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인터넷으로 보는 만화)의 시대’다. 그 한가운데 만화가 윤태호가 있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로는 최초로 1천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는 영화 <내부자들>, 재작년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생>, 그리고 할리우드 배우 리암 니슨이 출연해 화제를 모은 영화 <인천상륙작전> 역시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작년에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했던 웹툰 <파인>도 이미 영화화가 결정됐다. 논리적으로 치밀한 이야기 구조와 섬세하며 힘이 있는 그림이 네티즌뿐 아니라 영화계와 드라마계의 제작자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내부자들>을 두 번 봤습니다. 한마디로 흡족했습니다. 제가 그린 만화는 미완성으로 끝났는데 그것을 훌륭하게 완성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더욱 컸지요. 특히 조승우씨가 맡은 역할은 웹툰에는 없는 캐릭터인데 잘 녹아들었더라고요. 영화 제작진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느껴졌습니다. 다른 배우분들의 연기야 더 말할 필요도 없고요. 제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때 저는 제작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아요. 홍보 일정에만 참여하지요. 괜히 제가 나서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저를 배려하느라 작품의 질을 떨어뜨릴까 걱정이 되거든요.”
그 원칙은 재작년 드라마 <미생> 때도 동일하게 지켰다. 웹툰 <미생>의 인기가 뜨거웠을 때에도 그는 작품의 홍보를 위해서만 입을 열었다. 웹툰의 ‘장그래’에 비해 드라마의 ‘장그래’는 지나치게 잘생기고 능력 있는 거 아니냐고 농담하니 그가 웃었다.
“드라마의 특성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재미있게 봤습니다. 중학교 2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 딸이 있는데, 아빠 작품이 드라마로 나온다고 하니 신기해하더라고요. 드라마 <미생>을 보는 시간은 온 가족이 모여 쇠고기를 구워 먹으며 감상을 나누는 시간이었어요. 행복했죠.(웃음) 제 작품들은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 대부분이라 <미생>은 우리 아이들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아빠의 만화’랄까요. 중학교 2학년이면 아직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를 대강이나마 이해하고 있어서 놀라기도 했지요.”
최근 윤태호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미생2>를 연재 중이다. 드라마 <미생>에 덧입힌 스마트한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그는 주인공 장그래를 혹독하게 내몰고 있다. 바닥에 쏟아진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며 자신의 초라함과 무력함을 느끼는 청춘, 꿈과 현실의 격차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렸다. <미생1>이 대기업에 입사한 인턴의 이야기였다면, <미생2>는 중소기업의 직원으로 살아가는 청년의 이야기다. 배경이 달라진 만큼 메시지도 다르다.
“<미생2>를 읽으며 힘이 빠진다는 분들의 원성도 들었습니다. 시즌2는 아무래도 대기업의 로망이 담긴 1편과는 차이점이 많겠지요.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늘 동일해요. 시즌1 때부터 계속 이야기해온 것은 ‘먹고산다는 것은 원래 서글픈 것’이라는 겁니다. 특별히 캐릭터를 힘든 상황에 몰아넣으려는 것은 아니에요. 실제를 담담히 보여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윤태호의 작품은 냉정하다. 그의 작품을 즐겨 읽어온 기자도 마음이 힘든 날에는 선뜻 손을 내밀기 어려울 정도다. <인천상륙작전>과 <파인>에서는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끔찍한 결말을 맞이한다. 영화로 만들어져 화제를 모았던 <이끼>는 ‘시골 사람들은 순박하고 푸근하고 정이 많다’는 고정관념을 어김없이 깨버린다.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얻는다’는 엔딩 공식도 그의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생의 가혹함을 보여주려고 더 잔인하게 그리지는 않습니다. 있는 대로 그리는 게 가장 큰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죠. 혹시 해방 이후 연보를 보신 적이 있나요? 한 페이지가 한 해를 의미하는데 페이지마다 몇 명이 어떤 사고로 어떻게 죽었다는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어요. 감정의 물기를 모두 뺀 채 사실만 기록하는 그 건조한 문장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부조리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잘 그린 만화라도 절대 현실의 잔인함을 따라잡을 수는 없습니다.”
담담하게 바라본 세상을 그림으로 옮기는 윤태호의 현실주의는, 때로 섬뜩하기까지 한 그의 사실적인 그림체와 만나 더욱 빛을 발한다. 남이 만든 창작물을 볼 시간이 없다는 그는 삶의 기록에서 영감을 받는다.
