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과 상큼한 바이칼 호 빙상 투어
러시아에서는 400㎞ 이하는 거리도 아니고, 영하 40℃ 이상은 추위도 아니라고 한단다. 40도 이하는 술도 아니고….시베리아의 추위는 과연 어떤 맛일까? 영하 40℃ 이상은 추위도 아니라고 한다는데…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며칠을 기차 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긴 기차여행은 어떤 기분일까?
시베리아의 한겨울, 세계 모든 여행자들의 꿈이라고 하는 횡단열차를 타고 꽁꽁 얼어붙은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 호수의 겨울 진풍경을 보기 위해 일행은 2월 10일 오후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2시간가량 비행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일행은 저녁 식사 후 독수리 전망대에 올라 시내 야경을 감상하고 해양공원 등을 둘러본 다음 자정 넘어 횡단열차에 탑승했다. 탑승 시간은 블라디보스토크 시간으로 새벽 1시 2분.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보다 1시간 빠르므로 한국 시간은 밤 12시 2분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역사 위에는 보름달이 높이 떠 있었다.
이번 여행은 열차의 4인 1실(쿠페)을 2인 1실로 쓰는, 격을 올린 여행이었지만 처음엔 그것도 좁게 느껴졌다. 차츰 적응되면서 두 사람만의 호젓한 작은 공간의 묘미도 알게 되었다.기차는 밤을 새워 달려 오전 11시 바야젬스카야 역에서 15분간 정차했다. 10시간 만에 처음으로 기차 밖으로 나가니 훈제 연어니 연어알 등을 갖고 플랫폼으로 나온 상인들이 보였다. 이곳은 바다에 가까운 연해주 지방이어서 이런 식품을 파는 것이다. 잠시 일행들의 즐거운 미니 장보기가 있었다. 이어 2시간 후 하바롭스크 역에서는 정차 시간이 약 1시간이나 되어 일행 모두 역사 밖으로 나가 이 도시를 세운 하바로프의 동상이 있는 역 광장 등을 산책했다.
100년 전과 비슷한 기차역 노점상 풍경
열차 안은 항상 22~26℃를 유지한다는데, 낮 시간에는 반팔 옷을 꺼내 입어야 할 정도로 온도가 많이 올라갔다. 이르쿠츠크까지 가는 76시간 동안 많은 역을 거쳐 갔다. 대개의 역에서는 정차 시간이 2~3분에 불과해 내리지 못하지만, 15분 이상 정차하는 역도 종종 있어서 이때는 모두 열차 밖으로 나가 역사 주변을 둘러보거나 상인들이 만들어 온 먹거리들을 샀다.
노점상들의 모습은 지금이나 100여 년 전 치타로 가던 춘원 이광수가 어느 역에서 빵과 고기와 우유를 샀던 그때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우유는 보이지 않았다. 이광수는 후일 <그의 자서전>(1936)에서 “열댓 살 된 계집애들이 우유병을 두 팔로 꼭 껴안고 서서 사는 사람이 있기를 기다렸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1914년 젊은 춘원 이광수가 6개월간 머물렀고, 19세기 초반인 1825년 12월 차르 체제를 전복시키려고 했던 혁명의 실패로 유형수가 되어 시베리아로 온 데카브리스트(12월 혁명 당원으로 불리는 귀족들을 말함)들의 흔적이 있는 치타에서는 기차가 36분간 머물렀으므로 열차에서 내려 역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사 앞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이 가장 오랫동안 노역을 했던 페트로프스키 자보드는 치타에서 서쪽으로 3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정차 시간이 2분이어서 내리지는 못하고 열차 안에서 이 역의 외벽에 그려진 데카브리스트들이 토론하는 장면이 담긴 대형 그림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이보다 조금 떨어진 역사 바로 앞 플랫폼 쪽에는 레닌 동상 앞에 데카브리스트들의 얼굴이 부조된 상징물도 보였다.
열차 여행 중 저녁 식사를 한 후 식당칸에서 두 차례의 문화 강좌가 있었다. 필자가 ‘이광수 문학과 바이칼’ ‘데카브리스트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호서대학교 이기영 교수는 ‘음식과 건강’에 대해 강의했다.
