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는 지난 2년동안 준비한 앨범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날, 몇 명의 기자를 불러 모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았을 때 마침 그의 신곡이 흘러나왔다. 그는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음악에 몸을 맡겼다. 박자를 느끼며 흥얼거렸고, 때로는 눈을 감은 채 감상에 빠지기도 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4집 앨범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에 수록된 10곡은 모두 ‘사랑’을 예찬한다. 연인 간의 사랑일 수도 있고, 친구 사이의 사랑일 수도 있다. ‘밥상머리’에서 느낀 쌀밥에 대한 고마움을 사랑가로 옮겼고, 모바일체 ‘ㅋ’을 놓고 사랑을 속삭이기도 했다. 결국 세상은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난다는 지점을 장기하스럽게 불렀다. 역시 장기하식 가사는 달랐다. 트렌디하고 철학적이다.
“여자친구와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친한 친구의 연애 상담을 해주다가 제가 말을 잘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친구에게 조언하는 대로만 연애를 한다면 참 좋을 텐데 제 연애에서는 그렇지 못하죠. 남의 연애에 대해서는 객관적인데 결국 자기 사랑은 좌충우돌하게 되는, 내 연애사에는 초연하지 못한 모습을 노래로 만들었어요.”
그의 여자친구 아이유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년째 열애 중인 두 사람은 서로의 뮤즈다. 모르긴 몰라도 서로의 음악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가 아닐까?
“본의 아니게 공개 연애 중이죠. 이번 앨범의 가사가 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텐데, 가사는 모두 픽션이에요. 제 연애 에피소드가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사랑의 감정만 담았을 뿐 가사는 제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보편적이고 평범한 연애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썼어요.”
장기하는 아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조심스러워했다. 혹여 연인에게 피해가 갈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재차 물었다. 정말 아이유의 영향을 받은 장면이 없는지를. 잠시 고민하던 그는 솔직하게 털어놨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후회’에 대한 거예요. 예를 들어 ‘서로가 서로에게 서운한 말을 쏟아낸 뒤 두세 시간 뒤에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후회하는 감정요. 실제 연애 경험에서 받은 영향이라면 딱 그 정도죠. 사랑하는 데 있어 가장 바보 같은 일임과 동시에 가장 피하기 어려운 감정이 후회가 아닐까 생각해요. 후회 없는 사랑이 결국 노련한 사랑이 아닐까요?”
그렇게 탄생한 곡이 4번 트랙의 ‘그러게 왜 그랬어’다. 말도 아니고 노래도 아닌 중간쯤의 멜로디가 인상적인 곡.
“전형적인 연인 간의 다툼을 이야기한 곡이에요. 다투고 난 후에 ‘그러게 왜 그랬어?’ ‘왜 애초에 그런 말을 했어?’라고 묻는 가사가 리얼하지 않나요? ‘어제는 내가 잘못했어’라는 가사도 재미있죠. 이번 앨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에요.”
장기하의 진심과 바람이 가장 잘 담긴 곡은 ‘살결’이다. 연인을 향한 애절한 감정이 명확하게 묻은 곡이다.
눈을 감고서 어루만지네 /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네 / 언젠가는 마르고 / 거칠어지다 사라지겠지만 / 새로운 계절이 돋아나네 / 오래된 마음이 숨을 쉬네 / 어느 날 영영 멈춰버린다고 해도 난 / 오늘 너의 살결을 만지네
“‘살결’의 가사는 ‘지금 내 마음이 오랫동안 지속됐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곡이에요.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도 여전히 좋은 사랑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곡이죠. 감미롭게 부르려고 노력하다 보니 가장 여러 번 녹음한 곡이기도 해요. 저의 바람과 노력이 모두 투영된 곡이죠.”
사실 장기하의 지난 앨범에선 사랑가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 ‘싸구려 커피’와 같은 일상을 노래하는 곡이 많았다. 그런 그가 사랑을 예찬하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저는 미리 앨범의 콘셉트를 정하고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녜요. 10곡이 완성되면 그때야 앨범의 총체적 콘셉트를 생각하는 식이죠. 이번 앨범도 10곡을 모아놓고 보니 전부 사랑가더라고요. 지난 앨범을 작업할 때는 대놓고 사랑을 노래한다는 게 왠지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제 스타일대로 오그라들지 않는 사랑가를 부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애를 이야기하는 곡이 탄생하게 된 거고요.”
10곡의 사랑가를 작업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봤을 법도 하다. 과거 “정의하기 어렵다면 말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정의하기 어려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라던 그의 소신에도 변화가 생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요. 단 하나 말하고 싶은 건 자기 사랑에 노련한 사람은 없을 거라는 거예요. 그게 ‘연애는 다 그래’라고 합리화하려는 건 아니에요. 더 완벽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미죠.”
장기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 등을 나열한 곡을 부를 땐 눈을 감고 몸을 흔들었다. 장기하와 얼굴들 역사상 최초로 실존 인물의 이름이 들어간 곡 ‘괜찮아요’를 이야기 할 때 그의 눈이 반짝였다.