“여덟 살 때 서울에서 살다가 시골로 이사를 갔어요. 부모님은 일 나가시고 저 혼자 집에 있었죠. 오후 어느 때에 갑자기 공기 밀도가 달라지는 거예요. 하늘로 치솟던 하얀 연기가 갑자기 기역 자 모양으로 꺾이고,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그 소리가 멀리까지 전달되지 않고 적막이 흐르는 진공 상태가 되는 걸 경험했죠. 일상의 소음이 사라지고 습도가 올라가며 풀 냄새가 짙어져 코끝을 찌르는 그 순간의 느낌…. 내가 알던 세상과 격리되어 혼자 남겨졌다는 그 상실감은 성인이 된 지금도 잔상이 깊게 남아 있어요. 부지불식간에 제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겠죠.”
그 때문일까. 윤태호는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그는 작업할 때도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TV 채널을 계속 켜둔다. 세상과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다. 그는 낮이 더 무섭다고 털어놓았다. 모두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환한 낮에 대한 역설적인 공포감 때문이다. 직업 특성 때문에 낮에 잠드는 경우가 많은 그는, 커튼 밖에서 스며들어오는 햇살에 두려움을 느낀 적도 있다고 했다. 깊은 잠에 들기 위해서는 두꺼운 암막 커튼과 안대가 반드시 필요하단다.
“영화 <주온> 보신 적 있어요? 그 영화에 귀신이 나와서 무서운 게 아니에요. 햇살이 찬란하고 모든 것이 안전하게만 느껴지는 낮에도 귀신이 창궐할 수 있다는 그 설정이 무서운 거죠. 공포란 가장 강렬하면서도 잔상이 오래가는 감정이에요. 어렸을 때 느꼈던 공포의 순간들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제 마음속에 남아 있거든요. 눈을 감으면 그대로 그려질 정도로 선명하죠. 몇 가지 강렬한 이미지들은 아예 작품에도 반영시킨 적이 있어요. 초등학생 때의 일인데요,
시골의 불 꺼진 이발소에서 환한 밖을 내다봤는데 때마침 꽃상여 하나가 지나가는 거예요.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관이 열리고 할머니가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죠.(웃음) 이발소에 거울이 있잖아요? 그 거울로 창문을 내다보는 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데 그게 너무나 무서웠어요. 그래서 얼른 뛰쳐나왔죠.(웃음) 만화 <이끼>를 보면 시골 할머니의 꽃상여 행렬이 등장하는데 그 이미지 역시 이 경험에서 나온 겁니다.”
윤태호는 자신의 경험담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에도 묘사가 생생했다. 마치 그 장면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며 늘 시를 읽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그의 말도 그러했다. 시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웃었다.
“시를 좋아하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잘 모르는 거니까 싫어할 자격도 없는 거죠.(웃음) 남이 그린 웹툰도 안 봐요. 질투가 나니까요. 저는 샘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들 제 경쟁자라고요.(웃음)”
윤태호의 작업실을 둘러봤다. 수천 권은 되어 보이는 책들이 서가에 빼곡히 꽂혀 있고 온갖 그림들이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의 것이 아닌 다른 작가들의 그림이었다. 자신의 그림체를 바꾸기 위한 몸부림이란다.
“<미생1> 때부터 그림체를 바꾸려고 계속 시도해왔거든요. 그런데 3회 정도 그리니까 다시 제 그림체로 돌아오더라고요. 그림체가 바뀐다는 건 작가의 사고와 미적 가치관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해요. 아예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거죠.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의도적으로 그림을 바꾸어 그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몇 십 년이 걸릴지, 아니, 가능한지조자 잘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하는 거예요.”
윤태호가 만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곧바로 ‘당위성’이라고 답했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으면 절대 그리지 않는단다. 캐릭터가 움직일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만화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오고 그들 사이의 갈등이 이야기가 됩니다. 인물에 당위성이 있어야 갈등이 설득력이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독자들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머리로 납득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억지로 싸움 붙이는 것밖에 안 되지요. 논리 구조가 정확하게 만들어지면 독자들은 뉘앙스로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작자는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써도 독자들이 양해해주겠지’라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에요. 또 자기 작품을 읽으면서 감정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논리 구조 없이 마음만 뜨거워진다고 좋은 작품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윤태호는 작품의 주인공이라 해도 함부로 애정을 주지 않는다. 보통 만화를 읽는 독자들은 주인공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단지 그가 주인공이란 이유만으로 마음을 준다. 윤태호는 그런 심리를 역이용해 주인공이 얼마나 처절하게 악한 인간인지 구구절절 그려내기도 했다.
“작가가 캐릭터에 정을 주면 극의 논리가 무너져버리죠. 아무리 인기 캐릭터라도 제 역할을 다했다 싶으면 퇴장시킵니다. 가령 최근 작업한 <파인>에서 제가 좋아하는 등장인물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철저하게 악한 사람들이니까요. 웹툰에 달린 댓글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모두 확인하지만 반대 견해를 더 꼼꼼하게 읽습니다. 작품이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지요.”
