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안 되면 유학 vs 공부만이 살길
이런 유머,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다. 상황은 이렇다. 아이가 수학 숙제 하다가 모르는 문제가 나온다.
서초맘 : 이따 아빠 오시면 물어보자.(법조인이 많이 산다.)
압구정맘 : 괜찮아, 유학 가면 돼.
대치동맘 : 엄마가 학원 가서 배워올 게.
동네별 강남맘들의 성향을 우스꽝스럽게 풀어놨는데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거 아는가? 요즘은 강남 속의 강남을 분류한 또 다른 기준이 있다. 강남역사거리에서 삼성역까지 이어지는 4km의 테헤란로를 기준으로 북쪽은 ‘테북’, 남쪽은 ‘테남’으로 나누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다들 체감하는 내용일 텐데 굳이 또 가르자면 그렇다는 거다.
압구정동·청담동·신사동이 포함된 테북에는 대를 잇는 부자가 많이 살고,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이 즐비한 테남에는 대치동·역삼동·도곡동·개포동 등이 포함돼 있다. 애들이 어느 정도 커 학교에 다니다 보니, 왜 이 분류가 뜬금없는 헛소리가 아닌지 더 잘 알 것 같다.
필자는 아이들이 영어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한 엄마가 몇 있다. 한 명은 잠원동에 살다 최근 대치동으로 이사했고, 또 한 명은 서초동 터줏대감으로 반포에 오래 살고 있다. 또 한 명은 가정부만 둘 둔 청담동 사모님으로 삼성동에도 집이 몇 채 있는 준재벌가 따님이다. 다들 시간이 맞아 커피라도 마시는 날에는 대화 속에 동네별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포동 엄마 : “아들 다니는 수학 학원에서 경시대회 준비한다고 일요일에 특강을 하자는 거야. 그래서 다들, 일요일은 애들도 쉬자고 했지. 그랬더니 강사가 대치동 엄마들은 일요일에도 수업하자고 하면 더 좋아한다는 거야. 공부에 대한 열의가 다르다나?”
대치동 엄마 : “그렇지. 이제 경시대회 상이 다 필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자소서 쓰거나 아이들 캠프 신청할 때 유용해. 중간·기말 고사 기간엔 더하지 뭐. 나는 애들 시험 기간에 우리 아파트를 보면 단체 기숙사 같아. 엄마들은 덩달아 잔뜩 예민해 있고 밤새도록 불 꺼진 집을 찾아볼 수가 없어.”
청담동 엄마 : “알파고와 싸워야 하는 시대야. 나는 우리 애들 학교가 과연 미래형 인재를 키우고 있는지 의심스러워. 난 우리 딸 영어만 계속 시키다가 내신이 영 안 나오면 중학교 때 유학 보내려고, 친척들 통해 알아보고 있어. 영어뿐 아니라 아이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위해서도 유학은 필수라고 생각해.”
자식 공부에 대한 관심은 다들 매한가지지만 동네마다 온도 차이는 분명히 보인다.
그래도 대치동, 안 입고 안 먹고 자식 교육에 올인
강남에서 교육열 높은 곳을 꼽으라면 다들 대치동을 얘기한다. 소위 ‘학종(학생부종합전형) 시대’로 바뀌어 사교육이 한풀 꺾였다곤 하지만, 생활기록부가 ‘전가의 보도’로 등장하면서 자소서와 소논문을 컨설팅해주는 대치동 고액 학원은 자리가 없어 못 다닌다.
강남구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강남 지역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1백30만원가량이고 그중에서도 대치2동이 가장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말이 좋아 1백30만원이지, 영어 유치원에 수학, 예체능 몇 가지 하면 매달 4백20만원이 꼬박꼬박 나가는 집이 허다하다.
