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가로수길의 한 카페에서 지진희와 마주 앉았다. 50부작 드라마 SBS <애인있어요>를 막 끝낸 그는 작품의 여운으로부터 완전하게 헤어난 듯 보였다. 장장 8개월이라는 기간을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아왔을 텐데, 산뜻하게 모든 것을 털어버린 모습이라 의외였다.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늘 염두에 둔 게 있죠.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잘 빠져나오자’는 것이었어요. 연기하다 보면 살인자 역할이나 피해자 역할을 맡을 수도 있는데 빠져나오지 못하면 곤란해지니까요. 데뷔 초기에 폭력적인 배역을 맡아 연기한 적이 있는데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해주길 제 말투가 거칠어지고 행동도 우악스럽게 변했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아차, 싶었지요. 할리우드에는 배우들이 배역에서 잘 빠져나올 수 있도록 심리 상담을 받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장치가 준비되어 있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시스템이 아직 전무합니다. 그러니 배우가 스스로 잘 조절해야죠. 쉬운 일은 아니지만 10여 년간 노력해와서 이제는 제법 배역으로부터 잘 빠져나오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커피와 음식이 나왔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지진희는 자신의 접시에서 요리를 덜어 기자에게 건넸다. “나한테도 덜어줘야죠.” 웃으며 말하는 이 남자의 얼굴을 보니 그 순간,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디저트로는 케이크를 먹죠. 아까 미리 먹어봤는데 초콜릿 케이크가 괜찮았어요. 스파클링 커피도 특이하더라고요.” 그가 얼마 전까지 연기한 <애인있어요>의 남자 주인공 최진언이나 할 법한 대사들이다. 섬세하고 배려 깊은 태도가 여심을 녹인다.
“냉정하게 생각해도 참 좋은 작품과 배역을 만났어요. 전에는 ‘어떻게 저렇게 니글니글한 대사를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할 법했던 문장들이, 내가 ‘최진언’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경험했어요. 50부작이라는 긴 호흡의 드라마를 만들면서 배역과 함께 성장했지요. 시청률에 대해 아쉽다고 하는 분이 많지만 저는 서운하지 않아요.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시청률 욕심을 내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본 방송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다시보기로 봐주시는 분도 많았어요. 체감 시청률은 거의 국민 드라마 수준이었어요.(웃음)”
지진희는 명쾌하게 말을 이어갔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다면 연기로 표현할 수 없다는 그의 지론은 이번 작품에서도 똑같이 적용됐다. 그가 맡은 배역은 아내를 두고도 다른 여자에게 다가올 여지를 주는 남자. ‘불륜’이라고 부를 만한 관계에 대해서도 그는 “절대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이토록 강한 확신이 있었기에 지진희가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뭇매를 맞을 듯한 주인공임에도 그가 연기하면 ‘얄미운데도 나도 모르게 연민이 생기더라’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고요. 사랑하는 아내가 곁에 있어도 아름답고 섹시한 여자가 지나가면 눈이 돌아가는 게 남자예요. 기자님은 안 그러세요?(웃음) 그건 나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죠. 다만 그 욕구를 행동으로 옮기느냐 마느냐의 차이랄까요? 그리고 그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도 참 모호할 때가 많아요. 인간은 복잡한 존재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작품이 더 좋았어요. 등장인물 모두 단순하지 않으니까요. 제 나이대에 이런 배역을 맡게 된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만일 젊을 때 이런 역할을 맡았다면 아주 단순하게 연기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이 들고 나니 작가님이 왜 이야기를 이런 방식으로 썼는지 잘 이해되더군요. 그래서 토씨 하나 틀릴 수 없었어요. 섣불리 애드리브를 넣을 수도 없었고요.”
8개월 동안 작품에 푹 빠져 살았다. 한 번도 트러블 없이 잘 지낸 동료 배우들,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 그리고 효율적으로 드라마 제작을 이끌어온 PD에 대한 칭찬과 감사의 말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번 드라마에서 제일 좋았던 건 촬영이 밤 12시를 넘긴 적이 거의 없다는 거예요. 새벽 1시가 넘은 적이 딱 두 번 있었죠. 덕분에 저는 좋은 남편과 아빠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고, 삶에 균형이 잡히니 연기도 더 잘됐어요. 이렇게 환상의 호흡을 공유해온 사람들과 헤어지는 건 못내 아쉽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균형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지진희는, 배우인 동시에 남편이자 아버지다. 연예계 안팎에서 소문난 ‘애처가’로 꼽히는 그는 아니나 다를까 부인에 대한 질문에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며 답했다.
