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류준열이 tvN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로 별안간 얻은 인기가 ‘거품’인 줄 알았다. 황정음보다 눈에 띄는 연기로 MBC <운빨로맨스>를 이끄는 그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류준열은 두 번째 드라마로 자신을 둘러싼 열기와 환호가 결코 거품이 아니었음을 증명해냈다.
<운빨로맨스>를 막 끝낸 류준열은 영화 <택시운전사> 촬영 중 잠깐 짬을 냈다. 촬영을 마치고 광주에서 올라오는 길이라고 했다. <응팔>부터 영화 <더 킹>, 드라마 <운빨로맨스>를 거쳐 다시 영화 <택시운전사>까지. 잠시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그는 인터뷰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싶어 했다.
“<응팔> 이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작품에 출연했어요. 드라마 촬영 후 바로 영화 촬영장으로 가는 스케줄이었죠. 현장 스태프와 선배 배우들이 ‘힘들지?’ 하며 챙겨주고 응원해주신 덕분에 힘낼 수 있었어요. 체력요? 아시잖아요. 제가 갖고 있는 건 체력밖에 없어요.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있어요. 힘들어도 안 힘들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거든요. 바쁜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혹자는 <응팔> 출연 후 차기작에서 미끄러진 배우들을 예로 들며 ‘<응팔>의 저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류준열 역시 <응팔>의 흥행이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첫 번째 숙제였다.
“<응팔>보다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작품에 매진했죠. 저는 지금 왠지 깊은 바다 가운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것 같아요. 점점 물이 차오르는 느낌이랄까요. <응팔>이 이제 막 물에 발을 담근 작품이었다면 <운빨로맨스>는 발목까지 담근 작품이에요. 시간이 더 지나면 무릎까지 물이 차오르겠죠?”
류준열이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솔직히 ‘부담’이라는 말보다 ‘소중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아요. <응팔>에 출연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감사해요. 오랜 시간 배우 활동을 하다가 노년이 됐을 때 ‘류준열의 대표작은 <응팔>이었다’고 해도 전혀 서운하지 않을 작품이에요. 그만큼 제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소중한 작품이죠.”
지난 2년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를 찾는 곳이 많아졌고 그만큼 팬들의 기대도 높아졌다. 꿈을 이뤘다는 행복감과 바쁜 일상 속 무료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피곤하고 힘든 일상을 위로해주는 건 팬들이었다.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그래요. ‘피곤한데도 장난을 잘 치고 밝다’고요. 팬들을 만날 생각에 힘이 나는 것 같아요. 다음 주 방송을 기다리는 팬들, 그 팬들이 보내주는 손편지 같은 것이 제 에너지의 원천이죠. 그리고 촬영 현장에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해요.”
모범 답안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목소리와 표정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고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박힌다고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위로가 되는 또 다른 건 없느냐고. 특별한 취미가 없다던 넉 달 전과는 완전히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스케줄을 마치고 집에서 가만히 누워 있는데 문득 촬영하고, 자고, 일어나서 또 촬영하러 가고,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이 소모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뭐라도 해서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음악 감상이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에요. 친구를 만날 수도 없고 게임을 할 수도 없는 바쁜 일상에서 찾은 한 줄기 힐링법이라고나 할까요.”
스스로도 놀라운 변화였다. 류준열은 기자에게 엔니오 모리꼬네의 ‘러브 어페어’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들어야 하는 곡”이라고 강조했다. “점심시간이나 근무 중에 들으면 곡의 참맛을 모를 것”이라는 충고도 했다. 분명히 엉뚱한 구석이 있는 남자다.
“저요? 엉뚱하죠. 그런 엉뚱한 생각이 모두 경험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워낙 자유분방하게 살아서 사람도, 사건도, 에피소드도 많죠. 그런 데서 연기적인 힌트를 많이 얻을 수 있어요. 엉뚱한 사고가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가 만난 사람, 사건, 에피소드는 모두 아르바이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카페에서 일했고, 음식점에서 그릇도 닦아봤다. 고깃집 알바는 기본이었다. 초등학교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방과 후 교사로도 일했다. 류준열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사회생활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더불어 인격 수양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연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한 이유는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서였어요. 돈이 없어 라면만 먹고 살다가는 연기를 포기할 것 같았죠. 힘들 때 커피 한 잔 정도는 사서 마실 수 있는 여윳돈이 있어야 지치지 않고 연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사람인데 계속 경제적으로 힘들었다면 언젠가는 현실과 타협했을 거예요. 타협하지 않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던 거죠.”
남 모르게 했던 노력이 뒤늦게 빛을 발해서일까.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오디션을 보던 얼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네도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여전했다. 혹시 연기를 하지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작품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언제 또 브라운관을 통해 팬들과 만날 수 있을까 싶죠. 주연이라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팬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아요. 모든 순간이 고민의 순간이에요.”
그는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는 채 지나가는 시간을 순리에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 방법을 택했다.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이 일이 즐겁기 때문에 배우로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부담이 되느냐, 걱정이 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행복하다’ ‘고맙다’ ‘감사하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긍정적인 생각이 모두 연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넉 달 전에도 똑같이 말했다. “고민스럽지만 의심한 적은 없다”고.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 마인드와 사고가 평생 똑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 역시 그때와 똑같았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진다”는 것도 여전했다.
