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디한 신사동 가로수길에서도 ‘스티브 J&요니 P’ 매장은 유난히 눈에 띈다. 걸려 있는 옷 중 어느 것 하나 통통 튀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외국인 손님들도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다. 매장 윗층에는 부부 디자이너의 작업실이 있다. 스티브 J(정혁서, 이하 스티브)와 요니 P(배승연, 이하 요니)는 무척 바빠 보였다.
“곧 열릴 ‘서울패션위크’ 때문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요즘 저희 새 브랜드인 ‘SJYP’ 매장이 유난히 많이 오픈했어요. 이달에만 벌써 열 군데예요. 서울권 매장은 모두 방문했지만, 스케줄이 꽉 차서 지방의 매장은 아직 방문하지 못했어요.”(스티브)
‘스티브 J&요니 P’는 부부가 2006년 영국 유학 시절 론칭한 의류 브랜드다. 국내보다 유럽에서 먼저 주목받은 ‘스티브 J& 요니 P’는 현재 파리 봉마르셰 백화점을 비롯해 유럽 12개국에서 국외 명품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브랜드의 잠재력을 알아본 SK네트웍스가 지난해 5월 ‘스티브 J&요니 P’를 인수했지만 스티브와 요니는 여전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고유의 가치를 잘 지켜나가고 있다. 이들이 론칭한 데님 소재를 중심으로 한 세컨드 브랜드 ‘SJYP’도 순항 중이다. 런던 리버티 백화점에 ‘스티브 J&요니 P’와 ‘SJYP’의 동시 입점이 결정된 것. “과거엔 저희가 디자이너뿐 아니라 오너 역할까지 해야 했어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죠. 디자인에 조금 더 힘을 쏟고 싶다는 열망이 커져가던 차에 좋은 파트너를 만났다고 생각해요. 경영과 관련한 부분은 전문성을 갖춘 분들에게 맡기고, 우리가 잘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요.”(스티브)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은 요즘, 스티브와 요니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이들은 패션만큼이나 통통 튀는 라이프스타일과 이효리, 윤승아 등 셀러브리티들과의 화려한 인맥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일을 할 때나 친구와 어울릴 때도 부부는 늘 함께다. 취미마저 공유하는 부부에게 ‘삶은 곧 패션’이다. 스티브가 취미로 시작한 롱보드가 대표적인 예다.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보는 스티브가 대회에서 입상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게 되면서 부부는 패션쇼 레퍼토리에 ‘롱보드 룩’을 추가했고, 롱보드 숍까지 운영하게 됐다. 재기발랄한 패션 스타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죽이 잘 맞아요. 일할 때는 서로 날카로워질 때도 있지만 취미 생활을 같이 하면서 풀죠. 둘 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즐기거든요. 저는 얼마 전에 래퍼들이 참여하는 오디션 <언프리티 랩스타>를 본 뒤로 랩의 매력에 빠졌어요. 내 이야기를 랩으로 풀어낸다는 것이 매력적이더라고요. 장난 삼아 배웠는데 주변 사람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녹음까지 하게 되었죠.(웃음) 스티브가 한술 더 떠서 ‘음원 판매를 해보는 게 어떠냐?’ ‘<언프리티 랩스타>에 출연하는 건 어떠냐?’ 하면서 밀어주더라고요. 뭐 어때요. 재미있잖아요.”(요니)
주기적으로 새로운 것을 대중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디자이너에게 긴장감과 설렘은 늘 유지해야 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부부는 오늘도 유쾌하게 산다.
“위트 있고 밝은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재미없게 살면 안 되지요. 그런 면에서 저는 요니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요니는 토요일에 더 바빠요. 트레이드마크인 금발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 염색도 하고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하거든요. 눈 화장도 부지런히 한답니다.(웃음)”(스티브)
마주 보며 웃는 부부의 얼굴이 닮았다. 캠퍼스 커플로 만나 동료이자 부부로 살아온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들은 서로의 첫인상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요니는 학창 시절부터 튀었어요. 화려한 옷을 입고 언제나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리더십 있는 스타일이랄까? 햇살처럼 밝은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그에 비하면 저는 소극적이고 조용한 스타일이었거든요. 요니의 수많은 친구 중 한 명에 불과했죠. 처음 데이트를 하던 날이 아직도 기억나요. 서울대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저쪽에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표범무늬 옷을 입은 한 여인이 걸어오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스티브는 반전 매력이 있었어요. 조용하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안 하는 것 같은데, 춤은 너무 열심히 잘 추는 거예요. ‘쟤는 대체 뭐지?’라는 호기심이 생기던 차에 스티브가 갑자기 박력 있게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겠어요?(웃음) 저는 언제나 장소와 시간에 맞춰 옷을 입기 때문에 서울대공원 가기 전날 밤에도 미리 옷을 세팅해두었죠. ‘동물원에는 역시 동물 프린트 옷을 입어야지’ 하면서 말예요.(웃음)”
첫 데이트 이후 스티브와 요니는 연인이자 같은 꿈을 공유하는 동료로 줄곧 함께 걸어왔다. 본격적으로 패션을 공부하기 위한 런던행도 함께했다. 서툰 영어 실력, 나날이 줄어드는 자신감으로 힘들었던 타지 생활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된 것도 서로의 존재였다.
