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L 코리아〉 ‘더빙극장:거침없이 하이킥 편’ 속 대사 ‘호박고구마’로 데뷔 이래 가장 바쁘다. “배우들이 여러 매체와 라운딩 인터뷰를 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권혁수가 A컷을 위해 카메라와 씨름하는 동안 매니저 역할을 하는 분이 다가와 말했다.
그 정도로 정신없이 바쁜 요즘이란다. 하루에 전화 1백 통 이상, 하루 평균 스케줄 4~5개. 바쁜 일정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어렵게 잡은 약속이었다. 가장 뜨거울 때 호호 불어가며, 혀 데어가며 먹어야 제 맛인 호박고구마처럼 가장 바쁠 때의 그가 보고 싶었으니까.
인터뷰 스케줄을 잡고 얼마 뒤 그가 출연한 예능 프로 <라디오스타>를 챙겨 봤다. 권혁수는 가장 자신 있는 패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방송에서 선보인 성대모사 퍼레이드는 깔축없는 권혁수의 영역이었다. 김경호, 이경영, 유해진, 나문희, 한석규 등 각 인물의 특징을 얄밉도록 잘 캐치했다. MC들은 ‘극사실 모사’라며 열광했고, 그는 제 역할이 끝나면 조용히 관객 모드로 돌아갔다. 출연자들의 토크 사이로 불쑥 고개를 내미는 법이 없었다.
“실제로 촬영장에서 김구라 형님이 ‘너무 (아이템을) 아끼네’ 이러시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있었나 봐요. ‘억지로 무리하지 말자’는. 상황이 과하면 연기가 과하지 않아야 하는 경우도 있고, 과장했다고 해서 무조건 재밌는 것도 아니잖아요. 완급 조절이 필요한 것 같아요.”
권혁수에게 사람들을 웃겨야 한다는 사명은 없다. 그는 개그맨이 아니니까. 〈SNL 코리아〉 (이하 〈SNL〉)에서 보여준 코믹 연기 때문에 종종 오해받는 것뿐이다. 그래도 괜찮단다.
“제가 잘하고 있구나 생각해요. 이건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웃음) 〈SNL〉은 코미디가 기반이 되는 프로잖아요. 제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인정받기 힘들거든요. 멤버 교체도 잦고요. 개그맨으로 오해를 받는다고 해서 기분 나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정극은 앞으로도 할 수 있는 날이 많으니 조급하진 않아요.”
그는 〈SNL〉 출근길이 즐겁다. 얼마 전엔 시즌 8 티저 촬영을 마쳤다.
“〈SNL〉 출연은 일한다는 생각으로 하지 않아요. 동료들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현장이 정말 즐거워요. 개인적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현장에서 풀 정도예요. 아마 제가 NG를 제일 많이 낼걸요? 하도 웃어서.(웃음)” 선배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도 많다. “정성호 선배님은 분장을 직접 하세요. 한 인물의 캐릭터를 사진만 봐도 파악할 정도로 눈썰미가 좋으시거든요. 제가 <라디오스타>에서 보여드린 한석규 성대모사도 선배님한테 지도받은 거예요.”
코너 하나로 이렇게 주목받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까? 그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더빙극장>은 세영이의 전유물이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워낙 그 친구가 잘하잖아요. 정말 연습벌레예요. 준비가 완벽하니 촬영도 제일 빨리 끝나고요. 저는 컨디션 좋게 가서 현장에서 연습하는 ‘척’하는 스타일이랄까.(웃음) 실은 ‘더빙극장’ 첫 촬영을 앞두고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촬영 전날 PD님한테 전화해 자신 없다고, 내가 과연 잘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투정했죠.”
권혁수를 이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만든 ‘더빙극장’은 〈SNL〉의 한 작가가 영화 <추격자> 더빙 영상을 만들어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입 모양과 감정 싱크로율을 위해 상당한 연습이 요구될 것 같았다.
“캐릭터 결정이 나면, 작가들이 수많은 영상 소스 중에서 어떤 걸 할지 편집해보고, 웃음 포인트는 어떻게 될지, 인물은 몇 명 등장시킬 건지 등을 다 계산해요. 황정민 선배님이 ‘숟가락 소감’을 말씀하신 게 시간이 갈수록 더 공감이 가요. 작가를 비롯한 수많은 스태프가 뒤에서 다 받쳐주는 거거든요. 근데 최종 컨펌이 좀 급하게 날 때가 있어요.(웃음) 연습할 시간이 거의 없죠. 근데 뭐, 등 떠밀리면 최대한 멋있게 다이빙을 해야 하는 게 연기자 몫이니까요.”
그는 유치원 때부터 될성부른 나무였다.
“나중에 크면 되게 유명한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어요. 양로원 같은 곳에 가서 공연을 했는데 어린 나이지만 고개 빳빳이 들고 참 열심히 했거든요. 아마 나이 대비 지금보다 연기를 더 잘했을 거예요.(웃음) 공연 마치고 유치원에 돌아와 집에 갈 채비를 하는데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불러 넌지시 말씀하시더라고요. ‘오늘 네가 제일 잘했어.’”
그 칭찬을 온몸에 새긴 어린 권혁수는 ‘하! 내가 제일 잘했다!’고 뿌듯해했다. 배우로 향하는 길의 유일한 장애물을 꼽자면 ‘식탐’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뚱뚱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오늘 인터뷰도 한차례 시간을 미뤘는데 이유는 차가 막혀서도, 그가 스케줄을 깜박해서도 아니었다. 밥을 먹고 오겠다는 게 이유였다. 때 되면 밥 먹어야 하는 그 맘, 너무나 잘 안다.
