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cm의 큰 키는 현직 모델로 오해할 만했다. 해외 패션 위크라면 빼놓지 않고 챙겨 볼 이미지였다. 기세 좋은 몸집은 아마추어 축구단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첫인상은 쉽게 뒤집혔다. 모델로 잠깐 활동하긴 했지만 브랜드도 잘 모를 만큼 패션에 문외한인 데다 학창 시절 축구라도 할 때면(발로 하는 운동을 잘 못해서) 골키퍼만 맡아왔다고 말하는 그다. 실제 윤균상은 생각보다 더 친근했다. 날카로운 눈빛과 장난기 묻은 눈매가 공존하는 인상은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나쁜 남자’와 ‘착한 남자’를 무람없이 오갈 것 같은 인상이랄까.
윤균상은 스스로도 “온도 차가 확연히 드러나는 얼굴”이라고 말했다. 그 차이를 연기할 때 십분 활용했다.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닥터스>에서 ‘정윤도’를 연기할 때 그랬다. ‘유혜정’(박신혜 분)을 향해 차가운 은식기처럼 날 선 모습을 보이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후로는 뚝배기처럼 끓어올랐다. 한쪽만 불붙은 짝사랑을 연기했지만 그 덕에 윤균상은 배우로서 스파크가 번쩍 튀었다.
흔히 드라마에서 ‘짝사랑’남은 사랑에 ‘실패’한 남자로 비치곤 한다. 하지만 정윤도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짝사랑도 사랑’이라고. 그 사랑은 커 보였다. 짠하거나 안쓰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 한결같은 ‘직진남’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드라마가 끝난 지 일주일 만에 마주한 그는 ‘윤도’와 헤어지는 것이 힘들다고 털어놨다.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애착이 컸다.
“윤도로 지낸 몇 달간 저만큼 윤도를 사랑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는 윤도가 사랑을 하길 원했어요. 짝사랑도 사랑이잖아요?(웃음). 마지막 회 대사 중에 ‘내 짝사랑 무시하지 마. 세상에 사랑이란 말 들어간 건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나아’가 있어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대사였죠. 윤도라는 인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택한 혜정을 끝까지 응원해주고, 그녀의 사랑을 쿨하게 인정해줬잖아요. 둘 사이를 갈라놓겠다고 계략을 꾸미지도 않았고, 질투에 미쳐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죠. ‘이상적인 짝사랑’을 그린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윤도를 놓아주는 것만큼 서운한 건 식구처럼 지내던 배우, 스태프들과 헤어져야 하는 사실이다.
“매일 보다시피 한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과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워요. 제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거든요. 또래 배우들과 대기실을 함께 쓰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요. 촬영 중에 짬 나면 같이 밥도 먹고, 촬영 끝나면 술 한잔도 하고요. 정말 행복했어요. 작품을 마치고 나면 항상 많이 힘든데, 어떻게 하면 무난하게 이 시기를 넘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팬으로서 좋아하던 김래원은 작품을 같이 하게 되면서 ‘형, 선배’라고 부를 수 있게 됐고, <피노키오> 이후로 두 번째 만남인 박신혜는 친구로서, 선배로서 많이 의지했다. 에너지 넘치고 장난기 가득한 이성경과 김민석을 두고는 “비글처럼 귀엽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특히 함께 호흡하는 신이 많았던 이성경과는 인스타그램에서 친밀한 사진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썸’ 타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그 얘기 듣고 저희 둘이 ‘우리 이러다 열애설 나겠다’ ‘우리가?’ 하면서 한참 웃었어요. 현장에서 그만큼 케미가 좋았다는 거겠죠?(웃음) 다 드라마가 사랑받아서 생긴 일이라 오히려 기분 좋았어요.”
<닥터스>는 방영 초반, 주연을 제외하고는 연기력이 검증되지 않은 배우를 쓴 것 아니냐는 우려를 받았다. 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근심은 기대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연기력을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믿었던 배우인데 실망이라는 반응이었다면 좌절했을 거예요. ‘윤균상이 이 역할을 잘할까?’ 했는데 반응이 좋았던 거라 성취감이 있었어요. 전문직을 연기하는 게 처음엔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해내고 나니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아요. 다음엔 좀 더 프로페셔널한 의사 연기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피아노 건반도 두드려 보고(<너를 사랑한 시간>), 칼도 휘둘렀다가(<육룡이 나르샤>), 메스(<닥터스>)도 잡아봤다. “다음엔 요리사 할 것 같지 않아요?(웃음)”
윤균상은 “아직 연애하는 것보다 연기하는 게 좋다”고 했다. 둘 중 하나엔 소홀해질 것 같아서다. 친구들도 “일만 하는 너가 무슨 연애냐”며 핀잔을 준다고. 그는 둘 다 신경 써가며 할 수 있는 내공이 안 된다고 웃는다. 좋아하는 여성 스타일을 물었다. “좋아하는 스타일을 항상 생각은 하는데 대답하기가 어려워요. 싫어하는 스타일은 확실히 있어요. 예의 없는 사람요. 흔한 예로 어른을 대하는 방식이나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됨됨이가 어느 정도 보이잖아요,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전 ‘착한 여자’가 좋아요. 착하다고 느껴지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스트레스 해소 겸 취미 생활은 걷기. 허접한 취미라고 멋쩍어 했지만 한번 맘먹고 나가면 몇 시간씩이고 걸을 정도로 ‘걷기 마니아’다. 여의도에서 건대입구까지 걸어간 적도 있다. 두 다리는 쉼 없이 움직이고 귀는 음악에 집중한다. 이어폰에는 옛날 가요가 흘렀다가 힙합이 흘렀다가 한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선곡을 하는데, 음원 사이트에서 테마별로 추려놓은 음악을 듣는 식이다. 패션에도 욕심이 없고,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자동차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굳이 고집하는 음악, 영화 장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유난스럽게 ‘이거 아니면 안 된다’ 할 정도로 좋아하는 대상은 없을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기요!”라고 해맑게 한 옥타브 높여 말했다. 특별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예상보다 더 범상한 답변에 살짝 당황했다.
