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가 바이칼 호에 간 까닭은?
우리나라 소설에 러시아의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가 등장하는 것은 춘원 이광수(1892~1950)의 소설 <유정(有情)>이 최초다. <유정>은 바이칼에서 시작해서 바이칼에서 끝난다. 주인공이 바이칼 호 인근 시베리아 삼림 속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풀기 난감한 남녀의 애정 문제를 다룬 소설인데 그 시절에 어떻게 바이칼과 시베리아가 소설의 배경이 되었을까? <유정>은 일제강점기,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인 1933년에 쓴 소설. 그 시절 바이칼 호수, 이르쿠츠크 등 시베리아를 주요 무대로 소설을 썼다는 것이 경이롭다. 작가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추운 겨울의 묘사도 많다. 지금도 겨울의 시베리아를 경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터인데 하물며 모든 여건이 어려웠을 그 시절에야 말할 것도 없다.
그 시절 이광수는 어떤 연유로 바이칼 호수엘 갔을까? 우리나라 현대 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는 이광수는 22세 때인 1914년 바이칼 호수 인근에 있는 시베리아의 도시 치타에서 2월부터 8월까지 반년가량 머문 적이 있었다. 2월은 바이칼 호수가 가장 두껍게 어는 시베리아 겨울의 절정이다.이광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가기 위해 치타까지 갔다가 여비 문제로 출발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행이 봉쇄되면서 이곳에서 발이 묶였다. 러시아를 지나 유럽까지 간 후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려고 한 당초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조선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광수가 바이칼에 간 것은 치타에 머무는 동안이었을 것이다. 춘원은 바이칼 호수 지역을 둘러보며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이때의 기억을 되살려 19년 후에 내놓은 작품이 <유정>이다.
〈유정〉의 줄거리
〈유정〉은 남편(최석)이 중국에서 데려와 자식처럼 키운, 죽은 남편 친구의 딸(남정임)과 남편 사이를 불륜으로 오해한 부인이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내용이다. 주인공 최석은 일본으로 유학 간 정임이 아프다는 전보를 받고 도쿄로 떠나는데 부인은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한다. 의심은 정임과 같은 기숙사에 있는 조선 여학생이 부인에게 최석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담긴 정임의 일기를 훔쳐 보냄으로써 결정적으로 굳어진다. 부인이 길길이 뛰며 퍼뜨린 소문 때문에 최석은 교장직에서 물러나고 신문에까지 ‘에로 교장’이라는 문구로 그에 대한 기사가 실리는 등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그는 결국 집을 나와 시베리아로 간다. 세상을 등지기 위해서다. 그러나 부인과 가족들은 최석이 세상을 정리하면서 친구 N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뒤늦게 진실(두 사람이 불륜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을 알게 된다. 일본에서 서울에 온 남정임이 병중임에도 최석의 딸 순임과 함께 그를 찾아 시베리아로 떠나지만 최석은 남정임이 도착하기 직전 세상을 떠난다는 비극적인 스토리이다. 물론 소설 속에서 최석과 성장한 남정임 사이에는 나름 사랑의 물결이 일렁이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선을 넘지 않는다. ‘그러니 스캔들로 보면 곤란하다’는 어려운 얘기를 소설은 담고 있는 것 같다. 경성(서울)과 일본, 만주, 시베리아, 바이칼 등을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바이칼 호수에서 온 주인공의 편지
소설은 최석의 친구 N의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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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으로부터 최후의 편지가 온 지가 벌써 일 년이 지났다.그는 바이칼 호수에 몸을 던져 버렸는가. 또는 시베리아 어느 으슥한 곳에 숨어서 세상을 잊고 있는가. 또 최석의 뒤를 따라 간다고 북으로 한정 없이 가 버린 남정임도 어찌 되었는지, 이 글을 쓰기 시작할 이때까지에는 아직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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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N은 친구 최석과 남정임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최석으로부터 온 편지 사연을 공개하노라고 밝힌다. 소설은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석이 편지를 쓴 곳은 바이칼 호숫가 부랴트족의 한 민가다. 부랴트족은 바이칼 호수 일대에 사는 러시아의 소수민족. 몽골족의 일파로 생김새는 우리와 비슷하다. 다음은 편지의 서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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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벗 N형!
