 전까지 이광수의 러시아와 러시아인에 대한 인상은 매우 나빴다. 어린 시절 그의 고향인 평북 정주에 들어온 러시아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몸서리치게 할 정도의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타 역에서 러시아 헌병의 친절과 호의적인 태도를 경험한 후 러시아에 대한 인식을 180도 바꾼다. 그 이야기는 『나의 고백』에도 있고 『그의 자서전』에도 나온다.
러시아에 대한 인식을 바꾼 러시아 헌병의 친절
“내가 열두 살 되던 1903년, 이해 겨울에 아라사(러시아) 병정이 정주에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는 길로 약탈과 겁간을 자행하여서 성중에 살던 백성들은 늙은이를 몇 남기고는 다 피난을 갔다. 젊은 여자들은 모두 남복을 입었다. 길에서 아라사 마병 십여 명에게 윤간을 당하여서 죽어 넘어진 여인이 생기고 어린 신랑과 같이 가던 새색시가 아라사 병정의 겁탈을 받아 튀기를 낳고 시집에서 쫓겨나서 자살을 하였다. 이때에 어린 나는 우리 민족이 약하고 못한 것을 통분하고 아라사 사람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
“저놈들을!”
하고 나는 조그마한 주먹을 불르르쥐었다.
그로부터 칠팔 년을 지나서 나는 아라사 나라를 구경하였다. 흉악한 야만인들이 짐승같이 사는 줄 알았던 아라사 사람들은 인심이 후하고 외국인에게도 친절한 것을 발견하고는 나는 놀랐다. 내가 치타라는 정거장에서 차에서 내려서 쩔쩔 매는 것을 보고 헌병 하나가 내 짐을 들고 내가 찾는 곳까지 지로(指路, 안내)해주는 것을 보고 나는 아라사 사람에 대한 인식을 고쳤다.” (『나의 고백』)
“만주리에서 여행권 검사와 짐 검사는 무사히 끝나고, 나는 인제 다시 아라사 국경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튿날 오정 때를 지나서 차는 치타 역에 닿았다. M역에서 도착하는 시간을 미리 알리지 아니했기 때문에 정교보사에서는 아무도 나온 이가 없었다. 내가 짐을 들고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 어떤 긴 칼 차고 장화 신은 군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정교보사의 주소를 말하였다. 그는 손수 짐을 들고 정거장 밖으로 나가서 이스보스치카(마차) 하나를 불러서 태워주고 웃으면서 작별하였다. 나는 이것이 헌병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모르는 행객에게 대한 호의뿐인 줄을 알 때에 아라사 사람의 국민성에 무척 호감을 가졌다. 아라사 문학에서 본 아라사 사람의 성격을 내 손수 보는 것이 기뻤다. (『그의 자서전』, <조선일보> 연재, 1936~1937)
특히 같은 두 작품을 통해 당시 시베리아에 살고 있던 100년 전 나라 잃은 한인 동포들의 가난한 생활상과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러시아의 모습도 보게 된다.
이광수가 본 100년 전 시베리아의 한인들
“치타에 있는 조선 사람들은 더러는 감자와 오이 농사를 하고, 더러는 빨랫간(세탁소)을 하고, 조선에서 온 인텔리들은 궐련 마는 일을 해서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정성도 있고 친절도 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으나, 또 모두들 궁한 사람이었다.” (『그의 자서전』)
“여기서 사귄 친구 몇 사람을 소개하자. 그들도 이곳에 온 동기나 경로나 다 나와 같기 때문이다. 그들도 타국(일본) 사람이 와서 다스리는 본국에 있을 마음은 없고 만주나 가보면 시베리아나 가보면 하여 여기까지 굴러온 것이었다.
정작 와보니 만주에도 별 수가 없고 시베리아에도 신통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면목도 없어서 손에 닥치는 대로 직업을 얻어서 먹고살아가는 것이었다.
송이라는 청년은 포근한 상등 감으로 만든 양복을 입었고 얼굴도 귀하게 자란 사람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애국자로 감옥살이를 하였다고 하는데 치타에서 하고 있는 그의 직업은 담배말이였다.
담배말이라는 것은 야미(뒷거래)로 궐련을 말아서 파는 것이 아니라 문무 고관이나 잘사는 집에서 자가용으로 먹는 담배를 말아주고 백 개에 얼마씩 값전을 받는 것이었다.