“제가 사랑하는 유명인 중 한 명은 바로 (노)홍철이 형이에요. 가수로 데뷔하기 전부터 팬이었어요. 자신이 즐거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게 된 전례를 남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삶의 태도와 마인드도 존경하고요. ‘사랑’을 노래하는데 홍철이 형을 빼놓을 수 없죠.(웃음) 자랑 하나 할게요! 홍철이 형이 제 컴백 첫 프로그램의 MC를 봐주신답니다.(웃음)”
멋쩍은 듯 너털웃음을 짓는 모습이 왠지 귀여워 보였다.
“나랑 잘 맞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취향부터 관심사까지 비슷한 친구와의 사이가 멀어졌을 때, 결국 ‘취향 비슷한 게 무슨 소용이냐’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나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취향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지가 중요하죠.”
노홍철과의 인연을 자랑하더니 뜬금없이 취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생뚱맞았지만 자신의 음악 취향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장기하의 취향은 확고했다. 산울림과 비틀스다. 그것도 “초창기 비틀스”라고 콕 집어 말했다.
“곡을 만들면서, 노래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뮤지션들이에요. 음악의 가장 기본이 되는 클래식의 원조라고 생각하죠. 초기 비틀스의 음악을 특히 좋아해요. ‘나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두 그룹은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면 고민의 답이 나오더라고요. 비틀스 팬들은 ‘말도 안 된다’라고 하겠지만, 초기 비틀스를 오마주하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니 닮은 듯도 하다. 그동안 장기하와 아이들의 곡은 산울림의 ‘청춘’이나 ‘어머니와 고등어’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섯클리프, 피트 베스트로 구성된 초기 비틀스의 목소리와도 닮았다.
“산울림은 저에게 지침서와 같아요. 영향을 받지 않은 곡이 하나도 없죠.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 영향이 많거나 적음의 차이일 뿐이죠. 아버지와 아들이 평소에는 그렇게 닮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보면 정말 똑같아 보일 때가 있잖아요. 저와 산울림도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한 느낌이죠.”
장기하의 산울림 예찬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국말 가사를 가장 한국말답게 쓴 뮤지션이 바로 산울림이에요. 1960~80년대에는 영어식 발음이 많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단어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부른 그룹이죠. 그들의 독창성을 배우고 싶어요.”
장기하의 한국말 사랑은 산울림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말 같지도 않은 말 중에 가장 말 같은 말인 ‘ㅋ’으로 4분짜리 노래를 만들었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것도 사랑 노래를 말이다.
웬종일 / 쿵쿵대는 내 맘을 / 시시콜콜 적어 전송했지만 / 너는 쿨쿨 자다가 / 아주짧게 ㅋ 한 글자만 찍어서 보냈다 / 크크크크 크크 크크 크크크크 / 큰 걸 바라지는 않았어 맘맘마 맘마 맘마 맘마 맘맘 / 말 같은 말 해주길바랬어 / ㅋㅋㅋㅋ ㅋㅋ ㅋㅋ ㅋㅋㅋㅋ / 빵 터진 것보다야 나은가 / ㅋㅋㅋ도 ㅋㅋ도 아닌 한 글자에 / 눈물 콱 쏟아져버리고 말았네
“‘문법경찰’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한국말 가사에 집착해왔어요. 발음에도 신경 쓰는 편이죠. 그런 점도 산울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산울림과 비틀스는 결국 장기하에게 ‘초심’이다. 뮤지션의 꿈을 꾸게 된 것, 그의 초창기 곡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두 그룹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장기하와 얼굴들은 1집 때와 달라요. 일단 멤버 수가 늘었죠. 미미시스터즈를 제외하면 4인조였어요. 6인조로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록 사운드 구현에 집착하기 시작했죠. 어느 순간 소리로 꽉 찬 음악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결국 과잉 사운드가 됐고요. 소리에 여백이 많아 가사 전달이 잘됐던 1집 앨범처럼 노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비우는 연습이 필요해요.”
장기하의 생각에 멤버들도 동의했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음악적 동반자로 의지했던 양평이 형(하세가와 요헤이)의 적극적인 지지가 힘이 됐다.
“양평이 형이 ‘1집 때처럼 노래하면 되겠다’라고 말하더라고요. 무언가를 잘 보이게 하려면 부수적인 다른 여러 가지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대요. 그렇게 말해줘 고마웠어요.”
데뷔 초 ‘인디 밴드계의 서태지’라는 별명을 얻었던 장기하와 얼굴들. 신비주의적 이미지가 그런 수식어를 만들었다.
“신비주의를 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예능 프로그램이나 광고에 출연하지 않아 그런 이미지로 보였을 거예요. 사실 시사 프로그램에는 여러 번 나갔었는데…. 앞으로는 재미있고 독특한, 저희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음악을 선보일게요. 음악으로 승부하는 밴드가 되고 싶어요. 열심히 할 테니 지켜봐주세요.”
장기하는 한 시간 동안 ‘사랑’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음악은 결국 사랑이었고, 사랑이 결국 음악이었다. 당연하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여자와 목하 열애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