나는 바이칼 호의 가을 물결을 바라보면서 이 글을 쓰오. 나의 고국 조선은 아직도 처서 더위로 땀을 흘리리라고 생각하지마는 고국서 칠천 리 이 바이칼 호 서편 언덕에는 벌써 가을이 온 지 오래요.
이 지방의 유일한 과일인 ‘야그드’의 핏빛조차 벌써 서리를 맞아 검붉은 빛을 띠게 되었소. 호숫가의 나불나불한 풀들은 벌써 누렇게 생명을 잃었고 그 속에 울던 벌레, 웃던 가을꽃까지도 이제는 다 죽어 버려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오직 성내어 날뛰는 바이칼 호의 물과 광막한 메마른 풀판뿐이오. 아니 어떻게나 쓸쓸한 광경인고.남북 만 리를 날아다닌다는 기러기도 아니 오는 시베리아가 아니오, 소무나 왕소군이 잡혀 왔더란 선우의 땅도 여기서 보면 삼천 리나 남쪽이어든……. 당나라 시인이야 이러한 곳을 상상인들 해 보았겠소?
이러한 곳에 나는 지금 잠시 생명을 붙이고 있소. 연일 풍랑이 높은 바이칼 호를 바라보면서 고국에 남긴 오직 하나의 벗인 형에게 나의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소.
지금은 밤중. 부랴트족인 주인 노파는 벌써 잠이 들고 석유 등잔의 불이 가끔 창틈으로 들이쏘는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소. 우루루 탕하고 달빛을 실은 바이칼의 물결이 바로 이 어촌 앞의 바위를 때리고 있소. 어떻게나 처참한 광경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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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의 목적지는 바이칼 호수였다. 그는 거대한 바이칼 호수의 출렁이는 물결이 보이는 곳에서 서울에 있는 자신의 유일한 벗 N에게 그간의 진실을 밝히는 편지를 쓴다. 그 바이칼은 조선에서 7천 리 즉 2,800km나 떨어진 아득하게 먼 곳이다. 묵고 있는 민가가 있는 곳이 바이칼 서편 언덕이라고 하니 이르쿠츠크와 가까운 어촌 마을 리스트비얀카나 그 인근쯤 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최석은 “소무나 왕소군이 잡혀 왔더란 선우의 땅도
여기서 보면 삼천 리나 남쪽이어든…” 이라고 했다. 선우는 흉노의 우두머리. 선우의 땅이란 흉노의 땅이니 지금의 몽골을 포함한 만리장성 이북의 광범위한 지역을 일컫는다 하겠다.소무는 중국 전한(前漢) 때의 명신으로 선우에게 붙잡혀 복종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아 북해(중국에서 바이칼을 北海 즉 ‘북쪽의 바다’로 불렀다) 부근에 19년간 유폐되었던 인물이다.
왕소군은 서한 원제(元帝) 때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흉노의 왕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간 궁녀인데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는 여인. 미인임에도 불구하고 궁정의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지는 바람에 흉노에게 보내지게 되었다. 황제가 그림을 보고 그중 미색이 떨어지는 궁녀를 보내기로 했던 모양이다. 원제는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한 후에야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떠난 뒤 화공들은 원제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바이칼은 그렇게 선우의 땅보다도 삼천 리나 먼 북쪽에 있건마는 최석은 평소에도 바이칼 호를 그리워했다. 소설 속의 최석은 그곳에 갔던 적은 없다. 바이칼 호를 그리워한 소설 속의 최석은 젊어서 이 지역을 여행했던 작자 이광수인 것이다. 최석의 긴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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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바이칼에 겨울의 석양이 비치었소.
눈을 인 나지막한 산들이 지는 햇빛에 자줏빛을
발하고 있소. 극히 깨끗하고 싸늘한 광경이오. 아듀!
