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지의 비참한 환경
1850년 초, 옴스크에서 시작된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 생활은 그가 종종 ‘지옥’에 빗댈 정도로 비참했다. 그러나 후일 그는 자신의 수인(유형수) 시절에 대해 “나의 혼의 구제를 위한 중요하고도 유익했던 때”라고도 말했다. 그 기간에 많은 깨우침을 얻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 후의 작품에 유형 생활의 경험이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4년간의 유형 생활을 끝내고 석방된 후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유형지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오래전에 폐기되어서 이젠 사용할 수 없는 낡고 찌그러진 목조 건물을 상상해보세요. 여름이면 참을 수 없이 덥고 겨울이면 추워서 견딜 수 없으며 마룻바닥은 온통 썩었는데 그 위에 2cm 정도의 먼지가 쌓여서 미끄러져 넘어지게 됩니다. 작은 창문은 서리로 얼어붙어서 책을 읽을 수도 없습니다. 유리창은 3cm가 넘게 얼음이 얼어붙고 천장에서는 물이 떨어져 흐릅니다. 우리는 통 속의 청어같이 웅크립니다. 난로에는 여섯 토막의 통나무를 넣지만 열기는 조금도 없고 방 안의 얼음도 녹이지 못하고 연기만 자욱해지는데 겨울은 내내 이렇게 보내게 됩니다. 이 바라크 속에서 죄수들은 옷가지를 씻는데 좁은 바라크 속이 온통 물바다가 되어 몸 돌릴 곳도 없게 됩니다. 석양이 지면서 새벽이 되기까지는 마음대로 대소변을 보러 나갈 수도 없습니다. 자물쇠로 채워놨기 때문이지요. 큰 통은 복도에 놓여 있는데 코를 들 수 없는 악취가 풍깁니다. 죄수들도 돼지처럼 악취를 내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 있는 이상’ 돼지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도스토옙스키 평전』, 열린책들, 70쪽)
도스토옙스키는 미하일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감옥에서 육체적 고통보다 더 나쁜 점은 한 시간도 혼자 있지 못하고 강제적인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며 “4년 동안 무엇보다도 그것을 참는 일이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혼자 있는 것은 마시고 먹는 일처럼 정상적인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고도 했다.
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옙스키는 4년의 시베리아 유형 생활과 5년 3개월의 시베리아 군 복무를 마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유형 생활의 경험을 담은 『죽음의 집의 기록』을 1862년 탈고했다. 쓰기 시작한 것은 수용소에서 나온 다음 해인 1855년부터다. 그 후 1860년부터 1862년 사이에 <러시아 세계>와 <시대>지에 게재했던 것을 정리하여 책으로 냈다. 이 책은 오랫동안 문학계에서 잊혀 있던 그를 새롭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내를 죽인 혐의로 노동 유형수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10년의 형기를 마친 한 남자의 회고록 형식으로 쓴 것인데 시베리아 유형 생활에 대해 쓴 러시아 최초의 책이다. 몇 군데 불온한 표현들을 삭제하는 조건이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용케 검열을 통과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것이 소설로 간주되기를 바랐지만, 장르상으로는 수기에 해당된다.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는 도스트옙스키 최고의 걸작이라고 이 책을 높이 평가했다. 이 책의 가장 유명한 부분은 어쩌다 있는 죄수들의 집단 목욕 장면이다. 도스토옙스키의 탁월한 묘사가 돋보인다.
“목욕탕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우리가 지옥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라 가로세로 열두 걸음 정도의 길이가 되는 크기의 방에 한꺼번에 100명 정도, 최소한 8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말이다.
…… 시야를 덮는 증기, 그을음, 먼지, 그리고 어느 곳에도 발 디딜 틈 없는 비좁음. (…) 바닥에는 손바닥만 한 틈바구니도 없었다. 죄수들은 자기의 물통에서 물을 끼얹으며, 앉지도 못한 채 갈고리처럼 등을 구부리고 있었다. (…) 증기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이미 열기 정도가 아니라, 마치 지옥의 불과 같았다. 바닥을 질질 끄는 100개의 쇠사슬 소리에 맞추어, 이 모든 것들이 소리를 지르고 법석을 떠는 것 같았다. (…) 지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쇠사슬에 얽히기도 하고 밑에 앉아 있는 사람의 머리에 부딪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욕을 해대고 부딪친 사람을 자기 뒤로 잡아당기기도 했다. 더러운 물이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죄수들은 모두 술에 취한 듯, 어떤 정신적인 흥분 상태에 있었다. 비명과 고함 소리도 울리곤 했다. 물이 들어오는 탈의장 옆 창문에는 욕설과 비좁음과 난투가 벌어졌다.
