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 호 인근 이르쿠츠크에 있는 두 곳의 데카브리스트 기념관(트루베츠코이의 집, 발콘스키의 집)에는 11명의 여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혁명에 실패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귀족 남편을 찾아와 평생을 헌신한 여인들의 얼굴이다. 특히 트루베츠코이의 집에는 11명의 얼굴을 한데 모은 포스터 위에 ‘하늘나라에서 갑자기 천사들이 내려왔다 - 여성 데카브리스트의 초상화’라고 쓰여 있다. 당국의 이혼 종용에도 불구하고 종신 유형수가 되어 절망에 빠진 남편과 함께하기 위해 마차로 두세 달씩 걸려야 닿을 수 있는 동토의 시베리아에 찾아온 그 여인들은 그야말로 ‘천사’였다. 부인들이 온 후 남편들은 삶의 희망을 되찾았다.
여인들은 다른 정치범들도 가족처럼 돌보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 현지 주민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았다. ‘데카브리스트’란 1825년 12월 14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제군주제와 농노제 철폐 등을 기치로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해 사형당하거나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 러시아의 귀족과 청년 장교들을 지칭한다는 이야기는 <우먼센스> 2017년 1월호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편에서 한 바 있다.
이르쿠츠크에 세운 마리야 동상
당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데카브리스트 가운데 기혼자는 21명이었다. 이 가운데 11명이 남편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험한 길을 떠났다. 부인들 외에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유형수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온 여성이 7명 더 있었는데, 어머니 또는 여동생 등 가족이었다. 동시베리아 총독부가 있던 이르쿠츠크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트루베츠코이 공작의 부인 예카테리나였다. 그리고 몇 달 후 발콘스키 공작의 부인 마리야가 도착했다. 이들은 1827년 2월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네르친스크의 은광에서 중노동을 하는 남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와 마리야를 비롯,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은 척박하고 추운 시베리아 땅에서 그들의 남편과 주위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무한한 자비의 화신’이라고까지 불렸던 예카테리나는 안타깝게도 새 황제가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해 특사를 내리기 2년 전인 1854년 이르쿠츠크에서 생을 마쳤다. 그녀는 먼저 간 그녀의 자녀와 함께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묻혔다. 선행과 많은 문화적 기여로 ‘시베리아의 공주’로 불렸던 마리야는 남편 발콘스키 공작과 함께 모스크바로 귀환했으나 1863년 남편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발콘스키의 집 바로 옆 공원에는 마리야의 동상이 세워져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한다. 높이 5.5m의 이 청동 동상은 2011년 이르쿠츠크 시 350주년을 기념해 한 사업가의 기부로 만들어졌다. 마리야 청동 동상은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이 시베리아에서 세운 공헌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카야와 마리야 발콘스카야 외 9명의 여인들은 엘리자베타 나리시키나, 알렉산드라 다비도바, 안나 로젠, 알렉산드라 옌탈체바, 알렉산드라 무라비요바, 프라스코비야 안넨코바(뽈리나 게블), 카밀라 이바셰바, 나탈리야 폰비지나, 마리야 유시넵스카야 등이다. 이 가운데 알렉산드라 무라비요바, 엘리자베타 나리시키나 등 몇몇 데카브리스트 부인에 대해 살펴본다.
푸시킨의 시(詩)를 갖고 시베리아로 - 알렉산드라 그리고리예브나 무라비요바(1804~1832)
데카브리스트들은 알렉산드라 무라비요바를 자신들의 수호천사라 불렀다. 비록 다른 부인들에 비해 순박하고 남달리 꾸밈없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실제 무언가 시적이고 숭고한 면이 있었다. 무라비요프의 아내였던 그녀는 데카브리스트인 J. G. 체르니셰프의 누이이기도 했다. 남편이 체포되었을 당시 그녀는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그러나 남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1826년 10월 26일 당국의 허가를 받았다. 어린 세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시베리아로 출발한 그녀는 가는 도중 모스크바에서 시인 푸시킨(1799~1837)을 만났다.
푸시킨은 앞서 마리야가 시베리아에 가면서 모스크바에 들렀을 때도 그녀를 송별하는 자리에 참석했었다. 마리야의 오빠와 친구였던 푸시킨은 이전부터 마리야를 잘 알고 있었으며 마리야에게 청혼할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푸시킨은 알렉산드라에게 데카브리스트들에게 바치는 자신의 헌시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와 죽마고우 지놋 푸신에게 보내는 ‘나의 첫 번째, 최고의 친구’라는 두 편의 시를 써서 한 편은 발콘스키에게 다른 한 편은 푸신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도
명예로운 인내심 높이 지켜라
그대들의 고통 어린 노동과
마음의 분투는 헛되지 않으리니
불운의 충직한 자매
희망은 지하 감옥의 어둠 속에서도 깨어날 것이고
그대는 기쁨에 뛰리라
기다리던 그날은 오리라
사랑과 우정이 어두운 속박의 문을 넘어
그대들에게 넘칠 것이오
내 자유의 목소리가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굴까지 다다르듯이
무거운 족쇄가 바닥에 떨어지고
감옥은 무너지리니
자유가 문에서 그대를 맞을 때
형제들이 그대에게 검을 내어 주리라
알렉산드라는 1827년 2월 치타 감옥에 도착했다. 그녀는 푸시킨의 시를 발콘스키 부인 마리야에게 전했다. 이 시에서 ‘불운의 충직한 자매’란 바로 마리야와 알렉산드라 등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남편뿐만 아니라 다른 데카브리스트들에게도 삶에 대해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무라비요프 부부는 시베리아에서 세 명의 아이를 더 낳았지만, 그중 살아남은 자식은 딸, 소피야 한 명뿐이었다.