이 편지를 우편에 부치고는 나는 최후의 방랑의 길을 떠나오. 찾을 수도 없고, 편지 받을 수도 없는 곳으로… 부디 평안히 계시오. 일 많이 하시오. 부인께 문안 드리오.
내 가족과 정임의 일을 맡기오,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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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부친 후 최석은 시베리아의 삼림 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살다가 오래되지 않아 병으로 생을 마친다. 정임이 도착했을 때는 막 숨을 거둔 뒤였다. 정임은 병든 상태로 최석이 잠든 시베리아에 남는다.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톨스토이와 이광수와 <유정>
〈유정〉은 1933년 10월 초부터 12월 말까지 76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됐다. <유정>은 이광수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작품이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전 작품 중 후세에 끼칠 만한 것이 있다면 또 외국어로 번역될 만한 것이 있다면 〈유정〉이라고 말했다. 이광수가 치타까지 가게 된 상황을 살펴보면 톨스토이와 묘한 인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톨스토이는 이광수가 러시아에 가기 4년 전인 1910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광수는 이전에 톨스토이를 본 적도 없다. 이광수가 러시아에 간 목적 또한 톨스토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이광수가 치타까지 가게 된 배경에는 톨스토이가 있었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이광수는 10세 때 부모를 잇달아 잃고 고아가 되었다. 이듬해인 11세 때부터 정주 지역 동학 두령 박찬명 대령의 집에 기숙하며 심부름을 하게 되는데, 그 심부름이란 게 도쿄와 서울에서 오는 문서를 베껴서 배포하는 꽤 중요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전령 같은 역할이었는데 이광수 본인은 후일 이를 ‘비서’라고 표현했다. 동학이 탄압을 받고 있을 때였으므로 남의 의심을 사지 않을 어린아이를 전령으로 쓴 것 같다. 이광수는 똑똑했으므로 그 일을 곧잘 했다. 그러한 동학과의 인연으로 13세 때인 1905년 동학과 손을 잡은 일진회(1904년 송병준이 만든 친일 단체)의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광수는 유학 시절 톨스토이에게 깊이 빠져든다. 이 시절 이광수에게 톨스토이는 예수, 석가에 버금가는 살아 있는 성인이요 위인이었다. 이광수가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게 된 것도 톨스토이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그는 톨스토이처럼 되고 싶었다. 그가 문학을 하게 된 것도 톨스토이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광수는 후일, “문학은 철학, 종교와 동일한 사명을 가진다”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톨스토이의 영향으로 보인다.
톨스토이 가르치다 오산학교를 떠나 방랑길로
이광수는 1910년 메이지 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고향인 정주의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1864~1930)의 초청으로 이 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철저한 톨스토이주의자가 되어 돌아온 이광수는 틈틈이 학생들에게 톨스토이에 대해 가르쳤다. 톨스토이는 이광수가 부임한 이 해 11월에 죽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이광수는 학생들을 모아 톨스토이 추도회를 열기도 했다.
