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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수의 와인 잔에 기자의 잔을 부딪쳤다. 적당히 흥이 오를 무렵 비로소 그녀는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On July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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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김혜수는 여배우의 ‘모범 답안’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대중의 관심을 벗어난 적 없는 스타에서 이제는 인정받는 배우가 됐으니까. 때로 슬럼프에 휘청거리기도 하고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은 적도 있지만, 결국 모두 극복하고 뚜벅뚜벅 걸어온 여자. 아름답지만 나약하지 않고 현명하지만 거만하지 않은 여배우라니, 그야말로 ‘사기 캐릭터’ 아닌가.

늦은 저녁, 와인이 놓인 테이블에 김혜수와 마주 앉았다.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짧았다. 2016년 상반기 화제의 드라마 <시그널>에서 김혜수는 여형사를 표현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민낯에 가까운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났다. 중년의 형사 팀장인 현재와 과거의 젊은 시절을 동시에 연기하며 폭넓은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얼마 전 제5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시그널>로 TV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이)성민 선배가 제게 상을 주시면서 먼저 팔을 벌리며 안아주시더라고요. 그분이 그런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거든요. 수줍음이 많은 분이라 제가 포옹하면 불편해하실까 봐 참고 있었는데 말예요.(웃음) 참 따뜻한 분이죠? <시그널>은 워낙 애정을 갖고 촬영했던 작품이라 사실 제가 받은 상보다도 드라마가 받은 작품상과 극본상이 더 기쁘게 다가왔어요.”

숨 가쁘게 달렸던 김혜수는 최근 코미디 영화 <굿바이 싱글>로 다시 대중 앞에 섰다. 이번에는 ‘여배우’ 역할이다. 보통 배우들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기피하는 바로 그 역할. 김혜수도 처음에는 그랬다.

“배우들이 왜 그렇게 배우 역할을 연기하기 부담스러워하느냐고요? 글쎄요. 어쩌면 배역을 통해 아직 대중 앞에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내면을 자칫 들키지 않을까 싶어 걱정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번 영화는 시나리오가 좋았고 캐릭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죠. 그래서 승낙했어요.”

촬영장이 낯설기만 했던 10대 여배우는 어느새 영화 촬영 현장의 분위기를 리드하는 ‘왕언니 배우’가 됐다. 김혜수는 어렸을 때부터 뭐든 빨리 배우고 싶은 마음에 초등학교 때 학원을 6곳 다녔고, 유니폼을 입고 거수경례를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태권도에 입문할 만큼 당찬 소녀였다.

그런 성격은 연기에도 반영됐다. 고3 시절 자신이 맡은 배역을 실감나게 연기하기 위해 감독에게 상대 배우가 자신을 사정없이 때리도록 해달라고 부탁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연기에 대한 열정만으로 10대 때부터 성인 배우들과 동등하게 합을 맞춰온 그녀는, 영화를 위해 오디션을 보러 온 후배 여배우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저와 호흡을 맞출 16세 여중생 ‘단지’ 역을 맡을 배우를 선발할 때 저도 참여했거든요. 오디션 참가자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은 하지 않았어요. 그냥 ‘언니 있니?’ ‘요즘은 어떤 음식이 제일 맛있니?’ ‘요즘 제일 열중하는 대상은 뭐야?’ 뭐 이런 가벼운 질문을 던졌죠. 나중에 감독님한테 조용히 말했어요. ‘만일 내가 지금 배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절대 못 했을 거야’라고요.(웃음) 어쩜 다들 그렇게 잘해요?”

그렇게 선발된 아역 배우 김현수와 합을 맞추며 김혜수는 간만에 상쾌함을 느꼈다고 했다. 베테랑 배우들은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 필요한 때 적당한 만큼 감정을 표출하고 빠르게 다음 장면을 준비한다. 하지만 아직 어린 배우는 서툴지만 온 마음으로 그 장면에 녹아든다. 10만큼만 보여주면 되는데 100의 에너지를 쓰는 모습을 보며 김혜수는 자신의 연기를 돌아보게 됐다.

“사실 꽤 오랜 기간 많은 분이 제게 ‘김혜수는 어떤 배역을 맡아도 김혜수가 보인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그게 100% 나쁜 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겠지만 저에게는 꽤 뿌리 깊은 콤플렉스였답니다. ‘왜 어떤 배역을 맡아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나란 사람이 보이는 걸까?’라는 고민을 하며 괴로워했던 거죠. 물론 지금은 ‘흐르듯 가자’라는 마음을 갖게 됐지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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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왔지만 가슴 한편에는 영화라는 장르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방송을 통해서도 어린 시절 데뷔하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종종 이야기한 바 있다. 한때 끝없는 슬럼프를 겼었지만 그 덕분에 ‘연기는 혼자 잘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러다 김혜수의 연기력을 재조명한 터닝 포인트였던 영화 <타짜>를 만났다.