더욱이 애석하게도 알렉산드라는 시베리아에 온 지 불과 5년 만인 1832년 28세의 나이로 공장 도시 페트로프스크 자보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남편 무라비요프는 페트로프스크 자보드에 있는 알렉산드라의 무덤 위에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에서는 알렉산드라가 사망한 후 37년 동안이나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유형수 가족들에게 편지로 시베리아의 소식을 전하다 -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나리시키나(1802~1867)
엘리자베타 나리시키나는 코노브니친이라는 명예로운 귀족 집안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엘리자베타는 보병부대 연대장이던 남편이 비밀결사에 소속된 것을 모르고 있다가 1826년 초 그가 체포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남편 나리시킨은 제4급 범죄를 선고 받아 8년간의 강제 노역과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엘리자베타는 남편을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배지에 있는 남편에게 가는 것은 저의 행복을 위해 불가피한것”이라고 썼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운명을 축복해주었다. 나리시키나는 1827년 5월 치타에 도착했다. 옌탈체바와 폰비지나, 다비도바도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다. 엘리자베타는 유형지의 생활에 차차 익숙해졌다. 그녀는 살림을 배우고, 남편을 만나러 다녔다. 공식적으로는 일주일에 2번만 면회가 허용되어 간수들이 처음에는 감옥의 틈새를 통해서라도 남편과 대화를 나누려는 부인들을 쫓아내곤 했지만, 나중에는 모른 체해주었다.
나리시키나는 저녁마다 감금된 유형수들의 일가친척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썼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서신 교환의 권리를 박탈당했으므로 아내들은 유형수들이 외부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슬픔에 잠긴 가족들에겐 유배지에서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이 보낸 그 편지가 매우 큰 위로가 되었다. 나리시킨 부부는 치타에서 페트로프스크 자보드로 갔다가 이곳에서 풀려나 1832년 쿠르간으로 이주해 농사일을 하며 살았다. 작은 규모의 목축업도 했다. 부부는 진정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왔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약을 사주었다. 집 앞 마당은 일요일마다 늘 사람들로 붐볐는데, 그곳에서 부부가 음식과 옷, 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리시킨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므로 울리야나라는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나리시킨은 쿠르간에 살던 1837년 전쟁 중인 캅카스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과거에 연대장이었던 나리시킨은 말단 병사로 군에 편입되었다가 1843년 소위가 된다. 이듬해인 1844년 군 복무에서 해제되어 비소카야 툴스카야 현의 한 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정착해 살도록 허락받았다. 이러한 거주 제한 조치는 1856년 사면으로 해제되었다.
<데카브리스트의 수기>를 집필한 로젠의 아내 - 안나 바실리예브나 로젠(1797~1883)
안나 로젠의 남편 안드레이 로젠은 비밀결사 조직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나기 전날 밤 릴리예프와 오볼렌스키 공작의 모임에 초대받았고, 그들로부터 새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식 날 원로원 광장에 가능한 한 많은 군대를 동원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2월 14일 밤 안드레이 로젠은 아내에게 봉기가 준비되고 있으며 자신도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당국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로젠은 1825년 12월 22일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감금되었고, 10년간의 시베리아 강제 노역형을 선고 받았다. 안나는 태어난 지 6주 된 아들과 함께 유형지로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러 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은 아들이 걷고 말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만이라도 아들과 함께 있어달라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1830년 안나는 친언니에게 아들의 양육을 맡기고 마침내 시베리아로 떠났다.
안나와 로젠은 처음에 페트로프스크 자보드에서 살다가 1832년 쿠르간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로젠은 농사를 지으며 데카브리즘의 역사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완전한 자료로 인정받는 <데카브리스트의 수기>라는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안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의료 활동을 했다. 1837년 로젠도 나리시킨 등 다른 데카브리스트들처럼 캅카스에 있는 전방 부대에 말단 병사로 배치되었다. 가족들도 캅카스로 로젠을 따라갔다. 1856년 사면된 이후 로젠 가족은 우크라이나에서 살았다. 비록 그들은 가혹한 운명에 처했었지만 이후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았고, 1883년 부부는 4개월 차이로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존경한 여인 - 알렉산드라 이바노브나 다비도바(1802~1895)
알렉산드라 다비도바는 유난히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남편 바실리 다비도프가 제1급 범죄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을 때 알렉산드라는 23살이었지만, 이미 6명의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기로 결심했다. 알렉산드라는 아이들을 친척들에게 맡기고 다시 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그녀가 느끼고 알고 있던 단 한 가지는 쾌활한 자기 남편에겐 자신이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유형을 선고 받고 남편이 너무나 좌절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는 1828년 3월 치타 감옥에 도착했다. 다비도프는 훗날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너희들의 엄마가 없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한한 사랑, 헤아릴 수 없는 헌신, 나에 대한 보살핌, 선한 마음, 온화함, 겸손함을 갖춘 너희 엄마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나에게 모든 것을 견디고 언제나 내가 처한 비참한 처지를 잊을 수 있게 힘을 주었다.”