오산학교는 이승훈 선생이 운영할 때는 별문제가 없었으나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인 1911년의 신민회 사건으로 선생이 장기간(6년) 투옥되면서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학교 운영이 결국 기독교 재단의 오산교회 쪽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학생들에게 톨스토이를 가르치는 교사 이광수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톨스토이가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부정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기독교의 근본인 예수의 신성,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을 부정했다. 처녀 잉태, 부활 등도 인정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진리란 예수의 말 가운데서만 찾아낼 수 있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의 신앙은 정통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톨스토이는 그러한 종교적 견해에다 차르 체제와 그 체제를 떠받들고 있는 당시의 부패한 정교회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러시아 황실과 정교회는 톨스토이를 증오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899년 소설 〈부활〉이 나왔다. 〈부활〉은 당국의 엄격한 검열을 거쳐 수없이 많은 수정이 가해졌음에도 교회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 등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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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여기는 사제들은 실상은 그리스도가 아닌 신자들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이라는 데는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와 같이 생각한 ‘불쌍한 사람들’을 희롱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펼친 복음을 감추어 그들에게서 최대의 행복을 빼앗고 더욱 참혹한 괴로움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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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는 1901년 마침내 톨스토이를 파문했다. 톨스토이 신봉자였던 이광수 역시 중요한 교리를 부정함에 있어서는 톨스토이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한 이광수를 기독교회가 가만둘 리 없었다. 1913년 여름에는 일부 학생들이 이광수는 톨스토이주의를 선전하는 이단자라며 배척운동을 벌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이광수는 1913년 10월, 3년 6개월간 정들었던 오산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방랑길에 올라 만주를 거쳐 상해로 갔다. 여기에서 대한제국 무관 출신의 지도급 독립운동가였던 예관 신규식(별호 신정, 1879~1922)의 추천을 받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가기 위해 상해를 떠나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치타까지 가게 됐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광수의 방랑과 러시아 도착, 바이칼 여행은 톨스토이와 관련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광수와 부인 허영숙
시베리아의 삼림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유정>의 주인공 최석. 그가 가출한 이유는 히스테릭한 부인 때문이다. 최석의 가출과 죽음은 아내 소피야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스나야 폴랴나의 집에서 가출했다가 시골 간이역에서 죽음을 맞는 톨스토이의 최후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부부간의 갈등은 이광수와 강한 성격의 아내 허영숙(1897~1975)과의 사이에도 의당 있었으리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중 한 사람이요, <동아일보>에서 의학 전문기자도 했던 허영숙. 부잣집 딸로 자라 17세에 혈혈단신 일본 유학을 감행한 허영숙은 당시 대표적 신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도쿄 여의전에 다니던 허영숙은 1917년 도쿄의 유학생 모임에서 처음 이광수를 만났다. 허영숙은 이광수보다 다섯 살 아래다. 이광수는 허영숙이 의학교에 다닌다고 하자, “폐병에는 무슨 약이 좋으냐”고 물었고, 며칠 후 허영숙이 약을 사 들고 이광수의 하숙을 찾아가면서 두 사람은 차츰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허영숙은 이광수가 일본에서 폐결핵으로 고생할 때 그를 극진히 돌봤다. 당시 이광수는 조선에 처자가 있었다. 이광수는 1918년 본처 백혜순과 합의이혼하고 3년 후인 1921년 허영숙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결혼 후 가정에서의 주도권은 대체로 허영숙에게 가 있었던 것 같다. 부부 관계도 그다지 원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둘째 딸 이정화씨의 증언이 참고가 될 만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이정화씨는 2014년 잠시 귀국했을 때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2014년 10월 14일 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아버님을 많이 구박했지요. … 어머니는 강한 성격이었고, 가족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렸지요. 자신이 운영하는 산후원(산부인과 병원)에서 일을 잘 못하고 말 안 듣는 의사나 간호사의 뺨을 때리기도 했어요. 소설의 주인공이 돼도 좋을 캐릭터이지요. 흥미로운 일생을 사셨어요. …아버님이 꼼짝 못했어요.” 〈유정〉에서 최석이 시베리아로 가출하는 상황 설정은 가정에서 부인에게 눌려 지냈던 이광수의 정신적 도피 심리를 나타낸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영화 〈유정〉과 배우 남정임
이광수의 〈유정〉은 1966년 김수용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주연은 김진규와 남정임. 당시 소련과는 외교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때였으므로 설원 장면 등 시베리아의 풍경은 일본의 홋카이도에서 찍었다. 〈유정〉은 남정임의 데뷔작이면서 성공작이다. 남정임은 이 데뷔작으로 단번에 정상급 배우가 되어 한국 영화의 황금기인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문희, 윤정희와 함께 트로이카 시대를 이끈다.
남정임의 본명은 이민자. 1945년생이다. 남정임은 〈유정〉의 여주인공 공개 선발에 1천3백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뽑혔다. 〈유정〉의 헤로인 모집에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50만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남정임은 이 영화로 데뷔하면서 예명을 아예 남정임으로 했다. 그녀는 2백50여 편의 영화에 주연급으로 출연한 정상의 스타였으나 첫 결혼에 실패하는 등 사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8년부터 악성종양에 시달리며 병원과 기도원을 전전하며 투병생활을 하다 1992년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