‘테북’도 아니고 ‘테남’의 대치동이 사교육비를 가장 많이 지출한다니, 숨은 알부자라도 많은 걸까?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교육에 ‘올인’하는 ‘대전족(대치동 전세살이)’이 많아서라고. 어찌 보면 대치동은 강남 안에선 부촌이라기보다는 중산층에 가깝다. 고등학교 1~2년만 바짝 대치동에 전세나 반전세로 거주하다 본고장으로 컴백하는 집도 많고, 자식 학원비엔 고액을 쏟아붓지만 자신을 위한 옷 한 벌 안 사 입고 콩나물 한 봉지에도 벌벌 떠는 독한 아줌마도 수두룩하다.
대치동 엄마 : “청담동 엄마들은 애가 공부하기 싫다고 하면 ‘저 건물이 다 네 것인데 무슨 걱정이니?’ 한다더라. 국제학교도 보내고 싶지만 애 둘 대학 졸업까지 시키려면 한 애당 10억 이상이 드는 거야. 돈도 없지만 차라리 그 돈 있으면 나중에 그냥 돈으로 주는 게 낫지 싶어. 강남 성골이 아니니까 공부라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 집들도 낡아 녹물 나오고 바퀴벌레 돌아다니는 데도 있지만 다들 애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하면서 참는 분위기야. 어떻게 들어온 대치동인데 하면서 말이야.”
지금 대치동엔 1970~80년대에 처음 아파트를 짓기 시작할 때 분양받아 입주한 일명 ‘원주민족’과 그곳에서 쭉 자라 유학을 갔다가 결혼 후 부모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다시 입성한 ‘연어족’, 그리고 대치동 전세살이 ‘대전족’, 이 세 부류가 어우러져 입시를 향한 저마다의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다.
대치동 엄마 : “결혼정보 업체쪽에서 들은 말인데, 요즘 남자쪽 부모들이 가장 꺼려하는 며느리 조건이 대치동에서 자라 외고 간 딸이라고 하더라. 그만큼 대치동 사람은 부모도 아이도 기가 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집값이라도 싸면 그러려니 할 텐데 과일·야채값도 1.5배 비싸고 학원 빼고는 삭막한 이곳에 대체 왜 왔는지 하루에도 열두 번 생각하게 돼. 고민하다가도 집 앞이 바로 학원이라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 없이 열심히 책을 파고드는 아이들을 보면 그래도 여기가 답이라는 결론에 닿아.”
예전부터 대치동 선경아파트에서 관직 높은 거 자랑 말고, 우성아파트에서 학벌 자랑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 주민들의 학력은 경제력보다 높은 편이다. 똑똑한 부모들은 자식에게 똑똑한 유전자를 물려주고, 해마다 바뀌는 입시 정책 속에서 똑똑한 비서실장 노릇을 하고 있다. 대치동은 대치동만의 대치동스러운 냄새가 있다.
이제는 서초동, 대치동 학원들 다 와 있고 살기도 좋아
대치동만큼 공부, 공부, 하지 않지만 비슷한 동네가 서초구 잠원동이다. 압구정맘이 미국식 아침 식사를 먹여 아이를 학교 보낸 뒤 골프 연습장에 가서 하교 시간에 맞춰 도우미에게 전화해 간식을 챙겨달라고 말한다면, 잠원동맘은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 먹여 학교에 보낸 후 고속터미널 상가에서 아이 쇼핑을 하고 떡볶이를 포장해 와 먹는다.
압구정과 반포 사이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강남 안에서 다른 동네와는 분위기가 다른 편인데, 낡은 아파트에 작은 평수도 비교적 많다. 잠원동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김씨는 “이 동네는 아직도 이웃 간의 정이 남아 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음식을 해 먹기도 하고 주민들도 가족처럼 친하다. 최근 신축 아파트가 들어 서기 전까지는 더 그랬는데 요즘은 아이들끼리도 학교에서 아파트 사냐, 빌라 사냐로 말이 돈다고 들었다”며 “한강하고 가깝고 아웃렛 백화점이 지척인 잠원동은 살기 좋은 동네인 건 분명하다”고 말한다.
