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이종석이 있다면 1994년에는 이창훈이 있다.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린 ‘메디컬 스릴러’ 드라마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훈남 의사, 청소년 드라마 <학교>의 자상한 선생님, <비단향꽃무>에서는 주인공의 첫사랑, <야인시대>의 남성미 넘치는 ‘야인 하야시’까지 소화할 수 있는 배역의 폭도 넓었다. 청춘스타 이미지를 벗은 뒤에도 여러 작품에서 주·조연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캐릭터 소화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배우뿐 아니라 방송 진행자로도 활동했던 이창훈을 한동안 브라운관에서 볼 수 없었다. 그러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채널A의 리얼 예능 프로그램 <아빠본색>의 패널로 말이다. 아토피에 걸린 딸을 위해 과천으로 이사 온 ‘아빠 이창훈’은 전성기 때처럼 날렵한 턱선을 자랑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멋졌다. 대중들도 그를 반가워 했다. 실시간 검색어와 뉴스에 계속 이창훈 가족의 이름이 올랐다. 이 가족을 만나려고 과천 숲속으로 향했다.
“아이고, 이렇게나 일찍 오셨어요? 더운 날씨에 고생들 하셨어요.” 수더분하게 인사하며 대문을 여는 남자, 이창훈이다. 자연스럽게 그을린 다갈색 피부는 방송 첫 회보다 확연히 탄탄하고 날씬해진 몸매에 러닝셔츠와 헐렁한 바지를 걸쳐 입은, 너무나 꾸밈없는 모습이다.
“우리 집은 멋있지는 않아요. 애초에 효주(이창훈의 딸)의 아토피를 낫게 하려고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1층에는 아예 페인트를 칠하지 않았거든요. 딸이 쓰는 2층 공간도 종이와 풀만 사용해 도배하는 등 아토피가 재발하지 않도록 인테리어에 크게 신경 썼어요. 사진이 잘 나와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웃음)”
집은 꾸밈이 없었지만 정갈했다. 그의 아내 김미정 씨는 부엌에서 과일을 썰다가 반색하며 촬영팀을 맞았다. 더울 테니 시원하게 하나씩 드시라며 과일을 접시에 담는 손길이 야무지다. 화장기 전혀 없는 얼굴이 단아하니 곱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촬영해도 별 문제 없겠는데요”라고 하니 “독자분들에게 실례예요”라며 호호 웃었다.
다다다 발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이창훈의 딸 효주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다가와 촬영을 준비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효주는 길고 날씬한 팔다리에 작은 얼굴까지, 아빠와 엄마를 쏙 빼닮았다.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니 아빠 뒤로 쏙 숨는다. “아이가 수줍음이 많아요” 하며 이창훈이 크게 웃었다.
“가족과 화보 찍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살을 많이 빼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제가 요즘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한 번에 2시간씩 동네에서 테니스를 치거든요. 초보 실력인데도 주민분들이 ‘혹시 이창훈 씨 아닙니까?’ 하면서 상대를 해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식사를 조절하면 살이야 금방 빠지겠지만 요요가 오더라고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건강하게 빼고 싶어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필드에서 뛰고 왔는걸요.” 다갈색으로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는 생활형 선탠이었던 셈이다. 이창훈은 테니스로 다진 탄탄한 팔뚝으로 효주를 덥석 들어 올려 목말을 태웠다. “아빠, 무서워. 하하하하.” 신난 효주의 웃음이 한바탕 울려 퍼졌다.
“이사 온 지 3년이 지났어요. 효주가 아토피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없어 공기 좋은 곳을 찾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됐죠. 우면산 근처에도 가봤고 내곡동에도 가봤어요. 공기가 좋고 아이 키우기에 안전하기도 한 지역을 고르다 보니 결국 이곳이 제격이더라고요. 처음 왔을 때 마당에 웬 닭이 있어서 자세히 보니 꿩이었어요. ‘공기가 얼마나 깨끗하면 꿩이 살겠나’ 싶어 바로 계약했죠.”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효주는 참 좋은 부모님을 뒀다”고 하니 부부는 손을 저었다.
“아픈 자녀를 둔 부모라면 다 저희처럼 했을 거예요. 아토피를 겪는 아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아세요? 밤마다 가려워 긁으려 하는데 부모는 그걸 막아야 해요. 해줄 수 있는 거라곤 피부가 마르지 않도록 보습 크림을 발라주는 정도예요. 여기 내려와 산 지 2개월 만에 효주의 아토피가 깨끗하게 사라졌어요.”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살다가 이사왔다. 물 좋고 인심 좋고 살기 좋은 동네지만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사 오기 한 달 전부터 매일 이곳에 왔죠. 원래 이 집 뒤쪽에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가로등을 모두 가렸어요. 으슥해서 무슨 짓을 해도 잘 안 보여 그런지, 이상한 사람들이 차를 타고 와서 아이 교육상 좋지 않은 여러 행동을 하더라고요.(웃음) 바로 과천 시청에 이야기해서 나무가 가로등을 가리지 않도록 정리했죠.”