다비도프 부부는 치타와 페트로프스크 자보드에서 4명의 자녀를 더 낳았고, 이후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정착해 3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다비도프 가족은 데카브리스트 중에서도 가장 자식이 많은 가족이었다. 남편 다비도프는 사면을 받기까지 살지 못하고 1855년 시베리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알렉산드라는 카멘카로 돌아왔다. 1860년대에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다비도프의 아들인 레프 바실리예비치와 결혼한 누이를 자주 찾아왔다. 차이콥스키는 사돈인 알렉산드라 다비도바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이곳 생활의 매력은 카멘카에 살고 있는 다비도프 가문 사람들의 높은 도덕적 존엄성에 있다. 이 가족의 수장인 알렉산드라 이바노브나 다비도바 할머니는 드물게 찾아볼 수 있는 인간적으로 완성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갔던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 분이다. 그녀는 치타에도 있었고, 페트로프스크 자보드에도 있었다. 다비도바는 남편과 함께 여러 유형지에서 지내던 처음 몇 년간 진정 끔찍한 것들을 감내하고 이겨냈으며 그곳에 위안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지금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쇠약한 할머니로, 마지막 남은 날들을 자신을 깊이 존경하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있다. 나는 이 존경스러운 인격을 갖춘 다비도바 부인에게 깊은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결국 시베리아에서 남편을 잃고 - 마리야 카지미로브나 유시넵스카야(1790~1863)
마리야 유시넵스카야의 남편 유시넵스키는 남부 비밀결사의 일원이었고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유형지로 남편을 뒤따라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청원서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 남편의 운명을 함께 짊어지기 위해 남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고 싶습니다. 제 삶의 안위를 위해서는 이제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남편을 만나 가혹한 운명이 지워준 모든 것을 남편과 나누는 행복을 얻고 싶을 뿐입니다. 남편을 만나 이 땅에서 행복한 그의 아내로 14년을 살아온 저는 이제 남편과 그의 불행한 삶을 나누는 것으로 남편에 대한 나의 빚을 갚고 싶습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불행과 가난한 삶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운명을 나눌 수만 있다면 나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습니다.”
청원서는 1826년에 제출되었으나 마리야는 1830년이 되어서야 시베리아에 갈 수 있었다. 그녀가 딸을 데리고 가려고 한 것이 허가를 지연시켰다. 끝내 이에 대한 허가는 받지 못했다. 1830년부터 1839년까지 마리야는 페트로프스크 자보드에서 남편과 함께 살았고, 그 이후에는 이르쿠츠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쿠지민스카야 시골 마을에 거주했다. 유시넵스키 부부는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웠다. 1844년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뒤에도 마리야 유시넵스카야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시베리아에 11년이나 더 남게 되었다. 그녀는 미망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죽기 직전까지 경찰의 감시하에 살았다.
기구한 운명의 여인 -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옌탈체바(1783~1858)
알렉산드라 옌탈체바의 운명은 평생 동안 너무나 기구했다. 그녀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다. 데카브리스트인 옌탈체프와의 결혼은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이었다. 1812년 조국전쟁의 영웅이었던 옌탈체프는 ‘복지동맹’의 일원이었고 나중에는 남부 비밀결사의 일원이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유형에 처해진 남편을 찾아 1827년 치타에 왔다. 당시 그녀 나이는 44세로 데카브리스트 부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녀는 트루베츠카야, 발콘스카야와 한집에서 살았다. 1828년 옌탈체프는 토볼스크 현에 위치한 작은 도시 베레조보로 보내졌다. 그들의 생활은 너무나 고단했고 그 어디에도 물질적인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 옌탈체프는 어떠한 모략을 받은 후 그 충격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자주 일으켰다. 옌탈체프는 집에서 도망치기도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것을 불태우기도 했다. 나중에는 신체에 부분적인 마비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1845년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당국에 요청했다.
하지만 그 요청은 거절되어 시베리아에서 10년을 더 살았고 사면을 받은 후에야 그녀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라 옌탈체바는 생을 마칠 때까지 데카브리스트들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그들도 그녀와의 인연을 놓지 않았다. 러시아를 바꿔보려던 데카브리스트들의 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들이 러시아 땅에 뿌린 혁명의 씨앗은 그 뒤 혁명가들의 사상적 기원이 되었다. 차르 체제는 결국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우먼센스>에서는 8월 19일부터 26일까지 7박8일(기내 1박 포함)의 일정으로 ‘몽골-바이칼 여름 특선 여행’을 실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p.8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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