“고기를 너무 좋아해요.(웃음) 굳이 고르자면 쇠고기 보단 돼지고기요. 굽는 것도 기가 막히게 구워요.” 윤균상은 삼시 세끼 고기만 먹을 수도 있을 만큼 육식파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나영석 PD가 관심 가는 막내 후보로 윤균상을 지목했다.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성격에 친화력 좋은 그를 나 PD가 진즉 알아본 셈이다. “예전에도 <1박2일>과 <삼시세끼>에 출연하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어요. 러브콜 기사가 났을 때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영광이었죠.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을 좋아하거든요. 말을 재밌게 하고 콩트를 할 자신은 없는데 나 PD님의 프로그램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되잖아요. 함께한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원고를 쓰던 중 그가 <삼시세끼> 어촌편에 막내 멤버로 합류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하할 일이다. 이렇게 곳곳에서 윤균상을 찾는 이유는 뭘까? 윤균상은 ‘운’과 ‘인복’으로 돌렸다. “이 일을 하려는 수많은 배우, 배우 지망생이 너무나 치열하게 경쟁하고 많이 포기하고 좌절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데뷔하고 빨리 성장해나가는 것 같아서 운이 참 좋구나 싶어요. 다 저를 좋게 봐주신 감독님과 작가님 덕분이죠.” 출연하는 작품마다 분량도 조금씩 늘고 있다.
이번 드라마로 얻은 인기를 발판 삼아 이제 주연을 노려볼 만도 한데, 고개를 회회 젓는다. “비중이 늘어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그렇다고 섣불리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아요. 연기를 함에 있어 역할의 크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제가 하고 싶은 역할이라면 그게 카메오든 단역이든 주연이든 상관없어요.”
배우로서 크게 성장했을 때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을까?
“네.”
주저 없는 말투로 보아 거짓은 아닌 것 같다.
올해 나이 서른. <육룡이 나르샤>를 하면서 서른을 맞았고 ‘아, 서른이구나’ 싶을 때 <닥터스>를 만났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니 어느새 가을이다. 불쑥 서른하나를 바라보게 됐지만 그의 얼굴에서 조급함을 읽긴 어렵다. 오히려 “나이 먹는 게 기대된다”고, “경험이 곧 연기 내공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고 힘주어 말한다. 맞는 말이다. 세월을 덧입은 연기는 젊은 배우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견고함이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나이 먹는 자신이 참 좋다고 했다.
다음 스케줄을 물었다. 역시 인터뷰다.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 그만 그를 놓아주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궁금했다. “그 질문을 받으면 늘 이렇게 대답해요. ‘믿고 보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요. <닥터스> 시작할 때 ‘김래원과 박신혜가 주연이면 당연히 보겠다’는 반응이었잖아요.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더 나이가 들면 작가님이나 PD님이 머릿속에 저를 염두에 두고 역할을 만드는, 그 정도의 믿음을 줄 수 있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배우가 안 됐다면요? 음…. 모르겠어요(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상상이 안 돼요. 어릴 때는 하고 싶은 게 없었거든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연기가 처음이에요. 이 일로 밥을 먹고 살 수 있으니 전 참 행복해요.”
데뷔 이후로 이렇다 할 휴식 없이 일해온 윤균상은 “쉬고 싶어요. 근데 잘 쉴 줄 몰라요” 라는 알쏭한 말을 했다. 아마 윤균상에게 ‘쉰다’는 것은 ‘연기를 쉰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도무지 어떻게 쉬어야 잘 쉬는 건지 모르겠다고 어색해하는 그의 말이 기자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저 아직 연기에 목말라요.” “드라마 끝나면 이틀 내내 잠만 잘 거야, 하다가도 몇 시간만 자고 일어나면 ‘뭐 하지?’ 하는 게 저예요.(웃음)” 지금은 그의 연기 인생에서 ‘직진’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