…… 붉게 달아오른 등허리에는 언젠가 맞은 몽둥이와 채찍의 상처가 선명하게 나 있어서, 지금 이 등허리들은 또다시 상처를 입고 온 것처럼 보였다. 무서운 상처들이었다. 그것들을 보자 내 피에는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 증기의 구름 속에서 매 맞은 등허리와, 빡빡 깎은 머리, 불린 팔과 다리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죽음의 집의 기록』, 열린책들, 197~199쪽)
목욕에 앞서 족쇄 받침(생살에 쇠가 닿지 않도록 족쇄에 붙이는 가죽으로 된 띠)을 벗고 족쇄와 다리 사이에 생긴 손가락 하나 정도의 공간 사이로 속옷을 벗고 입는 일은 ‘하나의 예술’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속옷은 물론이고, 양발에 족쇄를 찬 채 바지를 벗고 입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차르 시대보다 더 가혹했던 스탈린 시대
후일 소련 문단에 이름을 떨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1962), 『수용소군도』(1973) 등도 유형지의 모습을 담은 소설 형식의 논픽션이다. 19세기 중엽 도스토옙스키가 수형 생활을 했던 수용소나, 극작가 체호프가 그 40년 후인 1890년 시베리아를 마차로 횡단해 동쪽 끝 사할린 섬에서 본 수용소와 유형수들의 모습이나, 솔제니친이 20세기 중엽 경험한 수용소나 한 세기의 시간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삭막하고 살벌하며 열악한 환경은 거의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소련 시대에 들어와 달라진 것이라면 성서조차도 갖지 못하게 한 것 정도 같다. 차르 시대에는 성서를 읽을 수 있었으나 소련 시대에는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하고 탄압했으므로 수용소에서 성서를 읽을 수 없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는 25년 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들어온 한 침례교 유형수가 막사에 성서를 숨겨두고 읽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소련 시절 일부 수용소에서는 어느 정도의 독서는 허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솔제니친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복역했다. 그는 포병 장교였는데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스탈린에 대한 ‘불손한 묘사’를 썼다는 이유로 8년의 유형살이를 한 것이다. 출옥 후에도 3년간 더 유배 생활을 했다. 차르 체제를 옹호한 고골을 비판한 벨린스키의 편지를 읽었다는 이유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와 무엇이 다른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인민을 위한다며 혁명을 했지만, 혁명 후 권력을 잡은 자들이 한 짓은 과거의 권력자인 세습 군주들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솔제니친은 『수용소군도』 등에서 스탈린 시대에 구소련에서 정치범들에게 가한 탄압은 차르 시대와 똑같거나 오히려 더 가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소련의 반체제 작가인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등의 출판이 가능했던 것은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 시대가 온 후 스탈린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폭로한 수용소의 현실과 부조리는 바로 스탈린 시대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책에 나오는 수용소는 솔제니친이 오랜 형기를 보낸 카자흐스탄 북부에 있는 카라간다의 수용소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리워한 자유의 초원
도스토옙스키는 4년간의 유형 생활 중 때때로 수용소 인근 이르티시 강변에 있는 벽돌광장에서 노역을 했다. 그는 이곳에 가기를 좋아했다. 사방이 막히지 않은 탁 트인 넓은 교외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일하면서 체력도 좋아졌다. 처음에는 등에 8개의 벽돌밖에 지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12개까지 질 수 있었다. 그는 체력이 좋아진 것을 기뻐했다. “나는 출옥 후에도 오래 살고 싶었다”고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술회했다.
