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 없다면 ‘기적’이라는 말도 없을 것이다. 도윤군의 탄생은 정주리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스물두 살에 만나 9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을 약속한 그날, 마치 결혼 축하 선물처럼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아들 덕분에 180도 바뀐 삶조차도 아름답다.
자기를 중심으로 돌던 세상이 아들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고, 스케줄에 치여 바쁘지만 무료했던 일상이 환한 빛과 따뜻한 온기로 채워졌다. 기적이라는 말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지난 2년은 신기함의 연속이에요. 아이를 열 달 동안 배 속에 품고, 낳고, 키우고….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이 매일 펼쳐지고 있죠. 아들을 보고 있으면 마냥 좋아요. 이게 무슨 감정인지 설명할 길이 없지만, 대체 뭐가 이런 행복감을 주는지 알 수 없지만, 행복해요.”
정주리는 지난해 12월, 아들 도윤이를 30시간 진통 끝에 수중분만으로 낳았다. 병원에서의 출산이 더 안전하다는 인식 때문에 대부분 산모들이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자연주의 출산. 그녀가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이를 악물고 견딘 건 아들과의 첫 만남을 남편과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타박했지만 자신 있었어요. 저희 엄마도 저를 할머니 댁에서 낳았기 때문에 자연주의 출산이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요. 수중분만으로 아이를 낳자마자 젖을 물렸는데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선배 개그우먼 김효진의 격려 덕분에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모두가 “힘들지 않겠느냐”고 할 때 “훌륭한 결심했다”며 응원해준 단 한 사람이 김효진이었다.두 사람은 개그우먼 선후배로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요즘엔 육아 메이트다.
“‘어쩜 그렇게 예쁜 생각을 했느냐’며 ‘정말 잘했다’고 칭찬받았어요. 무엇보다 남편과 같이 출산 방법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과정이 좋았어요. 남편과 함께 자연주의 출산 교육장에 가면 남편들이 다 울어요. 출산의 기쁨과 감동이 밀려오나 봐요. 출산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성애, 모성애가 생긴 것 같아 좋아요.”
정주리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출산 당시 남편과 함께 울었던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남편은 아파하는 저를 보고 제가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대요. 엉엉 울더라고요. 남편과 손을 꼭 잡고 이별을 준비했어요.(웃음) 아내가 개그우먼 아니랄까 봐 시트콤을 찍었죠.”
부부의 금슬은 더 좋아졌다.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동 출산을 하니 육아 역시 자연스럽게 공동으로 하게 됐다. 남편이 출근하는 날은 아내가, 아내가 스케줄이 있는 날은 남편이 하는 식이다. 두 사람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리끼리 해보자’는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당황했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처음이니까요. 젖은 어떻게 물려야 하는지, 젖병은 어떻게 소독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맘이었죠. 남편이 적극 도와준 덕분에 수월했어요. 요즘엔 제가 방송 스케줄이 있을 땐 남편이 집안일을 다 하죠. 오히려 저보다 더 잘해요.(웃음) 착한 남편을 닮아서 아들도 착한가 봐요.”
“평소 몇 번을 깨워도 안 일어나던 남편이 아기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하며 정주리가 휴대폰을 꺼내 든다. 쌔근쌔근 잠든 아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팔불출이면 어떠랴. 내 아들, 내 남편이 자랑스러운 건 당연지사인걸. 정주리는 지금 누가 뭐래도 행복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
“다 좋아요. 힘들어도 좋고, 슬퍼도 좋고, 짜증나도 좋아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을 요즘 한꺼번에 느끼고 있어요. 남편과 싸우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저희 앞에서 놀고 있는 아들을 보면 저절로 화가 풀려요. ‘도윤아~’ 하고 부르는 저와 남편의 목소리가 늘 하이 톤이에요. 집 안에 생기가 가득하고 분위기는 따뜻해지죠. 도윤이를 안고 나가면 그 어떤 명품 백을 들고 있을 때보다 더 큰 자신감이 생겨요.”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다. 정주리는 어쩔 수 없이 부모 인생의 영향을 받으며 살게 될 아들에게 최고의 유산을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훌륭한 인격과 착한 성품. 그러기 위해선 자신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훌륭한 인성의 남자로 키우고 싶어요. 그러려면 저와 남편이 착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치원부터 과외까지, 교육열이 장난 아닌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 저만의 방식으로 아들을 키우고 싶어요. 착하고 반듯하게요.”
그녀만의 육아 철학은 놀아주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집에는 흔한 장난감 하나 없다. 대신 스케줄이 없는 개그맨 동료들을 집으로 불러 모은다. 도윤이는 웃긴 삼촌, 재미있는 이모들과 놀면서 사회성을 키우고 있다.
“개그맨 삼촌들이 몸으로 놀아줘요. 하늘로 던졌다가 발로 들었다가 난리가 나죠. 어떤 땐 너무 과격해서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좋아요. 그래서인지 아이가 낯도 안 가리고 잘 웃어요. 덕분에 어디서든 사랑받고 있고요.”