“10년 후에도 연기를 하고 똑같이 인터뷰를 하고 있을 것 같지만 쉽게 내다볼 수는 없는 일이죠.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 했던 말이 다 후회되고 생각이 바뀌기도 하거든요. 불과 한 시간 전에 한 이야기도 ‘아, 그게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는데, 10년 후에는 얼마나 많이 바뀌겠어요. 그래서 미래의 자화상도 특별히 없어요. 단지 ‘이웃을 생각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생각하는 정도예요.”
진지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류준열이 먼저 가벼운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물었다. 연애는 하고 있느냐고. 돌아오는 대답도 ‘류준열스럽다’.
“기억이 안 나요.(웃음) 연애는 늘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팬들과 기자님과.(웃음)”
류준열의 농담에 분위기는 금세 반전됐다. 언제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놨었느냐는 듯 재치가 있었다.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능력을 타고난 게 분명했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도 막힘없이 술술 풀어냈다.
“작품처럼 연애하고 싶어요. 전혀 모르는 스태프와 배우가 만나서 호흡을 맞추고 서로 알아가다가 나중에는 헤어지기 싫어 울 정도로 정이 들잖아요. 오디션을 볼 때나 인터뷰를 할 때 늘 떨리거든요. 누군가 새로 만난다는 떨림이 있는데, 사랑도 설렘이 가득한 만남이었으면 좋겠어요.”
여성 팬을 위한 희소식 하나. 류준열은 적극적인 여성을 좋아한다. 나이도 중요하지 않다.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눌 수 있는 여자라면 오케이란다.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대시하기란 쉽지 않아요. 그 용기에 늘 박수를 보내는 편이죠. 꼭 사랑 고백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이도 중요하지 않아요. 일례로 <응팔>에서 만난 혜리와 <운빨로맨스>에서 만난 황정음 선배님 모두 좋았거든요. 연기하는 과정에서 함께 소통하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솔직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여자친구가 <운빨로맨스>의 ‘심보늬(황정음 분)’처럼 미신 맹신자라면 류준열은 어떤 선택을 할까?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미신을 믿는 걸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녀의 삶과 정체성을 인정할 거예요. 전 적극적인 여자가 좋아요.”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조금만 시각을 달리 하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이게 마련이다. 실제의 류준열 역시 드라마 속 ‘츤데레’ 캐릭터와는 조금 다른 면모가 있었다.
“<운빨로맨스>의 ‘제수호’는 공원을 걸으면서도 ‘좋다~’고 표현해요. 저도 그렇게 감정 표현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솔직한 편이죠. 다만 싫은 것보다 좋은 걸 더 잘 표현해요. 또 모든 면에 대해 긍정적이에요. 좋은 이야기는 좋게 듣고, 안 좋은 이야기는 빨리 잊으려 해요. 예를 들어 저한테 물이 안 좋다고 하면 오히려 물에 더 가는 스타일이죠.(웃음)”
류준열을 가볍게 정의하자면 ‘술 자체는 즐기지 않지만 술자리는 좋아하는 사람’ ‘사람이 좋아서 축구를 하는 사람’ ‘지인들과 수다 떠는 게 쉬는 방법인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곁에는 늘 사람이 있다. 요즘엔 선배 배우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황정음 선배님과의 연기는 환상적이었어요. ‘로코의 여왕’이니까 처음부터 기대가 많았는데 ‘역시나’였어요. 사람들이 괜히 ‘황정음, 황정음’ 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죠. 연기하는 동안 배려를 많이 받았어요.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서야 그 모든 게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더라고요.”
그의 말에 따르면 황정음은 같은 소속사 후배인 류준열을 극진히 챙겼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처음으로 도전하는 후배가 갈피를 잡지 못할까 싶어 함께 걱정하고 고민했다. 류준열은 그녀의 배려에 무한한 감사를 보냈다.
“‘로코’에 도가 터 있는 분이잖아요. ‘이 장면에서 이렇게 하면 더 사랑스러워 보일 거야’라고 팁을 주셨죠. 생애 첫 키스신을 찍었는데, 편안한 분위기에서 촬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덕분에 많이 릴랙스됐고 예쁜 키스신이 나온 것 같아요.”
영화 <더 킹>에서는 조인성과 만났다. 어렸을 때 조인성의 연기를 보며 꿈을 키워온 그로서는 ‘영광 그 이상’이 아닐 수 없었다.
“조인성 선배는 시트콤 <뉴 논스톱>에서 처음 봤는데, 그때의 풋풋했던 배우가 지금은 영향력 있는 배우가 됐어요. 현장에서 선배님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문득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죠. 연기뿐만 아니라 인생 노하우에 있어서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선배예요. 가만히 있어도 화보가 되고, 말 한마디 툭 내뱉어도 멋있는 분이에요. 많이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이야기하던 류준열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강력한 한 방을 꺼내놓을 기세였다.
“지금 촬영 중인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만난 송강호 선배님은 정말 어마어마한 분이에요. 제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는 없지만, 옆에서 바라보고 또 카메라 안에서 숨 쉬면서 움직이는 걸 보는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졌죠. 그 모습만 봐도 배울 게 있거든요.”
류준열은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사랑과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처와 좌절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된 천생 배우. 무너지고 다치더라도 오래 연기하고 싶다는 류준열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연기에 쏟아 붓고 있었다.
“오래 연기하고 싶어요. ‘배우’라는 타이틀이 정말 좋거든요. 제가 존경하고 닮고 싶은 배우도 오래 연기하는 선배님들이에요. 유해진 선배님 같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고 매력이 무궁무진한,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변함없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분명한 건, 그는 오늘도 성장 중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