“저는 밥을 안 먹으면 일을 못 해요. 촬영장에서도 PD님한테 반 협박조로 말해요. 밥 주면 연기 더 잘할 수 있다고. 어릴 때 위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그러셨거든요. ‘우리 혁수는 아이스크림 배 따로 있고, 과자 배 따로 있어.’ 그래서 전 제 위가 개미집처럼 생긴 줄 알았다니까요.(웃음) 근데 위가 하나인 사실을 알고 믿기지가 않았던 거죠.”
살을 빼야겠다고 맘먹은 건 몸무게가 세 자리 수를 찍었을 때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는데, 그 안에서 배역 싸움을 위해 또다시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거대한 몸집은 불리할 것 같았다. 독하게 뺐다. 인생 최고 몸무게와 최저 몸무게가 40kg 이상 차이 난다.
촬영 내내 허벅지가 굵다며 볼멘소리를 뱉은 그다. 다이어트에 돌입하겠다고 적은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봤다고 하자, “10개 먹을 걸 9개 먹는 게 다이어트라고 하면 믿으시겠냐”며 농을 한다. 이렇게 먹기 좋아하는데 살이 안 붙을 리가. “저는 뚱뚱보의 영혼이 있는 것 같아요. 먹으면서 먹는 생각해요. 진짜로.” 귀엽다, 권혁수.
권혁수는 새로이 오고 가는 〈SNL〉 크루들 사이에서 5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았다면 살아남은 그도 슬럼프가 찾아온 적이 있다.
“연기적인 한계를 느꼈을 때, 제작진한테 자진해 하차해야 할 것 같다고 얘길 꺼낸 적이 있어요. 배우가 무대를 스스로 떠난다는 말을 내뱉는 게 쉽지 않은데 어린 맘에 그랬던 것 같아요. 프로그램 탓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어요.”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고 느꼈던 그때 권혁수는 훌쩍 여행을 떠났다. “나중에는 가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 못 가니까 여행 가는 데 돈 아끼지 말라”는 한 선배의 조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청춘에 먹음직스러운 고명을 얹어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어 지난 설 때 오사카로 여행을 갔다.
“혼자 여행을 떠난 것이 재충전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아마 오사카 어디 근처에 제 걱정과 근심이 돌아다니고 있을 거예요.(웃음) 혼자 있고, 혼자 생각하고, 혹은 아무 생각 없이 그 무엇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상상 못한 일이었어요. 오사카도 사람 사는 동네니까 보기에는 똑같았죠. 근데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들이 전화 통화는 물론이고 말도 잘 안 하는 거예요.
전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부터 해야 하고, 음악도 들어야 하고, 늘 파이팅이 넘쳐야 하는데 세상에 혼자 있는 느낌이었어요. 꿈보다 해몽인가요?(웃음) 그게 오히려 좋은 작용을 한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생각이 없어질 때가 오더라고요. 많이 내려놓을 수 있게 됐죠. 요즘도 혼자 운전하면서 명상하듯이 생각 비우기 연습을 해요. 생각이 많으면 될 것도 안 돼요.”
권혁수의 사진을 모니터하다 스태프 중 한 명이 ‘모성애’를 자극하는 얼굴이라고 했다. 기자는 그의 살짝 말려 올라간 긴 속눈썹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 말을 건네자 적잖이 당황한 눈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진짜요? 집어던지고 싶은 얼굴이 아니고요?” 문득 권혁수의 연애법이 궁금해졌다.
“제 연애 스타일은 좀 거침없어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거절당하는 스타일이에요.(웃음) 솔직해서 그런가 봐요. 상대가 부담스러울 거라 생각 못 하고 ‘이 정도는 해줘도 되겠지, 이정도면 친해진 거겠지, 이런 데이트 코스는 괜찮을 거야’ 이렇게 혼자 생각해요. 연애에도 단계가 있는데, 좀 저돌적인가 봐요. 혼자 핸들링 느낌으로 연애를 하니까….”
“서로 캐치볼을 해야죠”라는 기자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그게 안 되는 것 같아요. 마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마냥 상대에게 내리 잘해주니까요. 뭔가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요. 이제 좀 의연한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어른스러운 연애요.”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지자 자연스레 화제가 먹는 얘기로 옮겨갔다. 인터뷰 끝나면 뭐 먹을지 방언 터지듯 신나게 떠들었다. 먹는 얘기로 한참 혀를 고문하고 나니 권혁수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얼마 전 자다가 ‘냉채족발!’을 외치면서 깬 적이 있어요. 겨자소스 뿌리고 채소 듬뿍 얹은 냉채족발이 꿈에 나왔거든요. 동네 친구 불러 결국 먹었어요. 와, 그때의 희열은….”
연기가 생각한 대로 잘 나왔을 때보다 더 기분 좋은 거냐고 되물었다. 눈에 띄게 겸손해진 어조로 그가 말했다.
“글쎄요. 연기가 잘 나왔다고 만족한 적이 아직 없어서요.”
현답이었다. 인터뷰 내내 먹는 얘기로 새곤 했던 그는 결국엔 ‘연기’로 보여줄 게 가장 많은 ‘배우’였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파이팅’ 대신 ‘호박고구마’를 외쳐준다기에 응원의 한마디를 보탠다. “권혁수, 호!박!고!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