그것은 겨울에도 뜨뜻한 주인집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편안하다면 편안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었고 또 고급 담배를 얻어먹는 이익이 있었다.
송은 저녁때에 돌아오는 길에 내 사무소에 들러서는 상등 담배로 만 궐련을 한 줌씩 놓고 갔다.
다음에는 최라는 이발사였다. 그는 참으로 얼굴이 동탕하고 키가 후리후리한 미남자였다. 그의 아버지도 감옥살이하는 애국자라고 하였다.
그는 낮에 종일 손님의 머리와 수염을 깎고 나서는 제 손으로 사모바르에 물을 끓여서 저녁을 먹고 그리고 멋들어진 더블브레스트에 다홍 넥타이를 매고 댄스나 영화 구경을 하고 가게에 돌아와서 순대에 보드카나 한 잔 마시고 좁은 침대에 혼자 쓰러져 자는 것이 생활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공부를 한다고 나선 길이었었다고 하나 이제는 공부할 생각도 없어진 모양이었다.” (『나의 고백』)
한인들이 정교회 세례를 받는 이유
이곳의 한인들이 러시아 정교회의 세례를 받는 이유도 흥미롭다.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회적인 신분의 확보와 경제적 도움을 얻기 위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조금 똑똑한 사람들은 대개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때 아라사 제국에서는 교권과 정권이 대립해 있었기 때문에 정교회의 세례를 받고, 그 증서인 메트리까 한 장을 몸에 지니는 것은 여행권 이상의 효과를 가졌었다. 이 메트리까가 있으면 여행도 자유로 할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거의 법률의 보호권 이외에 있었다.
정교회의 세례를 받은 이에게는 또 한 가지 좋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교부와 교모를 가지는 것인데, 내가 세례를 받게 되었으니 교부가 되어주오, 교모가 되어주오, 하고 청하면 어떠한 신사 숙녀라도 그것을 거절하지 아니하였고, 한번 교부와 교모가 된 뒤에는 일생에 부자 관계, 모자 관계를 계속할뿐더러, 그 교부, 교모의 자녀들과도 형제자매의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도움을 주었다. 조선 사람들 중에는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내가 치타에 갔을 때에는 아라사 명사들은 조선 사람의 교부, 교모 되기에 진저리를 내었다.
교부와 교모는 부부가 동시에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니 한 번 세례를 받으면 두 명사의 가정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교부와 교모는 세례 받는 이들에게 의복이나 성경이나 십자가나 값나가는 선물을 하는 습관이어서 이 선물만 해도 어떤 때에는 돈 백 원어치나 되는 일이 있었다고 하나, 그때에는 조선 사람의 신용이 떨어져서 불과 몇 십 원어치밖에 아니 된다고 치타의 한 조선인은 말했다.” (『그의 자서전』)
이광수에게도 정교회의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는 이들이 있었다. 앞에 말한 대로 교부와 교모(가톨릭의 대부, 대모)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친구들은 날더러 정교회의 세례를 받기를 권하였다. 그러면 좋은 교부와 교모를 얻어서 그 신세를 지자는 것이었다. 나는 희랍 정교가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지마는, 차마 구복(求福)을 위해서 신앙을 팔기는 싫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끌려서 희랍교 예배당에도 몇 번 가보았다. 유명한 빠스카(부활절)에 소보르(대승정이 주관하는 예배당)에도 가보았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읽은 광경을 목전에서 보는 것이 유쾌하였고, 또 찬양대가 하는 엄숙한 성가라든지, 또 수녀원에서 올리는 경건한 예배라든지, 다 내 마음을 끌었으나, 그래도 구복을 위해서 차마 신앙을 팔 수는 없었다.”
