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와 <부산행>, 드라마 <굿와이프>와 <디어 마이 프렌즈>, 뮤지컬 <엘리자벳>과 <킹키부츠> <브로드웨이 42번가>까지. 분야에 관계없이 최근 가장 핫하다는 평을 받는 이 일련의 창작물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가 포스터를 작업했다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영화, 공연, 캘리그래피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최지웅, 박동우, 이동형 등 디자이너 3명으로 구성된 이 팀이 제작하는 포스터는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디자이너들은 한창 작업 중이었다.
“지금 10개 정도의 포스터를 한꺼번에 작업하느라 바빠요. 매일 밤 11시나 12시에 들어가는 것이 예사죠. 작업이 급해지면 밤을 새우고요.”
아담한 사무실을 쭉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는 디자이너들이 작업한 포스터를 비롯한 다양한 홍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또 다른 벽에는 작업을 위한 다양한 도서가 꽂혀 있다. 3명의 디자이너가 작업하는 컴퓨터 주변에는 잡다한 서류와 펜, 그림, 종이가 널려 있었다.
“영화 포스터를 디자인한다고 하면 많은 분이 그저 스틸 컷 하나 받아서 포스터 한 장을 뚝딱 만드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은 영상과 웹을 제외한 영화의 비주얼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하는데 말이죠.”
프로파간다가 하는 일을 여기서 간단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고객에게 의뢰를 받으면 그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시나리오를 책으로 만드는 일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작품의 콘셉트에 맞춰 내지 편집 디자인, 표지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나리오 북은 영화 제작의 첫 번째 행사인 ‘고사’의 제사상 위에 올라간다. 이후로도 영화 촬영이 시작되면 프로파간다도 바빠진다. 가장 먼저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으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미지로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그러한 이미지가 결국 영화의 얼굴과도 같은 포스터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포스터를 만드는 것은 영화가 개봉하기 5~6개월 전부터예요. 포스터에 나올 배우들의 이미지, 포즈, 스타일과 세트 등을 기획해 콘티 북을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순서입니다. 그다음에는 콘셉트에 맞는 인력을 구성해야 해요. 포토그래퍼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등을 꾸려 촬영을 진행하는 거죠.”
난다 긴다 하는 배우들과 함께 하는 촬영이 일상인 프로파간다. 포스터 촬영을 가장 능숙하게 하는 배우가 누구인지 물어보니 깨알같은 에피소드가 쏟아진다.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은 포스터 촬영도 잘해요. 최근 인상 깊었던 배우는 한예리예요. 포토그래퍼가 요구하는 느낌을 정확히 살려내더라고요. <굿와이프>의 전도연도 믿고 맡기는 배우고요. <디어 마이 프렌즈> 포스터를 촬영할 때는 사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워낙 기라성 같은 대배우들이 포진한 드라마였잖아요.
그런데 웬걸, 현장에서 다들 얼마나 하하 호호 웃으면서 열심히 임해주시던지. 내공과 인품까지 갖춘 그들의 모습에 감탄했죠. 연기에 도전하는 아이돌도 생각보다 잘해요.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익숙해서 그렇겠죠. 특히 도경수 군이 인상 깊었어요.”
거의 모든 배우가 포스터 촬영에 성실하게 임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남자 배우 A는 포토그래퍼의 지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촬영에 임해 모든 스태프가 애를 먹었다. 심지어 그 촬영장에 함께 있던 까마득한 선배 배우조차 협조적으로 촬영에 임했는데 말이다. 카메라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잘하지만 대기실에서 예측 불허의 행동으로 모든 스태프를 경악하게 한 톱배우 B도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포스터를 촬영했지만, 쉽게 진행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는 게 그들의 말이다.
“최근 가장 어렵게 작업한 영화는 <해적>이에요. 포스터에 많은 배우가 나오는데 각자의 얼굴이 잘 보이면서 캐릭터가 명확히 표현되도록 하기가 쉽지 않았죠. 배우들에게 시안을 보여주며 최대한 이대로 똑같이 해달라고 주문했어요. 그리고 어떤 이미지가 드러나야 하는지 한 번 더 짚어주고요. 포스터에 얼굴이 나오지 않는 모델의 몸까지 신경 써서 진행했지요.”
역사물은 오히려 작업하기 편하다. 각자의 신분이나 역할에 따라 옷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캐릭터를 살리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극에서는 옷으로 사람의 캐릭터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을 살펴보죠. 임수정이 맡은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는 옷이 무엇인지 고민했어요. 극 속에서 그녀는 매력적이고 개성 넘치지만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해 집착하는 아내거든요. 통통 튀면서 조금은 발칙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빨간색 짧은 드레스를 입게 했죠. ‘부엌’의 조리대 위에 앉힌 것은 극 중에서 ‘부엌’이 의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었고요.”
준비하는 데 몇 개월이 걸리고 촬영하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리는 포스터 촬영. 때로는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곧 개봉할 영화 <범죄의 여왕> 포스터 촬영 현장도 녹록지 않았다. 원경을 잡아내는 구도를 살리기 위해 모든 스태프가 애를 썼건만 갑자기 예상치 못한 비가 내린 것이다. 10분 만에 후다닥 찍고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결과물은 좋았다. 음산한 날씨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렇듯 국내 영화는 80~90%가 직접 포스터를 촬영한다. 그러나 예산 규모가 작은 독립영화의 경우 포스터를 따로 촬영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는 영화의 스틸 컷을 받아 디자인에 들어간다. 제작 예산이 정말 적은 영화는 스틸 컷조차 제공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고. 그럴 때는 영화 장면을 캡처해 포스터를 제작한다. 당연히 이미지의 해상도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발상을 바꿔 더 빈티지하게 디자인해요. 가령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영화에 등장하는 에단 호크의 옆모습을 캡처해 포스터의 메인 이미지로 사용했어요. 의도적으로 디자인한 것처럼 거칠고 투박한 느낌을 살렸더니 기대 이상으로 멋진 포스터가 탄생했죠. 꼭 돈이 많이 든다고 해서 멋진 포스터가 나오는 건 아니더라고요.”