“영국으로 건너간 초기에는 영어도 빨리 안 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죠.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만 하던 어느 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결단을 내렸죠. 미용실로 달려가 흑인들이 주로 하는 아프로 파마를 하고 눈 화장을 짙게 했어요. 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이 눈 화장은 그때부터 시작된 거랍니다. 그렇게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고 학교에 갔는데 난리가 났어요. 다들 ‘너무 잘 어울린다. 사람이 확 다르게 보인다’ 하는 거예요. 순식간에 저는 동양에서 온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여자가 된 거죠. 다들 ‘아프로 요니’라고 부르며 저를 귀여워해줬어요. 겉모습이 바뀌니 매사에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요니)
스티브와 요니는 영국 생활을 회상하며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늘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자유롭지만 치열하고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한 과정 끝에 두 사람은 드디어 데뷔 무대를 올리게 됐다.
“어릴 때 사진을 지금 꺼내 보면 창피한 것처럼 첫 패션쇼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요.(웃음) 그때 우리는 잘 몰라서 용감했지요. 데뷔 무대를 마치고 둘이 완전히 지쳐서 같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어요. 온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한 터라 배가 너무 고파서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서 같이 먹었어요. 그런데 그 달걀도 안 넣은 라면이 정말 꿀맛이었어요.(웃음) 힘들었던 모든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하는 순간이었죠.”(스티브)
함께였기에 ‘스티브와 요니답게’ 해나갈 수 있었다. ‘날고 뛰는’ 패션계 인사들과도 동등하게 겨루었다. 어느 순간 부부는 유창하지 않은 영어 발음에도 주눅 들지 않게 되었다.
“영국에서 한때 우리 브랜드의 방향성이 흔들린 적이 있어요. 사업적인 위기가 잠깐 찾아왔거든요. 그때 우리는 전통적인 캣워크 쇼만 고집하지 않고 바이어들이 가까이에서 직접 옷을 볼 수 있는 형식으로 쇼를 바꿨어요. 반응이 좋았죠. 그런 방식으로 숱한 위기들을 정면돌파했어요.”(요니)
‘결정하면 망설임 없이 밀고 나가되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부부는 이 철학대로 달렸다. 많이 배우고, 달리고, 깨지고, 다시 일어났다. 원 없이 하고 나니 이제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잘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영국에서 얻을 것은 다 얻었으니 다시 시작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고국에 돌아온 그들은 부모님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예물 대신 꽃반지를 나눠 꼈다는 대목이 참 그들답다.
“결혼식을 올렸어도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어요. 집안일은 어떻게 분배하느냐고요? 한창 바쁠 때는 저도 요니도 손댈 엄두도 못 내요. 서로에게 시키지도 않아요. 그저 치워야 할 것을 발로 밀어두다가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가 오시면 ‘우렁 각시님 오셨다’며 서로 좋아하죠.(웃음)”(스티브)
늘 사이좋고 친구 같은 부부지만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거의 온종일 붙어 있다 보면 좀 갑갑하지는 않을까? 기자의 질문에 요니가 손을 저으며 답했다.
“물론 일하다 티격태격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저는 스티브가 30분만 안 보여도 바로 전화해서 ‘어디야?’ 하고 물어봐요. 그럼 스티브는 ‘그새 내가 보고 싶니? 징하다’라고 답하죠.(웃음) 소울메이트가 이런 건가 봐요. 싸워도 1시간도 안 되어서 다 풀려요.”(요니)
“주중에는 같이 일하니까 거의 24시간 붙어 있죠. 그렇지만 주말에는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요. 저는 스케이트보드에 빠져 있고 요니는 요가 삼매경이죠. 운동도 같이 하고 교회도 같이 가지만 서로에게 간섭은 잘 안 해요. 우리 부부가 제일 사이좋을 때는 쇼핑할 때예요. 절대 말리지 않고 오히려 더 사들이라고 부추기죠.(웃음)”(스티브)
최근 5년 만에 가로수길로 돌아온 스티브와 요니는 감개무량하다. 5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외국인과 각종 편집매장을 보며 변화를 실감한다. 다양한 스타일로 옷을 차려입은 패션 피플을 보면 지난날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며 요니는 웃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건 사무실과 집을 분리한 일이에요. 영국에서 지낼 때는 집과 사무실이 붙어 있었거든요. 밤새워 오래 일하다 보니 사람이 피폐해지더라고요. 출근과 휴식의 개념이 모호해지니 괴로웠어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삶의 밸런스를 찾는 데 중점을 두자고 다짐했지요. 그렇게 바꾸고 나니 오히려 일이 더 잘되더군요. 지금도 심한 야근은 절대 하지 않아요.”(스티브)
대기업의 인수로 브랜드는 점점 확장되고 두 사람도 더 바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오후의 매장에서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하는 일상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동안 ‘꽂히면 무조건 돌격’이라는 마인드로 달려왔어요. 요니나 저나 모두 브레이크를 거는 성격이 아니라 그야말로 거침없이 달렸죠. 앞으로도 우리의 모토인 ‘삶과 분리되지 않는 패션’을 유지하기 위해 신나게 지낼 거예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영감을 얻고, 우리의 삶에도 그 영감을 반영하고, 그게 저절로 옷에 드러나게 하고 싶어요.”(스티브)
“최근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스티브랑 수업 시간에 옛날 이야기를 나누다가, ‘꿈을 공유한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연결 고리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죠. 서로를 향해 달콤하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이라기보다는 같은 꿈을 향해 달려온 전우랄까요.”(요니)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스티브와 요니가 답하지 못한 단 하나의 질문은 바로 ‘일생을 살면서 후회되는 순간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둘 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없다고 했다. 서툴렀던 과거를 웃음으로 넘길 줄 아는 여유를 갖춘 부부에게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다.
“새로 이사 갈 집의 지하 공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꾸밀지 생각하느라 들떠 있어요. 놀이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거든요. 생각만 해도 좋아요!”(요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줄 아는 스티브와 요니 부부가 선보이는 패션은 앞으로도 유쾌하고 신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