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은 된 것 같아요. 이렇게 화려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게. 근데 오늘 입은 옷, 나이에 비해 너무 철없어 보인 건 아니에요?”
고개만 틀어도 그림 같고 세월의 흔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촬영 현장에 있는 스태프 중 화려하게 단장한 그녀를 어색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정선경 본인만이 평소와 다른 자신의 모습을 쑥스러워했다. 손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23년 차 여배우의 푸념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잠시 떠나 있던 시간의 틈이 느껴졌다.
“한창 활동할 때는 한 달에 몇 번씩 화보도 찍고 그랬는데, 그때는 그걸 어떻게 다 소화했나 싶어요. 오늘 촬영하면서 데뷔 초창기 때 생각이 많이 났어요. 그런데 나 정말 나이 들긴 했나봐 자꾸 옛날 얘기만 하고 있잖아!(웃음)”
특유의 차분하고 느릿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간 브라운관에서 자주 보지 못했던 아쉬움과 반가운 마음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1994년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데뷔한 정선경은 이듬해 SBS 드라마 <장희빈>에서 전인화, 김혜수의 뒤를 이어 역대 여섯 번째 장희빈을 연기하며 톱 여배우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KBS2 <파랑새는 있다>의 여주인공으로 인기의 정점을 찍었고, 박중훈과 함께 출연한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와 <개같은 날의 오후>를 통해 톡톡 튀는 신세대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이후에도 꾸준하게 활동을 이어가던 그녀는 2007년 결혼과 동시에 일본으로 떠나며 배우로서의 삶을 내려놓고 평범한 여자로 살았다.
“재일교포인 신랑이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신혼살림을 차리게 됐어요. 그러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아내 그리고 엄마로 사느라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죠. 자연스럽게 활동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당시에는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가정에 충실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도 했고요.”
오사카에서 5년, 도쿄에서 2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둘이었던 부부는 선물 같은 두 딸을 낳아 네 식구가 됐다. 평범한 회사원인 남편과 8평짜리 회사 사택에서 시작한 일본 생활.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 기간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해외에 사는 게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는데, 저는 나름대로 꽤 잘 지냈어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터라 당시에는 좀 지쳐 있었거든요. 일도 힘들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힘들던 중에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된 거예요.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추리닝 차림에 민낯으로 슈퍼마켓에 가도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자유로움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도 연기에 대한 미련이나 한국에서의 안정된 삶에 대한 향수는 있었을 터. 배우 정선경이라는 이름 대신 아내와 엄마로 불리는 시간이 답답하지는 않았을까?
“서른일곱 살 무렵에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어요. 그때를 놓치면 평생 결혼을 못할 줄 알았어요. 더 이상 괜찮은 남자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죠.(웃음) 마침 그때 저희 둘이 만난 거예요. 20대 때 만났으면 서로 콧대만 높아서 인연이 못 됐을 것 같아요. 근데 세상 풍파도 좀 겪고, 그래서 상대에 대한 기대치도 낮아진 서른 후반이 되니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서로 임자 만난 거죠.(웃음) 늦게 결혼해서 10년 차 부부로 살고 있지만 아직도 행복해요. 가정이라는 튼튼한 울타리가 있어서 그런지 배우로만 살던 지난날이 그립지는 않아요. 연기가 하고 싶을 때나 좋은 배역이 주어지면 간간이 한국에 들어와서 작품을 하기도 했고요.”
해외에서 한국에 들어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촬영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요즘 작품 선택에 더욱 신중을 기한다는 정선경. 이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이 있으니, 바로 7월 방송 예정인 김우빈·수지 주연의 KBS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다. 사전 제작 드라마라 요즘 한창 촬영 중이라고.
“공중파 드라마를 안 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랑 오래 일한 매니저가 대본이 너무 좋으니 한번 읽어보라고 주더라고요. 알고 보니 작가님이 10여년 전에 함께 단막극을 했던 분이었어요. 역할이 크지는 않지만 제가 좋아하는 내용이라 흔쾌히 합류하기로 했지요.”
3년 전 일본에서 해외 지사로 파견근무를 나온 남편을 따라 온 가족이 싱가포르로 이사를 왔다는 정선경. 그녀는 싱가포르에 있는 집과 일터인 한국을 오가며 작품에 열정을 쏟고 있다.
“제 역할이 한 회에 한두 신밖에 되질 않아 한 달 정도 몰아 찍으면 되겠거니 했는데, 벌써 4개월째 싱가포르와 한국을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드라마를 찍다가 며칠만 일정이 비어도 아이들이 보고 싶어 싱가포르에 다녀오곤 해요. 아마 이번 드라마 출연료는 대부분 비행기 티켓값으로 쓰이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 돈 생각 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려고 해요.”