이렇게 포스터가 나와도 프로파간다의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고객과 배우들의 요청에 따라 포스터를 수정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특히 많은 배우가 출연하는 경우 인물 사진의 크기나 이름이 표기되는 순서 등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고객의 요구를 존중하지만 디자이너 입장에서 포스터의 작품성을 위해 물러서지 않을 때도 많아요. 무조건 제목이 잘 보이고 배우가 크게 나오는 것 보다 영화의 전반적인 느낌을 포스터 한 장에 잘 녹여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외국 영화의 포스터를 의뢰받아 디자인했으나 고객의 마음에 들지 않아 일반에 공개하지 않은 포스터를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을 뿐인데, 해외에서 엄청난 반응을 얻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외국에서도 포스터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나.
“정성껏 만든 포스터를 공개했는데 출연 배우들이 맘에 들어 하지 않아 완전히 새롭게 바꾼 적도 있어요. 디자이너 입장에서 새로 바꾼 포스터는 너무나 처참했어요. 하지만 어쨌든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게 저희가 할 일이기 때문에, 언제나 포스터 자체의 예술성과 고객의 목소리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죠. 그런 면에서는 돈이 많이 안 되더라도 독립영화 포스터를 작업하는 게 즐거워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따르려고 하시거든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맞다. 하지만 배우들과 직접 소통하고 촬영하며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프로파간다에게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배우들의 얼굴이란 참 흥미로운 소재잖아요. 가령 얼마 전 배우 김윤석과 촬영했는데 자연스러운 주름이 오히려 특유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더라고요. 포스터를 작업하며 보니 사진이 아니라 회화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독특한 얼굴이었어요.
솔직히 많은 여배우가 포스터 사진을 보정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부산행>의 정유미는 “다른 배우들은 긴박하게 도망치는 장면을 연기하느라 얼굴이 일그러졌는데, 나 혼자 너무 깨끗하게 나온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며 불평 아닌 불평을 하더군요.
또 일본 배우 오다기리 조의 얼굴에 있는 점을 지웠는데 소속사 측으로부터 점을 지우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들은 적도 있고요. 일본은 대체로 인위적으로 손대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더라고요.”
지금은 많은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알아주는’ 스튜디오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상업 영화의 천편일률적인 포스터보다는 진정으로 좋아하는 작품에 맞는 창조적인 포스터를 만들고 싶었던 최지웅과 박동우는 함께 일하던 회사를 나와 그들만의 스튜디오를 차렸다. 처음에는 알음알음으로 소수의 작업물을 의뢰받은 정도였다.
그러다 일본 배우 오다기리 조가 주연한 <비몽>의 포스터가 당시 인기 영화 잡지에서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포스터’로 뽑히며 조금씩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후 예상치 못하게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흥행하며 프로파간다가 작업한 포스터도 덩달아 주목받았다. 이후로는 끊임없이 포스터 제작 의뢰를 받아 진행하게 됐다. 2008년 회사를 차린 지 몇 년 후 이동형이 합류하며 프로파간다는 지금의 3인 디자이너 체제를 구축했다.
“돌아보면 운이 좋았죠. 대신 저희도 좋은 감독님의 단편영화는 보수를 받지 않고 작업할 때도 있어요. 훌륭한 작품에 정성껏 만든 옷을 입혀주고 싶은 마음인 거죠. 저희는 모두 기본적으로 영화를 사랑하고 좋은 영화가 대접받기를 바라거든요.”
디자이너는 창조하는 사람이다. 축적해둔 에너지를 꺼내 쓰는 만큼 그 이상으로 채워야 하는 직업. 이들도 쉬는 시간에는 전시를 보고 잡지를 읽고, 여행을 떠나며 스스로를 채우려 애쓴다.
“프로파간다는 아직 갈 길이 멀거든요.(웃음) 저희가 늘 꿈꾸던 것 중에 하나가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를 제작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올해 드디어 그 일을 맡게 됐어요. 감개무량하더라고요. 그다음은 칸국제영화제 포스터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웃음) 농담이에요. 하지만 세상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요?”
프로파간다는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국내에서는 비주류로 불리는 SF나 공포영화의 느낌을 잘 살려낸 포스터를 작업하고 싶다. 좋아하는 여배우들을 피사체로 삼아 예스러운 포스터도 찍어보고 싶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함축적으로 잘 뽑아낸 포스터를 만들고 싶다. 10년 뒤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그런 포스터 말이다.
“프로파간다는 내년에 10주년을 맞아요. 그래서 10주년 포스터 기획전을 해보고 싶어요. 거창하게 하는 거 말고, 좋은 장소에서 소소하게라도요. 전에 청량리에 갔다가 작은 극장을 봤어요. 소위 외설적이라고 하는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죠. 그런데 건물 내부가 정말 독특하고 흥미롭더라고요. 그렇게 지금은 망했지만 여전히 느낌 있는 극장 같은 곳에서 우리의 포스터를 전시한다면 행복할 것 같네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듯 3명의 디자이너가 다투어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포스터는 관객에게 가장 먼저 선보이는 영화의 옷이에요. 관객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물론 영화의 힘이지만, 우리는 ‘영화를 거들어주는’ 포스터를 만들고 싶어요. 영화의 매력을 대중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그런 포스터요.”
세 남자는 이미 그런 포스터를 만드는 디자이너들이다. 그들의 새로운 작업물을 보고 온 기자가 확신하며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