윤태호의 작품에서는 악플을 찾아보기 어렵다. 종종 올라오더라도 그 악플을 반박하는 논리적인 댓글에 금세 묻혀버린다. 그 역시 터무니없는 악담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하루의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무조건 잠을 잘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모자란 시간을 쪼개 영위하는 취미는 영화 보기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코엔 형제의 영화를 특히 좋아한다고. 극장에 가서 보는 것보다 감독이 직접 설명한 내용이 들어 있는 DVD를 구입해서 본다. 장면 하나하나 심층적으로 분석한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를 보고 또 보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간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좋았던 것은 <시카리오>입니다. 국내 영화 중에서는 <특종:량첸살인기>였고요. 시간이 많이 없으니까 확률에 따라 움직여요. 어떤 영화가 보고 싶으면 별점부터 한 줄 평까지 꼼꼼히 살펴서 ‘성공하겠다’ 싶은 영화만 보죠.”
윤태호는 실제적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한다. 문제가 생기면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고, 추상적인 생각이나 걱정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성향은 어렸을 때부터 동일했다.
“늘 현상을 지켜보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어렸을 때 제일 좋아했던 책은 위인전기 시리즈 중에서 실업가들과 관련된 내용들이었죠. 록펠러, 카네기 같은 사업가들요. 어린이용이라 내용이 미화되었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업적에 관심이 많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그런 업적이 가능했던 시대적 배경에 집중하며 책을 읽었죠.”
최근 윤태호는 더욱 바빠졌다. 포털 사이트에 <미생2>를 연재하고, 만화 리뷰 사이트인 ‘에이코믹스’를 만들었고,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누룩미디어’와 그의 새로운 작품을 담당할 출판사도 운영하고 있다. 좋은 작품에 전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작품을 위한 집중력과 역량이 새지 않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싶어요. 문하생들을 정식 직원으로 대우하며 법적으로 4대 보험을 지급하는 것도 그 노력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서 만화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다작을 해야 해요. 다작을 하면서도 작품의 질을 유지하려면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문하생들이 절실히 필요하죠. 이분들이 작품에 전념하려면 안정된 체제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가 바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여태껏 없었던 새로운 개념의 교양 만화 시리즈 프로젝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약 1백여 권의 교양만화 시리즈를 출판할 계획을 세운 윤태호는 이를 위한 출판사까지 설립한 상태다. 곧 1권이 출간될 예정이고 올해 7~8권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수많은 교양서적이 있는데 그것을 만화로 만드는 이유는 단 하나, 그래야 기억에 남는다고 믿기 때문.
“한 달 전에 본 영화라도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곧 모든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게 되지요. 이야기 구조와 결합된 지식을 독자들이 가능한 한 오래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구상했어요.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을 보며 주인공을 로봇으로 정하는 아이디어를 얻었죠. 사람들이 로봇과 같이 살게 된다면 ‘얘가 내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로봇이 이런 질문을 할 거예요. ‘총이란 무엇인가요?’ 인간은 답하겠죠. ‘총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야.’ 그러면 로봇이 또 이런 질문을 할 겁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도구를 왜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는 건가요?’ 인간의 문명과 이야기를 로봇의 시선으로 읽어내면서 보여줄 수 있는 아이러니를 담고 싶어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하고 싶고요.”
윤태호가 지금 계획하는 작품은 ‘교육 만화’가 아닌 ‘교양 만화’이며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연령대를 위한 것이다. 이 작품은 아마도 그에게 필생의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만화 뒤에 포함될 정보 페이지를 위한 전문가를 섭외하고, 극의 전반적인 서사 구조를 정리하는 데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온갖 로봇의 사진을 다 벽에 붙여두었어요. 캐릭터를 잡기 위해서죠. 그렇게 잡힌 캐릭터를 3D 프린터로 뽑아서 구현하고 다시 회의하고 작업하는 과정을 반복했어요. 피곤한 작업이지만 즐거워서 하는 거니까 감수해야죠.”
일주일에 4일밖에 자지 못하고,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탈모를 가리기 위해 늘 모자를 쓰고 다닌다는 윤태호. 인터뷰를 위해 아내의 화장품을 빌려 바르고 왔다며 허허 웃는 그에게, 어떤 웹툰 작가로 남고 싶은지 물었다.
“만화로 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의 극한까지 도달해보고 싶어요. 국내외 가리지 않을 겁니다. 상에는 전혀 관심 없어요. 돈을 많이 벌어서 정말 보람 있을 것 같은 일들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같이 잘 살았으면 하고요. 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하는 창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거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