잠원동 옆인 반포동은 대치동의 교육열에 대적할 만한 가장 강력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대치동에서 넘어온 잘나가는 학원이 그대로 분점을 내 자리해 있고, 잘나가는 영어 유치원도 죄다 반포 학원가에 있다. 되레 이제 대치보단 반포라는 말이 돌 정도로 가족 전체를 만족시킬 만한 균형 잡힌 환경이 잘 갖춰져 있다.반포동에서 3대째 살고 있는 권씨는 “도곡동에도 살아보고 대치동에도 있어 봤는데, 대한민국에서 여기만 한 교통의 요지가 없다.
시내로 통하는 길이 사방팔방 연결돼 있고 병원, 마트, 공원, 학원 어느 하나 부족한 점이 없다. 교육 때문에 다들 전학 가던 것도 이제 많이 줄었다고 들었다. 왜 잘나가는 연예인들이 이쪽에 많이 몰려 사는지 이해가 된다”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 학교가 위치한 반포동 서래마을은 이국적인 분위기 탓인지 몇 년 전부터 연예인 신혼부부들이 앞다퉈 이사 와 살고 있고, 학군도 나쁘지 않아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선호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또 법원이 코앞에 위치한 만큼 법조인 가족이 많이 거주하는 것도 사실. 반포동 아이들이 학교에서 싸우면 변호사·검사·판사 아빠가 총출동돼 모의재판이 꾸려진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반포 사는 사람들은 동네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 아이들 입시와 상관없이 그냥 쭉 눌러앉아 대를 이어 사는 경우가 많다.
대세는 삼성동, 클래스가 다른 가진 자들의 여유
테북 대표 삼성동과 청담동은 ‘강남 성골’들이 득세하는 곳이다. 대치동 학원가와도 가깝지만 그곳과는 확연히 다른 가진 자들의 여유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 삼성동은 부자 중의 부자들이 살던 곳으로 풍수지리에서도 대한민국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다. 최근엔 영동대로 일대 지하 공간을 7층 규모의 복합환승센터로 조성하겠다는 정부 발표가 나면서 다시 한 번 땅값이 들썩이고 있다. 이미 잠정적 투자 가치를 높게 산 톱스타들이 부지런히 땅을 매입 중이다.
청담동과 압구정동도 비슷하긴 마찬가지. 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대를 잇는 재력가가 많은 이곳은 특히 의사가 많이 사는데, 대부분 자녀들이 가업을 이어가기를 원한다. 경기고 학군이다 보니, 딸보다는 아들을 둔 부모들이 더 선호하는 지역으로 다른 동네보다 고급 명품으로 치장하고 최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엄마들을 쉽사리 볼 수 있다. 코엑스 옆 현대백화점 VVIP들의 연간 지출액을 보면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보니, 자식 교육에서도 타 지역 엄마들보다 경우의 수를 넓게 둘 수 있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해 국제학교나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경우가 태반이고, 학원보다는 개인 과외를 붙여 맞춤형 교육을 추구하는 편이다. 공부 못해도 먹고살 걱정은 없으니, 학교 수업보다는 예체능 등 교양 과목을 일찌감치 몸에 익히는 경우도 있다. 증여세를 줄여 어떻게 하면 자식에게 재산을 효율적으로 물려줄 수 있는지도 고민거리다.
삼성동 아줌마 : “시댁에서 나눠준 집에 살아야 해서 이 동네를 못 벗어나는 아줌마도 여럿 봤어. 대치동 학원도 코앞이라 맘만 먹으면 다닐 수 있고, 무엇보다 도심이지만 번잡하지 않아 좋아. 아침에 새소리를 듣고 일어날 때가 많아.”
테헤란로를 기준으로 나뉘는 동네별 특징을 대략 언급해봤는데 객관적 수치가 부족한 판단이므로 다소 주관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동네별 강남맘들 모두 아이와 함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 학원을 보내든, 유학을 보내든 지금 강남맘들은 누구보다 뜨겁다. 과열된 욕망인지, 지극한 정성인지는 두고 봐야 알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