“내가 단지 몸이 단련된다는 이유만으로 벽돌 나르는 일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 내가 이 강변에 대해 그토록 자주 말을 꺼내는 이유는 그 강변에서만이 신의 세계가, 순결하고 투명한 저 먼 곳이, 황량함으로 내게 신비스러운 인상을 불러일으켰던 인적 없는 자유의 초원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 죄수들이 감옥의 창을 통해 자유세계를 동경하듯이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광야를 바라보곤 하였다. 무한히 펼쳐진 푸른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 키르기스 강변에서 퍼져 오는 키르기스인의 아련한 노랫소리.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더할 수 없이 소중했다. 검게 그을고 낡은 유목민의 천막이 보이기도 했다. 천막 근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두 마리의 양을 데리고 뭔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 키르기스의 여인도 보인다. 그 정경들은 궁핍하고 투박하긴 해도 자유스러워 보였다. (『죽음의 집의 기록』, 355~356쪽)
도스토옙스키가 이르티시 강변에서 본 자유의 초원은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간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른 아침 6시경, 라스콜리니코프는 강변으로 작업을 나갔다. (…) 잠시 쉬는 동안 라스콜리니코프는 오두막에서 나와 움막 옆에 쌓아 놓은 통나무에 걸터앉아 황량한 넓은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는 광막하고 끝없는 광야가 햇빛을 담뿍 받은 채 펼쳐져 있었고, 유목민의 천막이 보일락 말락 한 검은 점이 되어 흩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완전한 자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과는 전혀 종류가 다른 별개의 민족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시간 그 자체가 정지하여 아브라함과 그 양떼들의 시대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듯했다.” (『죄와 벌』, 동서문화사, 623쪽)
도스토옙스키는 수형 생활 첫해에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유형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강변의 새들도 보이고, 돌 틈새에 핀 가녀린 꽃들도 눈에 들어왔다. 시베리아의 봄이라면 대개 6월경을 말하지만, 이때부터 한여름 동안 드넓은 시베리아의 벌판 위에는 각종 야생화의 축제가 펼쳐진다. 이 광경을 보면서 마음이 들뜨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족쇄 채워진 유형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유목민의 천막 근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식사를 준비하는 연기가 아닐까. 거칠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식사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광경을 상상하며 자유를 꿈꾸었을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이 그려진다.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19세기 러시아 의사
요즘 러시아에서 의사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살던 19세기에는 의사에 대한 민중의 인식이 비교적 좋았던 것 같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그는 의사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기술해놓고 있다. ‘민중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라며 수시로 의사를 칭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가 의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몸이 약했던 탓에 유형 생활 중 여러 차례 병원 신세를 졌다. 의사들을 자주 접촉하고 관찰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의사들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19세기 중반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만난 벽지의 의사들이다. 의사들로부터 늘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지 않았다면 섬세하고 까칠한 성격의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글에서 그렇게 의사들에 대해 칭찬 일변도의 찬사를 늘어놓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지난 시베리아 수용소 시절 좋지 않게 보았던 폴란드인 정치범 유형수에 대해 후에 쓴 『죄와 벌』 뒷부분에 콕 집어 한마디 비판을 써놓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많은 의사들이 민중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으며, 내가 알기로는 이는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 대부분의 의사들은 민중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적어도 내가 이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여러 지방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바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며, 다른 장소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를 담당하는 의사는 대개 모든 환자들 앞에 멈춰 서서, 개개인을 주의 깊게 진찰하고 상태를 물어보기도 하면서 약 처방이나 음식을 지시했다. (…) 주임 의사 역시 박애심 많고 청렴한 의사였다. 이 사람도 환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죽음의 집의 기록』, 288~291)
‘러시아 의사’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본 의사 지바고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설보다는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파스테르나크 원작의 『닥터 지바고』. 부인을 두고도 남의 여자인 라라에게 마음을 빼앗기지만 의사로서의 그의 모습은 내내 매우 진지하고 성실하다. 『닥터 지바고』의 주요 시대적 배경은 러시아 혁명과 내전기인 1910년대이다.