우리와 얼굴이 비슷한 부랴트족의 도시 울란우데를 지나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 시간 새벽 3시 2분(한국 시간 4시 2분). 역사의 온도계를 보니 영하 12℃였다. 모두들 벌써 적응되어서 영하 12℃쯤은 우습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메리어트 호텔에 들어가 잠시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아침을 맛있게 먹은 후 드디어 바이칼 호 알혼 섬을 향해 출발했다. 얼음이 시작되는 사휴르타 선착장까지의 거리는 270㎞, 소요 시간은 5~6시간.
서리꽃 만발한 자작나무 숲의 장관
시베리아의 겨울은 온 천지가 하얀 눈의 세계다. 그러나 도로의 눈은 말끔히 치워져 있다. 길가의 자작나무 숲은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꽃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버스로 이르쿠츠크에서 출발, 알혼 섬으로 가는 도중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사휴르타 선착장에 도착해 우리의 봉고차만 한 4륜 구동차인 우아직으로 옮겨 타고 50분가량 얼음 위를 달렸다. 숙소가 있는 후지르 마을 앞의 신령한 바위로 유명한 부르한 바위를 먼저 보고 숙소인 바이칼로브 오스트록 호텔로 들어갔다. 지은 지 3년 정도 됐다는 통나무 숙소는 따뜻했고 객실은 호텔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얼음 궁전이 된 바이칼 호수
이튿날인 15일의 알혼 섬 북단 하보이곶까지의 빙상 투어는 이번 여행의 백미였다. 알혼 섬의 아침 기온은 영하 35℃. 영하 35℃라는데도 춥다는 사람이 없었다. 바람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 이날은 모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드넓은 얼음 위에 누워도 보고 앉아도 보았다. 섬의 바위 끝에 만들어진 고드름 동굴 앞에서의 기념 촬영은 기본. 얼음 위에 불을 피워 끓인 차 맛은 일품이었다. 그곳의 수심은 1.2㎞나 된다고 한다. 장작불을 그 정도 피워서는 얼음이 기껏 5㎝ 정도밖에 녹지 않는다고 했다. 얼음 두께는 보통 50~60㎝이지만 곳에 따라 더 두껍게 어는 곳도 있다고 한다.
하보이곶 인근 얼음 위에는 상어 이빨같이 깨어진 얼음 조각들이 모여 있었는데 초겨울에 얼었던 얼음이 파도에 깨졌다가 다시 얼고 하는 바람에 그런 구역이 생겨난다고 했다. 귀국 하루 전날인 16일에는 이르쿠츠크의 데카브리스트 기념관 등을 둘러보기 위해 아침 8시에 알혼 섬에서 출발했다. 오후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먼저 데카브리스트 기념관이 된 발콘스키의 집을 방문했고, 이어 시베리아로 유형 온 남편을 최초로 찾아온 데카브리스트 트루베츠코이의 부인 예카테리나와 다른 데카브리스트들의 무덤이 있는 즈나멘스크 수도원을 찾았다. 그리고 수도원 밖에 있는 러시아 내전 당시 볼셰비키 혁명군에 맞서 싸운 백군의 수장이었던 콜착 제독의 동상도 둘러보았다.
이날 근사한 식당에서 러시아 전통 음식인 샤슬릭으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일행이 향한 곳은 폴란드 가톨릭 성당이었다.
대미를 장식한 오르간과 성악곡이 어우러진 음악회
악기를 쓰지 않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과 달리 이곳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우리 일행을 위한 특별한 음악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바이칼BK투어(박대일 사장)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 행사였다. 프로그램은 오르간 연주뿐 아니라 성악곡 등으로 다양했으며 대체로 우리에게 익숙한 곡으로 선정한 것 같았다. 음악회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시작해 10여 곡의 연주로 이어졌다. 이날 소프라노는 구노, 토스티, 슈베르트가 작곡한 각각 다른 세 곡의 ‘아베마리아’를 차례로 불렀다. 세 곡의 ‘아베마리아’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던 드문 자리였다.
우리 귀에 매우 익숙한 모차르트의 ‘터키시 론도’를 웅장한 소리를 내는 파이프 오르간으로 들으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소프라노가 부른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의 아리아 ‘이기고 돌아오라’도 좋았다. 파이프 오르간의 반주가 마치 오케스트라가 내는 소리 같았다.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을 통한 러시아 역사 탐방에 이어 감동의 음악 문화 체험까지, 시베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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