방배동에 살 때는 가족 세 명이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이창훈은 늘 집 밖에 있었고 아내와 딸은 집 안에 있었다. 처음으로 외진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세 식구는 긴 시간을 붙어 있게 되었다. 갈등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연인끼리 꼭 여행을 가보라고 하잖아요. 24시간 온전히 붙어 있다 보면 그 사람의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고 트러블도 일어나는데, 그걸 감안하고서도 좋다면 결혼할 만하다고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죠. 저희는 결혼한 뒤 처음으로 긴 시간 붙어 있으면서 많이 싸웠어요. 아이 때문에 내려오긴 했지만 당연히 불편하고 답답했죠. 친구들 만나기도 어렵고요. 효주는 처음에 저를 피했어요. 그래도 그런 시간을 거쳐 이젠 친해졌으니 된 거 아니에요?(웃음)” (이창훈)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효주에게 학습지로 공부를 시켰어요. 그런데 아이의 성향이 워낙 자유롭고 섬세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중지했죠. 스트레스 받으면서 엄마에게 집착하더라고요. 몇 개월간은 요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가지도 못했어요. 하도 졸졸 따라다녀서요. 상담을 받아봤더니 그 나이대 아이들에게는 생각보다 흔한 증상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주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어요.” (김미정)
그래서 엄마 김미정 씨는 조바심을 버리고 아이가 원하는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편해졌다.
“상담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엄마가 요구를 들어주더라도 그 표정에 ‘싫어 죽겠다’는 마음이 나타나면 아이는 상처를 받는다고요. 아이의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주는 것이 그토록 쉽지 않은 일인 거지요. 하지만 이젠 많이 나아졌어요. 효주는 학교에서 밝게 생활하고 친구들과 사이도 좋아요. 기특해요.” “엄마, 나 더워.” 빨간 카디건을 입고 나타난 효주가 입을 삐죽이며 엄마에게 달려와 안겼다. “효주야, 더우면 안 입어도 돼. 그런데 이 옷이 너한테 너무 잘 어울려. 우리 사진 한 번만 찍고 갈아입을까?” 찬찬히 설명하는 엄마를 보며 효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이 시작됐다. 어색하고 수줍어하며 웃지 않는 효주를 위해 이창훈은 딸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이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효주를 보며 부부도 절로 따라 웃었다. “하늘이(강아지) 데려와도 돼요? 하늘이도 우리 가족이에요”라고 외치는 효주를 위해 이창훈이 직접 2층으로 올라가 하얀 강아지를 데려왔다. 풀밭에서 뛰어노는 강아지, 다정한 부부와 사랑스러운 아이까지 그야말로 그림 같은 가족이다.
“이 풀밭에선 사실 상추를 키웠어요. 처음 내려왔을 땐 이거저거 많이 심어 뽑아 먹고 그랬거든요. 아침잠이 없는 남편이 매일 새벽 상추를 따 와 쌈밥을 해서 먹었어요. 그런데 올해는 날도 너무 덥고 방송 촬영 때문에 지쳐서 한 해 쉬자고 했지요. 슬슬 꾀가 나나 봐요.(웃음) 직접 심은 상추는 확실히 맛이 좋기는 해요.” (김미정)
부부는 매일 함께 일어나 아침을 준비해 먹는다. 조금 늦게 일어나는 효주를 기다렸다가 밥을 챙겨 먹인 다음 이창훈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함께 효주의 학교로 향한다. 미정 씨는 필라테스를 하러 가고 이창훈은 테니스를 치러 간다. 이후의 시간에는 함께 커다란 집을 청소하고 손질하고 효주와 함께 논다. 시내와 떨어져 있어 가사도우미를 부를 수 없기에 큰 집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매일 부지런히 조금씩 청소해나가야 한다.
“제가 요즘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 제목이 <아빠본색>이잖아요. 어쩔 수 없이 아빠 중심으로 제게 유리하게 나갈 수밖에 없어요. 잘 모르는 분들은 아내가 철이 없다고 댓글을 남기기도 하시더라고요. 당연히 이 사람은 속앓이를 했고요. 아내로, 엄마로 열심히 살아가는 아내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이창훈)
“댓글을 보면서 속상했던 것은 사실이에요. 이젠 괜찮아요. 저희 부부를 아는 사람들은 그냥 웃어넘기면서 보고 있거든요. 심지어 저희 친정엄마도 딸보다는 시청자 입장에서 ‘방송의 재미를 위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뭐’라고 말씀하시지 뭐예요.(웃음) 이젠 댓글 보고 웃기도 해요. 여유가 생겼죠. 하지만 여전히 방송이 쉽지는 않아요. 촬영하면서 가족 관계가 돈독해진 것도 맞고, 여러 가지 이벤트를 통해 잊지 못할 경험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요.” (김미정)
처음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이창훈은 고민을 많이 했다. 한창 살이 찐 때였고 자신감도 떨어진 상황이었다. “왜 우리 가족을 찍으려고 하느냐?”는 이창훈의 질문에 프로그램 작가는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왕년의 프린스가 아토피 걸린 딸 때문에 과천에 내려와 산다는데,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나?”