“절절한 멜로를 연기하다 보면 ‘실제로도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당연하지요. 벌써 함께한 지 13년이 지났네요. 여자로서도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제게는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현명하고 고마운 동반자입니다. 제가 배우 생활을 시작한 이후 내내 대본을 함께 보면서 작품을 고를 수 있도록 도움을 줬어요. 제가 활자만 보면 머리가 아픈 스타일이거든요.(웃음)
그런데 아내는 워낙 글 읽는 걸 좋아해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안목이 있는 것 같아요. 아내가 추천하는 작품을 하면 후회가 없더라고요.”
지진희는 초등학교 5학년, 2학년인 두 아들의 아버지다. 아이들은 그가 더 열심히, 바르게 살아야 할 가장 큰 이유다. 드라마 촬영 기간에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절대 거르지 않았다. 촬영장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면 그는 배우가 아닌 온전한 ‘남편이자 아빠’로 변신한다.
“최근에 ‘지진희는 자녀들에게 책을 한 권도 안 읽힌다’는 루머가 돌던데요.(웃음) 아이들이 들으면 서운할 이야기입니다. 엄마를 닮아서 책 읽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요. 다만 늘 해주는 말이 있어요. 책에 담긴 지식이 소중하긴 하지만, 그 이야기만 믿으면 안 된다고요. 그것도 결국 남의 이야기니까요. 책을 참고하되 삶 속에서 스스로 맞닥뜨리고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라고 말해주죠.”
곧 사춘기에 접어들어 진지한 고민의 시기를 맞게 될 첫째 아들을 보며, 해주고 싶은 말은 많지만 조심스럽다고 했다. 아버지로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먼저 제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이들도 결국 자신의 인생을 바로 세워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지진희는 말했다.
“평소에 생각하는 내용들을 아이들과 많이 공유하려고 해요. 가령 요즘 저는 ‘시간을 지배하다’라는 명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거든요. 아이들과도 그에 대해 의견을 나누죠. 가령 ‘4분 동안 전력 질주를 하고 나서 5분 동안 지쳐 쓰러져 있어야 한다면 과연 그게 현명한 걸까? 조금 늦더라도 쉬엄쉬엄 7분 동안 걸어가는 게 더 지혜로운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눠요. 아이들에게 저도 모르게 어떤 생각을 함부로 주입할까 봐 늘 조심스럽거든요. ‘1 더하기 1은 2’라는 명제조차 우리의 편의에 의해 만든 거잖아요.”
그의 이러한 가치관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사진작가로 일하다 20대 후반, 다소 늦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했다. 인생의 기로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때 그에게 나침반 역할을 해준 것은 부모님의 가르침이었다.
“부모님은 항상 제 선택을 존중해주셨어요. 학창 시절 어느 날 그림을 그리다 보니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됐죠.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어머니에게 딱 한마디 했어요. ‘엄마가 날 안 믿어주면 누가 날 믿어줘요?’ 그 이후로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귀가 문제로 저를 혼내지 않았어요. 아버지도 참 멋진 분이세요. ‘진희야. 너 여자친구 있니? 담배 피우니? 술은 마시니? 당구는 좀 치니?’라고 물어보시고는 모든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니 오히려 저를 혼내셨죠.(웃음) 인생을 그렇게 재미없게 살면 안 된다고 하시며 직접 소개팅을 주선하셨어요.(웃음)”
‘세상에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으니,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배울 것이 있다.’ 부모님이 늘 그에게 해주던 말이다. ‘밖에 나가면 꼭 한 가지는 배워 오든지 들고 오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그에게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가령 제가 길을 걸어가다가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자는 노숙인을 발견하고 코트를 벗어 주었다고 쳐요. 저는 그날 코트는 잃었지만 따뜻한 마음을 얻고 돌아온 거죠. 그렇게 하루하루 무언가를 얻어서 너의 삶에 더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이제야 비로소 완전하게 이해가 되더라고요. 존경할 수 있는 부모님을 만난 건 큰 행운이에요.”최근에서야 어색하게만 느껴지던 ‘배우’라는 옷이 조금은 편하게 느껴진다는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배우는 정말 최고의 직업이에요. 나이 제한도 없죠.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이미지로 기록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고요. 연기를 선택한 것에 대해 감사해요. 그래서 이 바닥이 좀 더 자유롭고 일하기 좋도록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후배들이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거예요. 후속작을 무슨 장르로 할지는 아직 생각 중이에요. 나이가 좀 더 들기 전에 멋진 액션을 찍고 싶은 마음도 있죠.(웃음) 멜로 작품은 나이가 들어도 끝까지 안고 갈 거예요. 백 살을 눈앞에 둔 노인분들에게도 사랑은 여전히 존재하는 감정이죠. 나이로 인한 한계는 없다고 믿어요.”
연기가 서툴러 드라마 촬영장에서 감독에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받던 신인 배우는 어느 새 ‘큰 숲’의 그림을 보는 배우로 성장했다. 지진희는 앞으로도 걱정하고 고민하는 대신 성큼성큼 걸어 나갈 것이다. 인생에서 그가 맡은 여러 역할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춰가면서 즐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