정치범들, 데카브리스트들이 남긴 좋은 인상 덕에 관대한 대접 받아
앞서 <우먼센스>의 ‘시베리아 브리핑 시리즈’ 등에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던 19세기 초반 제정 러시아의 귀족 혁명가 데카브리스트들이 유형지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아 주민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들이 좋은 인상을 남긴 덕에 후에 시베리아로 온 정치범들은 간수들이나 현지 주민들로부터 비교적 관대한 대접을 받았는데 그것은 도스토옙스키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시베리아의 최고 사령관이 귀족 유형수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대하며, 심지어 평민 출신의 다른 죄수들과 비교해볼 때 매사에 그들을 관대히 대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분명했다. 첫째로, 최고 당국자들도 역시 귀족들이었다. 둘째는 이전에 귀족 출신 유형수들이 매질을 거부하고 집행자들에게 달려들어 이것으로 인해 끔찍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가장 주된 요인인 듯한 세 번째 이유는, 약 35년 전쯤 갑자기 귀족 유형수의 거대한 무리가 시베리아에 나타났으며, 이 유형수들은 30년 동안 시베리아 전역에서 바르게 행동하여 재평가되었기 때문에, 당국은 이미 오래된 관습과는 무관하게 일반 죄수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귀족 범죄자들을 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 419쪽)
여기에서 ‘35년 전쯤 갑자기 나타난 유형수의 무리’가 바로 데카브리스트들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살던 시대는 아직도 차르가 지배하던 시대다. 니콜라이 1세 차르 체제를 전복하려 했던 국사범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감옥 생활의 마지막 무렵에는 상황이 많이 변했다. 그동안에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쓸 수 없었고, 성서 외에는 책도 읽을 수 없었으나 출옥 전 얼마간은 그런 것들이 가능했다. 오랫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처음 대했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그 이상스럽고 동시에 마음 설레게 했던 느낌을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라고 했다. 마침내 4년간의 유형 생활을 마감하는 겨울이 왔다.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출옥을 기다리던 심정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족쇄가 떨어졌다. 자유가 부활되는 순간…
“나는 겨울에 감옥에 들어갔으므로, 겨울에 들어온 것과 같은 날에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 (…) 마침내 오래도록 기다리던 그 겨울이 온 것이다! 이따금 나의 가슴은 자유에 대한 커다란 예감 때문에 깊고 강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말을 하는 김에 여기서 잠깐 지적하자면, 공상과 오랜 얽매임의 결과 때문에 감옥에 있는 우리들에게 자유는 현실의 자유, 즉 실제로 현실에서 누리는 자유보다도 왠지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 죄수들은 현실적인 자유의 개념을 과장하였지만, 이것은 모든 죄수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본질적인 것이었다. 어떤 다 헐어빠진 옷을 입은 병사라도 죄수들에 비하면 우리에게는 거의 왕처럼 자유로운 인간처럼 보이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머리도 깎이지 않고 족쇄도 감시병도 없이 다니기 때문이었다.” (『죽음의 집의 기록』, 453~454쪽)
도스토옙스키는 마침내 4년 형기를 채우고 감옥을 나왔다. 감옥에서 나온 후 그는 족쇄를 풀기 위해 곧장 대장장이에게 가야 했다. 대장장이는 그를 돌려 세우더니, 뒤에서 그의 발을 들어 올리고는 족쇄를 부쉈다.
“족쇄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내 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 그렇다.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자유, 새로운 생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죽음의 집의 기록』, 457쪽)
첫 부인을 7년 만에 잃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에게 주어진 자유는 제한된 것이었다. 또다시 4년간의 강제 군 복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1854년 2월 중순 출옥하여 3월 2일 시베리아의 세미팔라틴스크에 있는 제7대대에 사병으로 배치된다.
군에서 복무 중 1857년 간질 증세로 인해 군 복무를 계속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1859년 3월까지 복무하다 38세 때인 1859년 3월 장교대우 하사관으로 제대했다. 당초 사형장에서 4년 유형에 4년 시베리아 군 복무로 감형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5년 3개월간 군 생활을 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책을 읽는다. 그의 고질병이 된 간질은 정치범으로 체포된 후 감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세미팔라틴스크에서 군 복무를 시작하면서 알게 된 여인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가 남편의 죽음으로 미망인이 되자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녀가 청혼을 받아들인 후 그는 휴가를 얻어 1857년 2월 쿠즈네츠크에서 결혼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첫 결혼이다. 그러나 마리야는 병약했다.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7년 후인 1864년 4월, 병세가 악화되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말썽꾸러기 아들 파벨을 도스토옙스키에게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해 7월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믿고 의지했던 형 미하일도 죽었다.
▶ <우먼센스>에서는 바이칼BK투어(주)와 함께 오는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러시아 문호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러시아 문학 기행’을 실시한다.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관련 내용은 우먼센스 2017.07 p.9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