“저는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대중 앞에 나섰거든요. 그런데 프로그램 작가가 제게 말하더군요.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어떨까요?’ 그 한마디가 제 마음에 꽂혔어요. 숨기지 말고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자, 부족하지만 나아지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진심은 통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생각한 것보다 반응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어요. 다니는 곳마다 인사를 받아요. 저희 부부가 나올 때 프로그램 전체 시청률의 거의 두 배까지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나, 아직 살아 있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웃음)” (이창훈)
부부는 효주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과천에서 살 예정이다. 완쾌됐다고 생각하지만 아토피가 또다시 도지면 안 되니까.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효주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다. “우리 딸이 학습 스트레스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부부가 약속한 게 있어요. 절대로 밤 12시까지 억지로 공부시키는 그런 일은 하지 말자고요. 전교 꼴찌를 해도 괜찮아요. 뛰어나지 않아도 돼요. 평범하지만 남한테 폐 안 끼치고 예쁘게 살면 돼요. 행복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하죠. 부모는 디렉팅만 해주면 된다고 봐요. 아이를 위한답시고 부모 욕심을 짐 지우는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정말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프지만”이라고 단서를 달며 이창훈이 말을 이었다. “성품 좋고 아내 아껴주는 남편감 만나서 결혼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죠. 제 인생 숙원 사업입니다.” 순간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딸 바보다.
“얼마 전에 갑자기 지진이 났잖아요? 해가 져서 캄캄하고 인터넷에는 지진이 났다고 난리인데, 효주가 그때 친구 집에 있었어요.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아내에게 말했죠. ‘여보, 미안한데, 우리 효주가 좀 더 클 때까지는 해 진 다음에는 친구 집에 못 가게 하자.’” (이창훈)
“이이랑 하나 더 약속했어요. 고등학생 때까지는 효주의 등·하교를 챙겨주자고요.”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미정 씨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엄마, 예쁘다” 하며 효주가 미정 씨의 손을 잡았다. “옛날에 머리 길 때는 정말 예뻤는데. 요즘은 별로…”라고 하면서도 이창훈은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미녀 여배우를 얼마나 많이 봤겠어요? 화장기 하나 없이 이 정도 미모는 쉽지 않아요. 그렇죠?”
촬영을 마치고 집 근처 언덕을 내려오는 길, 부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허리를 감쌌다. 촬영 장비를 챙겨 넣던 포토그래퍼는 다시 카메라를 꺼내 그 모습을 담았다. 부족하지만 함께 메워가며 오늘을 최고의 날로 만들어가는 이 부부에게, 마음속 소망이 무엇인지 물었다.
“아직도 저를 궁금해하는 분이 많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저 이제 3kg만 빼면 예전 몸매로 완전하게 돌아가거든요. 그러면 다시 연기자로 찾아뵙고 싶어요. 예전에는 ‘살인마’ 같은 센 역할을 맡고 싶었는데, 가장이 되면서 꺼려지더라고요. 그래도 좋은 기회가 오면 감사하게 연기할 거예요. 배우로서 좋은 연기를 보여드리는 것 이외에도 가장으로서 부족하나마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이창훈)
“남편과 효주가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저를 위한 소망요? 음… 아이가 좀 더 크면 저만의 작은 공방을 만들고 싶어요. 원래 초나 디퓨저 만드는 클래스를 운영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수강생도 끊이지 않았는데 ‘메르스’가 모든 것을 망쳐놓았죠.(웃음) 언젠가 작은 공방에서 이것저것 만들어 고마운 분들에게 선물도 하고 수업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아직은 먼 꿈이에요.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친구 만나기에도 시간이 빠듯하거든요.” (김미정)
“음… 저는… 나중에 수의사가 되고 싶어요. 강아지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아빠,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고요. 과천에서 계속 살고 싶어요. 이 집이 좋아요. 친구들도 제 방을 부러워해요.” (이효주)
여심을 훔치던 90년대 청춘스타 ‘이창훈’은 지금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1천5백원짜리 동네 카페의 커피를 “스타벅스 커피보다 10배는 맛있는 것 같아요”라며 마시고, 2년째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운영위원으로 활약 중이며, “옛날에 사놓은 양복이 아까우니 그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몸을 맞춰야 한다”고 말하는 남자. 20년 전 드라마에서는 타이틀 롤에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오는 주연배우였다. 그러나 지금 이창훈의 집 앞에는 ‘효주네 집’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아빠와 남편으로 사는 지금이 더 행복한 이창훈은 여전히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