그녀는 요즘 다시 연기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한창 연기에 물이 올랐던 20대, 그 시절 만끽했던 배우로서의 카타르시스가 아직도 느껴진다는 그녀는 천생 배우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 같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예전에 연기할 때 들었던 마음,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게 느껴져요. ‘이래서 내가 미친 듯이 연기를 사랑했었지…’하는. 잊고 있던 열정을 깨달으면서 또 다른 삶을 사는 기분이 들어요. 좋은 스태프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도 즐겁고요.”
전성기 시절처럼 일일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할 따름이라는 그녀는 3월 개봉 예정인 영화 <남과 여>에도 얼굴을 비칠 예정이다. “전도연씨의 언니 역할로 출연해요. ‘정선경이 거기 나왔어?’라고 되묻지 않으시려면 눈 크게 뜨고 잘 찾아보셔야 할 거예요. 좋은 작품이라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돼요.” 그녀가 배우 정선경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가족들에게는 곧 엄마의 부재를 의미하기에, 배우의 시간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그녀는 그래서 더욱 충실하고 살뜰하게 두 딸 그리고 남편을 챙긴다.
“며칠씩 자리 비우는 게 미안해서 요즘 식구들을 더 신경 쓰고 챙기게 돼요. 가끔 떨어져 있다 보니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히 느끼는 것 같아요. 결혼 10년쯤 되면 남편이 미워 보일 법도 한데 아직도 애틋하네요.” 하지만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홉 살, 일곱 살의 딸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은 그녀가 연기를 하며 가장 괴로운 점이다.
“둘째까지 학교에 들어가면 앞으로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며 일하기가 더 어려워질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한국에 와서 하루만 아이들과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어 전전긍긍하는데, 정작 아이들은 안 그런것 같아요. 동네 아줌마들의 증언에 따르면 엄마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너무 밝게 잘 지낸다는 거예요.(웃음)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앞으로도 다작을 하는 배우는 못 되겠죠? 대신 정말 좋은 작품이 있을 때 좋은 연기로 보내주신 사랑에 보답할게요.”
아직 엄마의 직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 마냥 아기 같다는 일곱 살 난 둘째는 “엄마네 회사는 텔레비전 뒤에 있는 구멍이랑 연결돼 있는 거지? 그래서 엄마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 아니야?”라는 발랄한 질문으로 엄마를 웃게 한다.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이 귀여운 딸들과 보내는 그녀의 일상을 들어봤다.
“제 기상 시간은 새벽 여섯 시예요. 첫째 깨워서 아침 먹이고, 도시락 싸서 스쿨버스 태워 보내고 돌아오면 7시. 다시 둘째 깨워서 유치원 보내고 나면 8시가 돼요. 그리고 오전에는 영어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요. 집안일 좀 하고 있으면 둘째가 오고 첫째가 오고 그리고 남편이 오죠. 제 일상은 전쟁터예요. 촬영하는 것보다 더 빠듯한걸요.”
이렇게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연예인들이 모여 만든 봉사 단체 ‘따사모’ 활동에도 열심히다. 몇 주 전에는 그녀가 안재욱, 소유진, 최정원, 김정은 등 따사모 회원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사진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따사모 친구들을 만났어요. 제가 한국을 떠나 있으니까 봉사활동에 직접 참여하기는 어렵거든요. 대신 일 년에 두 번 바자회 할 때마다 물품을 보내고, 회비를 모아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하곤 해요. 저희가 20~30대 때 만나서 함께한 지 12년 정도 됐는데 어느덧 다들 40대가 됐어요.” 멤버들이 나이가 든 만큼 대화 주제도 바뀌었다. 대부분 엄마, 아빠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육아 지식의 토론장이 되기도 한다고.
“만년 총각일 줄 알았던 안재욱씨도 결혼해서 아빠가 되고 이제 다들 부모가 돼서, 어디 기저귀가 뭐가 좋고 물티슈는 뭘 써야 하고 이런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지난 모임 때 멤버들 대화 내용을 듣고 있자니 ‘세월이 언제 이렇게나 흘렀지’ 싶었죠.” 하지만 그녀는 세월이 흘러도 지난 시간을 잡으려 하기보다는 현재에 만족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말 중에 ‘행복’ ‘감사’ 같은 단어가 많은 건 그런 자족의 마음과 무관하지 않다.
“저는 지난 일들은 잘 까먹어요. 그래서 나쁜 일도 빨리 훌훌 털어버리죠. 예전의 제가 어떤 배우였고, 얼마나 화려했는지 이러한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다면 주부로 사는 지금이 결코 행복하지 못했을 거예요. 지나간 걸 후회하면 제일 손해 보는 건 결국 자신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과거가 아닌 현재에 집중해서 사는 게 제 행복의 비결이죠.”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정선경은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지금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품고 있을 게 분명해 보인다. 그녀에게 나이 듦은 피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세월의 향기를 은은하게 품는 것이기에 그녀는 세월이 흐르는 게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