“<타짜>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최동훈 감독을 비롯해 모든 배우가 다 엄청 잘하는 분들이니까 도움 좀 받아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잘해도 정도껏 잘해야지, 이건 뭐 다들 연기의 신인 거예요. 조승우와 김윤석 선배가 내 눈 앞에서 연기하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그들이 연기하는 순간 공간을 채우는 공기 자체가 달라져요.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줘. 나만 이 영화에서 빠지면 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최동훈 감독이 던져주는 힌트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김혜수는 말했다. 그대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스스로가 연기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작품과 캐릭터에 녹아들 수 있었다.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연기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다음 작품을 촬영하며 불안함은 다시 찾아왔고, 그녀는 깨달았다. 그 초조하고 불편한 마음은 한 번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 할 굴레일 수도 있다고.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왔던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이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처음에는 <차이나타운>을 찍고 싶지 않았어요. 뒷골목 범죄 조직의 여자 보스라는 배역도 쉽지 않지만, 영화 전반에 흐르는 특유의 ‘센 느낌’ 때문에 더욱 망설였죠. 잔인하고 물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영화니까요. ‘나는 그 캐릭터 절대 못 버텨’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욕심이 나서 승낙했어요. 촬영 시작하기 3주 전쯤부터는 걱정돼 잠이 안 오더라고요. 첫날 촬영하고 돌아오는데 죽을 것 같은 거예요. ‘내가 대체 이걸 왜 한다고 했지?’라는 생각이 막 들고요. 어떤 작품을 하든 그런 불안함과 부담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전무후무한 뒷골목 여자 보스를 연기하기 위해 김혜수는 캐릭터를 낱낱이 파헤쳤다. 먼저 역할의 비주얼부터 정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기본이지만 말갛고 깨끗한 느낌이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얼굴은 피폐하고 여성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렇다고 남성성이 있는 것도 아닌 모습이어야 했다. ‘거칠게 투쟁한 끝에 살아남은 웬 생명체’를 연기하고 싶었기에 머리도 남자처럼 자르려고 했다. 당시 샴푸 모델이라 결국 자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린애들을 앵벌이 시켜 하루하루 먹고사는 뒷골목 여자 보스는 과연 뭘 입을까 계속 생각했죠. 양복은 물론 안 입겠죠. 피폐한 생활 속에 생존하려고 애쓰다 보면 폭식하다 살이 찔 테고요. 외양뿐 아니라 전체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잡을지도 계속 생각했어요. 가령 길을 가는데 어떤 여자가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고 쳐요. 그래서 ‘뭐야?’ 하고 쳐다봤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몸이 얼어붙어 도망갈 수조차 없게 만드는 여자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 여자가 ‘당장 꺼져’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그런 카리스마 말이에요. 얼굴에 아주 치명적인 상처나 점이 있었으면 했지만 그건 1차원적인 방법 같아 피부 전체를 아주 건조하게 표현했지요.”

김혜수는 작정하고 살도 찌웠다. 그냥 풍채 좋게 뚱뚱한 게 아니라 딱 봐도 고지혈증이 있을 것 같고, 혈압도 안 좋을 것 같은 그런 건강하지 않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 매번 죽기 살기로 덤벼 나쁜 짓을 해야 하니 스트레스가 클 것이고 흰머리가 빽빽이 났을 거라고 예상해 염색을 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 김혜수는 <차이나타운>의 비정한 여자 보스 ‘엄마’가 됐다. 그리고 2015년 제3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이하 영평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처음에 영평상 여우주연상을 받게 됐다고 들었을 때는 어안이 벙벙했죠. ‘뭐? 영화계의 권위 있는 상에서 나를?’ 영평상 시상식은 제게는 늘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멀리서 박수를 보내는 그런 시상식이었거든요.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조차 실감이 잘 나지 않았죠. 하지만 진심으로 너무나 기뻤답니다.”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김혜수는 달변이었다. 눈은 반짝이고 말은 다소 빠르지만 한 번도 막힘없는 온전한 문장으로, 그렇게 마음을 쏟아 이야기했다. 그녀는 여전히 연기를 더 잘하고 싶다. 그 갈망은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단다. 배우 정준호는 “김혜수는 그해 청룡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된 작품을 모두 꼼꼼하게 본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열정이 잘 나타난 일화다.

그래서 김혜수는 좋은 작품과 배우들을 발견하면 이름과 연락처를 알아보고 휴대폰에 메모해둔다고 했다. 그들의 작품을 더 찾아보면서 자극을 받고 싶어서다. 영화 <부당거래>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배우 이미도에게 먼저 다가가 “연기 잘 봤다”라고 인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스태프 포지션에서 연기 잘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관찰하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다.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했으니 어느덧 그녀의 연기 인생도 30년을 맞았다. 더 오래도록 하고 싶지만, 그건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녀도 잘 안다.
“배우는 기다리고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지요. 제가 원한다고 언제까지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해요. 그래선지 송강호 선배나 김혜자·고두심·나문희 선생님 같은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고 가슴이 뭉클해요. 지금까지 많은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그분들은 아직도 대중에게 보여줄 무언가를 많이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오랜만에 연기와 영화에 대해 수다를 떨었더니 “속이 씨이~원하다”면서 김혜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요즘에는 이런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자꾸만 실감하게 돼요”라고 말하면서 “나이가 들었나?”라며 웃었다. 김혜수는 대화하는 내내 참으로 많은 배우를 거론하며 동경의 눈빛에 질투를 얹어 아낌없이 칭찬했다.

그런 그녀에게 못다 한 말을 지면으로 전하고 싶다. ‘톱스타로 30년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다음 행보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김혜수에게만 허락된 영역’이라는 것을.

CREDIT INFO
취재
정지혜 기자
사진
영화인 제공
2016년 07월호
2016년 07월호
취재
정지혜 기자
사진
영화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