어깨를 들썩이며 아들과 남편 자랑에 여념이 없지만 힘든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뒤태 미녀’라는 타이틀은 없어질 것이고, 트레이드마크였던 ‘들이대는 캐릭터’는 영영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고민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개그우먼이라서 나를 내려놓아야 하는 부분이 많잖아요. 언제 어디에서든 사람들을 웃길 수 있어야 하고요. 그런데 아이를 낳은 뒤 그런 제 감정 리듬이 살짝 다운되더라고요.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고 해야 할까요.”
미처 준비할 시간도 없이 한순간에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아 혼란스럽던 시기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갑자기 어른 대우를 해주더라고요. ‘아이 엄마니까 안 돼’ ‘도윤이 엄마니까 이렇게 해야 해’ 하는 가르침들이 있었어요. 아이를 낳았지만 나는 여전히 정주리인데 사람들이 갑자기 어른으로 대우해주니까 혼란스러웠죠.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고요.”
사람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그래서 놀기 좋아했었다. 누가 뭐래도 당당한 자신감이 예뻤던 그녀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 하나를 꼽으라면 다이어트예요.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어요. 출산하면서 몸매가 많이 망가졌죠. 모유 수유를 하면서 가슴도 많이 작아졌고요. 요즘엔 살을 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요. 처녀 때보다 더 몸매 좋은 아줌마가 되고 싶달까요? 무조건 다이어트가 절실해요.”
자유롭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여자니까. 그렇다고 다시 처녀 시절로 돌아갈 마음은 추호도 없다. 더 큰 행복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그녀를 전적으로 믿고 지지해주는 남편이 있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당황스러움에 펑펑 우는 그녀를 앞에 두고 남편은 배꼽 빠지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깊은 속내가 있었다.
“작년 3월, 그러니까 결혼 전에 처음 임신을 확인했을 때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어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당혹스럽더라고요. 그런 저를 보고 깔깔거리며 웃던 남편이 ‘잘 키우면 되지~’라고 한마디 해주었는데, 그 말에 모든 걱정과 시름이 달아났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남편도 적잖이 철렁했대요. 걱정하며 우는 저를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던 거죠.”
정주리의 남편은 그녀의 성장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응원한 사람이다. 2005년, 정확히 11년 전 3백23만원짜리 원룸에서 시작해 점점 방 사이즈를 늘려가는 그녀를 보며 기꺼이 박수 쳐준 유일한 남자다.
“철없을 때 만나 별일을 다 겪었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는 말을 남편를 보면서 공감해요. 제 좁은 원룸에 놀러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결혼해서 아이 낳고 가정을 꾸렸네요. 저희도 서로 신기해해요.(웃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죠. 제 인성을 만든 사람이기도 해요.”
그렇게 꾸린 그녀의 가정은 꽤나 단단해 보였다. 20대 청춘을 서로에게 바친 부부는 어떤 위기가 와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의 기저에는 의리가 있었다.
“사랑보다 더 큰 의리가 있어요.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그래서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아요. 20대를 함께 보내며 함께 성장한 사람인데 어떻게 배신하겠어요. 물론 위기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슬기롭게 헤쳐 나갔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함께 웃고, 함께 울었던 시간들이 결실을 맺어 도윤이가 탄생했다. 정주리는 아빠를 닮은 두 번째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둘째를 낳으면 물론 활동과는 멀어지겠죠.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복귀를 살짝 미뤘어요. 소속사 사장님도 동의해주셨고요.”
개그우먼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주리는 돈이나 인기보다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남편을 내조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일을 쉬어서 불안한 것도 있지만 미친 듯이 일해야겠다는 생각도 사실은 아니에요. 저도 아직은 아기와 떨어져 있는 연습이 되지 않았거든요. 최근 3박 4일 부산으로 출장을 다녀왔는데 집을 나서면서 울고 있는 저를 보고 알았어요. ‘아, 나는 아들 곁에 있어야 하는구나.’ 제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어요. 아들과 떨어질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카메라 앞에 설 거예요.”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복귀를 서두르진 않지만 언젠가 자신을 찾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올까 봐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유부녀라서, 아이 엄마라서 개그 소재에 한계도 있겠죠.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지 고민이 많지만 순리에 맡기려고요.”
일도 가정도, 육아도 완벽하게 해내려는 그 욕심이 예쁘다. 그녀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속전속결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정신없이 지난 2년을 보냈어요.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요? 지금 당장이라도 연습실에서 동료들과 개그를 짜야 할 것 같지만 당분간은 가정에 올인하려고 해요.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는 게 유능한 개그우먼이 되는 것보다 중요하니까요.”
어떤 엄마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우리 엄마 같은 엄마요! ”
“우리 엄마는 새벽 2시까지 스케줄대로 하시고도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빠 밥을 차려주는 분이에요. 알고 보니 그건 희생이었어요. 엄마가 되고 보니 엄마처럼 현모양처가 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단언컨대 정주리에게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