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란을 처음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이민기와 김민희가 주연을 맡은 영화 <연애의 온도>에서 불륜 은행원 역으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 그녀가 누군지 궁금했다.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 같은 존재감, 내공 없이는 발현될 수 없는 애드리브 등이 기자를 사로잡은 거였다. 당시 그녀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제가 대체 왜 궁금하세요?” 하며 애교스럽게 입을 씰룩거렸다. 낯선 기자와의 어색함을 참지 못해 수시로 19금 농담을 던져 분위기를 눙치는 여자였고 칭찬에는 소녀처럼 몸을 배배 꼬는 담백한 사람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사뭇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했다. “제가 이런 자리에서 인터뷰를 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멋쩍은 듯 웃었다. 아들에 얽힌 19금 에피소드를 털어놓은 뒤 “아들이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후회하는 모습도, “가족에 대한 질문은 삼가달라”고 부탁해놓고는 자신이 먼저 남편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도, 가식 없이 솔직한 모습이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라미란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에서 김성균(김성균 분)의 아내이자 김정봉(안재홍 분), 김정환(류준열 분)의 엄마 라미란 역을 맡아 일명 ‘치타 여사’로 불리며 사랑받았다. 극 중 ‘전국노래자랑’ 예선에서 몸 개그를 선보이며 시청자의 배꼽을 훔치기도 했고, 여권에 적힌 영어를 읽을 줄 몰라 허탈하게 웃는 연기로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한 작품으로 그녀는 ‘라미란’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로 우뚝 섰다. 아니, ‘절대배우’에게만 주어지는 ‘갓미란’이라는 수식어도 얻었다.
“드라마 종영 후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드라마 촬영하면서는 인기를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런 자리 오니 ‘나 정말 뜬 거 맞나?(웃음)’ 싶네요. 세수도 하지 않고 동네 마실을 다니는데 많은 분이 ‘치타 여사’라고 알아봐주시더라고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당분간은 사람들의 시선도, 인기도 한번 즐겨보려고요.(웃음)”
웃음소리가 화통하다. 기분 좋다.
“<응팔>에 캐스팅됐을 때 신원호 감독님이 ‘이번 드라마는 성공하기 힘들거야’라는 말을 자주 하셔서 ‘패망’을 각오했어요. 저 빼고 다 사투리를 쓰는 현장에서 저만 서울말을 쓰니까 ‘이러다가 나만 망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많은 분이 공감해주셔서 다행이었어요. 제 ‘인생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쌍문동 골목의 안방마님 3인방(라미란, 이일화, 김선영)이 <응팔>의 헤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네 분위기를 들었다 놨다 하는 카리스마와 시청자들을 쥐락펴락하는 감정 연기가 역대급이었기 때문. 세 사람은 일명 ‘쌍문동 태티서’라 불리며 사랑받았다.
“저희 호흡요? 두말할 것도 없었죠. (이)일화 언니와 (김)선영씨를 처음 만났을 때 너무 놀랐어요. 일화 언니는 미모가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선영씨는 저보다 언니인 줄 알았고요.(웃음) 우리 셋 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금방 친해졌어요. 처음 만났을 때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엄청난 수다를 떨었죠. 다들 좋은 사람 같아서 그냥 헤어질 수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연기할 때도 아주 편했어요.”
극 중 ‘치타 여사’는 라미란의 실제와 많이 닮았다. 이웃에게 넉넉한 마음씨를 지녔으나 웃음에는 야박해 쉽게 웃지 않고, 이웃 친구인 이일화와 김선영에게 독한 말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마음을 다 주는 그녀의 성격과 비슷하다.
“캐릭터가 저와 닮았어요. 남편으로 나온 (김)성균씨가 온몸으로 개그를 할 때 정말 우스운데도 정색하는 것이 저의 평소 모습과 비슷해요. 많이 벌지 못해 많이 베풀지는 못하지만 마음만큼은 넉넉한 저의 모습을 작가님이 십분 반영해준 것 같아요.”
<응팔> 속 라미란이 실제 그녀와 닮았다면 드라마 곳곳에 숨어 있는 깨알 같은 장면들은 모두 애드리브였을까?
“저는 대본에 충실한 스타일이에요. ‘아줌마’라는 캐릭터가 원래 수다스럽고 우악스럽잖아요. 덜 우악스럽게, 시청자가 지닌 아줌마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깨보려고 했죠. 아, 이성균씨를 리얼하게 때리는 장면만큼은 애드리브였어요.(웃음)”
<응팔>을 돌이켜보면 결국엔 가족이다. 성덕선(혜리 분)의 남편 찾기, 성덕선을 둘러싼 남자들의 사랑과 우정이 극의 재미였다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한 주요 골자는 가족이었다. 기침처럼 감출 수 없는 가족 간의 사랑이 드라마의 핵심이었다.
“드라마 속 저희 가족은 큰 ‘결핍’이나 ‘슬픔’이 없는 구성원이라고 생각했어요. 큰아들 정봉이가 아프지만 복권에 당첨되면서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었으니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정이죠. 가족과 함께한 모든 장면이 기억에 남지만 감정이입이 가장 많이 된 장면은 아들에게 서운해하는 장면이었어요. 저도 아들 한 명뿐인지라 아들들이 장성해 대화가 줄어드는 장면에서 괜히 더 서운하더라고요. 진심으로 소리 질렀고 진심으로 울었죠.”