(『그의 자서전』)
이광수가 『그의 자서전』에 쓴 시베리아의 조선인 금점꾼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린다. 금점꾼이란 말은 요즘엔 잘 안 쓰지만 과거의 소설에는 심심치 않게 나오는 직업인데, 금광에서 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시베리아의 금광이라면 아마도 강가 등에서 채취하는 사금이나 지표면에서 깊지 않은 작은 금광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금점꾼 이야기
“가끔 금점꾼들이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들은 대개 십여 년씩 금광으로 방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꽁이깨 짐(침대를 아라사 말로 꼬이까라고 하는데, 조선 사람들은 꽁이깨라고 발음을 한다)을 지고 도끼 하나, 삽 하나, 마른 면보(빵) 한 자루, 이것만 있으면 시베리아 벌판 어디고 못 가는 데가 없다. 대개는 삼사 인이 한 ‘알쩨리’(주 : ‘팀’이란 뜻인 듯)가 되어서 수입은 평균 분배를 하고, 또 열, 스물의 의형제를 모아서 고락을 같이한다고 한다. 겨울 여행에는 날이 저물면 땅을 파고 통나무를 찍어서 그 구덩이에 불을 놓고 불이 다 탄 뒤에 그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자면 아주 뜨뜻하다는데, 어떤 때에는 자다가 깨어보면 하늘에서 눈이 내려서 이불 모양으로 몸을 덮는다고 한다.
“모두들 삽 하나씩은 있것다, 구덩이 파는 재주는 있것다.”
그들은 이 구덩이 파고 자는 것을 퍽 유쾌하게 말하였다.
그러다가 금 있는 데를 얻어 만나면 통나무들을 찍어다가 우물 정 자로 올려 쌓고 가는 나무로 지붕을 덮고, 그리고는 쇠털 같은 풀을 뜯어다가 문틈을 막고 창으로 서양목 헝겊을 치고 물을 뿜으면 얼어서 유리창처럼 되고 그리고는 방 한편 구석에다가 돌멩이 더미를 쌓고 밑에 아궁이를 만들고, 거기다가 불을 때어 돌들이 뻘겋게 단 뒤에 물을 퍼다가 뿌리면 방안이 더운 증기가 꽉 차서 아주 후끈후끈하게 된다고 한다(주 : 러시아식 사우나 ‘반야’의 원리와 같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사슴 사냥을 해서 구워 먹고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여편네가 없는 것이어서 어떤 사람은 십사 년간 조선 여자 구경을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금을 한 전대씩 허리에 차고는 이르쿠우츠크나 웰흐네우진스크나 치타나 이러한 도시에 나와서 술과 계집에 그 전대를 톡 털어버리고는 또 꽁이깨 짐을 지고 나선다고 한다.
“아무개는 계집아 손 한 번 잡아보고 반 숟가락, 입 한 번 맞추고 한 숟가락~ 이렇게 퍼주었읍디.”
한 숟가락이란 물론 금가루 말이다.
나는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을 백 명은 더 만났을 것이다. 그들은 다 낙천적이요, 되는 대로 살아간다는 맘 놓음이 있었다.” (『그의 자서전』)
이광수가 금점꾼들을 만났을 때는 미국 가는 일도 틀어지고 돈도 다 떨어져 오도 가도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금점꾼들을 따라 시베리아를 방랑해볼까’ ‘시베리아에 방랑하는 수십만 동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때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러시아 전역에 비상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방랑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마침내 금점꾼들을 따라서 꽁이깨 짐을 지고 떠나리라고 생각하는 때에 구주대전(세계대전)이 터져서 아라사에서도 동원령을 발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호외가 돌고 총독부 앞 넓은 마당에는 징발되어 오는 장정들이 천 명씩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와 차르(임금)에게 서약식을 행하고는 짐차에 실려서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였다. 이 집에서 저 집에서도 남편을 빼앗긴 아내, 자식을 빼앗긴 부모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묵는 방에서는 밤이 깊도록 이웃집에서 나는 울음소리가 들리고 길거리에 나가 다니면 어느 구석에서도 울음소리 아니 들리는 곳이 없었다.
…… 내가 날마다 먹을 것을 사러 가는 가게에는 하루는 전혀 보이지 않던 늙은이 하나가 앉았을 뿐이요, 낯익은 주인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나와 친한 유쾌한 젊은 사람이어서 내게 외상을 곧잘 주고 농담도 잘하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없었다. 나는 면보(빵)며 설탕이며 순대며, 이런 것을 사자고 했다. 그 노인은,
“나는 물건이 어디 있는지 값이 얼만지도 모르니, 예전에 사던 값을 내고 마음대로 가져가오.”
하는 말이 퍽 슬펐다. 아들 형제가 다 전장에 나간 것이었다.” (『그의 자서전』)
이광수는 1914년 8월 말, 치타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무정(無情)』을 시작으로 소설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관련 러시아 & 시베리아 여행 상품 문의는 02-1661-3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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