라미란은 <응팔>을 두고 “근래 보기 드문 드라마”라고 했다. 가족은 들러리가 되고 사랑 이야기가 중심인 다른 드라마들과는 달리 <응팔>은 가족의 에피소드를 늘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응팔>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다섯 가족의 이야기를 다 보여주었다는 거예요. 이집 저집, 엄마 아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몇 번씩 다시 봤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이런 드라마… 없지 않아요? 저도 처음에는 젊은 친구들이 하는 간질간질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팔순인 우리 어머니가 ‘이거 끝나면 뭐 보니’ 하며 아쉬워하시는 걸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전원일기> 같은 드라마가 필요한 시기에 적절히 등장한 드라마인 것 같아요.”
그녀가 공개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처음으로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것. “아들이 둘인 설정인데 못생겼으니 기대하지 마라”라는 신원호 감독의 말에 상심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안재홍과 류준열을 보고는 말문이 막혔단다.
“못생긴 건 못생긴 건데 저와 너무 닮은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웃음) 제가 ‘너희는 외탁했구나’라고 할 정도로요. 그런데 이 친구들, 보면 볼수록 매력 있어요. 못생긴 남자한테 빠지면 약도 없다잖아요. 저만이 아닐 거예요. 재홍이와 준열이에게 빠진 분들은 아마도 쉽게 헤어나오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일까? 라미란의 아들 자랑이 시작됐다. 혼자만 짝사랑하다 끝나버린 김정환의 사랑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겠단다. 바둑밖에 모르는 최택(박보검 분)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남 정환이가 낫지 않으냐며.
“배우 선배로서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던 정환이에게 얼른 빠져나오라고 해주고 싶어요. 인기나 관심은 금방 수그러드니까 빨리 다음 작품을 준비하라고도 해주고 싶고요. 이제 시작하는 친구니까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만나 한 뼘씩 더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목소리에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다음 시즌의 <응답하라>시리즈도 궁금해진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또 출연할 계획이 있느냐고요? 아마 감독님이 안 불러주실 거예요. 만약에 또 출연한다면 ‘라미란의 남편 찾기’는 어떨까요?(웃음)”
3년 전과 똑같다. “김수현씨나 이민호씨처럼 훈훈하고 어린! 남자 배우들과 멜로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그녀다. 작품 속 진한 멜로를 꿈꾸는 것도 여전했다.
“제가 그랬었나요?(웃음) 제가 말하는 멜로는 선남선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건 이미 물 건너갔죠. 저처럼 나이 먹은 여자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젊은 남자 배우와 연기하고 싶다고 한 건 균형 때문이었어요. 저도 평범한데 평범한 남자랑 연기하면 그냥 아줌마 아저씨 같을 테니까요.(웃음)”
이쯤에서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자. 줄곧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주인공 금자(이영애 분)의 교도소 동기 역을 맡아 대중과 만났다. 이후 <박쥐> <괴물> 등에 잇따라 출연했고, 드라마 <신데렐라맨>을 시작으로 <짝패> <막돼먹은 영애씨> 등에 출연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재미있는 건 장르와 캐릭터를 불문하고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는 거다. 작품을 고르지 않았던 그녀는 매년 두 작품 이상씩 출연하면서 얼굴과 이름을 알리는 데 집중해왔다.
“일을 꾸준히, 많이 하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다음 작품이 언제 들어올까 하며 걱정하던 날들, 일한 날보다 집에서 쉰 날이 더 많던 시기를 생각하면서 바쁜 지금에 눈물나도록 감사합니다. 배우는 연기를 해야 배우이니까요. 물론 저를 질린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그러니까 더 열심히 연구해야죠. 저에게 쉼은 없을 거예요. 제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더 열심히 할 거예요.”
라미란은 지금의 인기가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단다. <응팔>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해서 착각이나 교만, 자만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는 것.
“‘반짝’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흥행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죠. 배우는 제 직업일 뿐이고 제가 하는 일은 연기이니까요. 오히려 인기를 얻은 지금은 한 치 앞을 모르는 내일이 더 불안하죠. 작은 역할을 맡아도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이 더 크고요. 솔직히 제가 톱스타가 되겠어요? 그냥 가늘고 길게 연기하는 게 제 목표예요.”
그럼에도 차기작은 당연히 부담스럽다. 가수 비와 오연서가 주인공인 SBS 드라마 <돌아와요 아저씨>에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재미있거나 눈에 띄는 역할이 아니라 혹시나 실망할 시청자의 반응이 걱정스럽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댓글을 다 확인하느라 밤을 새울 정도다.
“댓글이 5천 개가 달려도 다 읽어요.(웃음) 시청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전 대중과 호흡하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그들의 생각이 궁금하고 수용할 준비가 돼있죠. 새 드라마 속 저를 보고 실망하시면 어쩌나 걱정되지만 완급 조절을 하려고요. 작품에서 필요한 만큼만 연기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라미란이 아니라 작품 속 캐릭터로 보인다면 흥행과 상관없이 성공한 거라고 생각해요.”
라미란은 “가늘고 길게”를 강조했다. 자신만 도드라지지 않고, 송곳처럼 삐져나오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생활 연기를 하는 게 배우로서 자신이 부리는 단 하나의 욕심이라고 했다.
“배우보다 재미있는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볼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죠. 제가 언제 히말라야에 가보겠으며, 언제 훈훈한 젊은 배우들과 이야기해볼 수 있겠어요. 평범한 주부인 제가 배우로 살면서 대리만족을 하고 있죠. 그래서 말인데요. 저는 주연이나 조연, 단역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꼭 지켜봐주세요.”
멋지다. 스스로를 다독일 줄 아는 여배우 라미란. 멋있다! 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