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준을 만난 건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tvN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이하 <치인트>)의 촬영 종료를 이틀 남긴 날 밤이었다. 그는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해 있었고, 기자를 살갑게 맞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잘생겼다’는 것. 흰 피부는 모성 본능을 자극했고, 살짝 찢어진 눈매와 브라운 아이즈가 매력적이었으며, 고개를 젖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키는 기자를 ‘심쿵’하게 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기자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하는 서강준을 보고 있노라니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 같았다.
어제도 촬영, 오늘도 촬영, 내일도 촬영이라며 소소한 일상을 털어놓는 서강준에게서 오래 만난 친구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이 풍겼다. 기자와의 술자리에서도 스스럼없이 말하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말실수를 할까 봐 형식적인 이야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느끼는 대로 털어놓는다고 했다. 진심이 담긴 말과 행동은 누구에게나 통하지 않겠느냐며.
서강준은 <치인트>에서 방황하는 천재 피아니스트 백인호 역을 맡았다. 겉으로는 거칠고 날카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여린 심성을 지닌 그는 짝사랑하는 홍설(김고은 분)이 힘들어할 때면 어디선가 나타나 비타민 같은 미소를 선사하는 ‘키다리 아저씨’ 캐릭터다. 조별 과제에 무임승차해 동기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에게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백인호는 ‘사이다 캐릭터’로도 통했다.
“이제 이틀만 촬영하면 <치인트> 촬영은 끝나요. 현장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끝나는 게 되게 아쉬워요. 이윤정 감독님께 계속 아쉽다고 하니까 짠해하시더라고요. 함께 연기해온 배우들, 같이 호흡한 스태프들과 만나지 못한다는 게 서운하달까요? 거짓말이 아니라 <치인트>처럼 화목하고 분위기 좋은 현장은 없었던 것 같아요.”
서강준의 연기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도 좋았다. 언론의 평가 역시 긍정적이었다. 전작 <화정>에서 얻은 연기력 논란을 보란 듯이 깨부수고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한 셈이다. “사실 <화정>은 어려웠어요. 변명 같지만 어린 나이에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죠. 캐릭터를 분석하고 대본을 이해하기에 제 삶의 경험이 충분치 않았다고 할까요. ‘내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치인트>에 출연했는데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은 것 같아요.”
사실 연기력 논란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었다. 그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명 ‘치어머니(웹툰 <치인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들의 반대가 심했다. 원작의 골수 팬들은 시청 거부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초반에는 ‘치어머니’들의 반응이 무서웠어요. ‘쟤가 왜 백인호야?’ ‘<화정>에서 연기하는 거 못 봤어?’ 등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죠.
혹평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 반응을 불식시킬 자신이 안 생기더라고요. 소심하고 내성적인 제가 백인호를 잘 그려낼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어요.” 시간을 돌이켜보던 서강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 쏟아지는 ‘악플’에 정신력이 무너져 내리던 그날을 회상하며 그는 ‘상처’였다고 말했다.
“스스로 멘탈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약하지 않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닥쳐보니 큰 상처가 되더라고요. <룸메이트> 촬영 당시에도 거침없는 말이나 행동 때문에 욕을 먹었지만 그때는 ‘부족한 건 맞지만 모르는 건 죄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컸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때와는 다른 기분이 들더라고요. 제게 연기는 직업 이상의 ‘꿈’인데 연기력에 대해 질타를 받으니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더라고요. 다시 카메라 앞에 설 용기도 사라지고요. 지난 시간은 말도 못 하게 힘든 시간이었어요.”
대중의 독설은 결과적으로 그의 성장에 자양분이 됐다. 오기와 독기로 연기 연습을 했고, 밤낮없이 캐릭터에 집중했다. 밥 먹을 때도, 잠잘 때도, 친구들과 있을 때도 온통 백인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백인호의 걸음걸이를 상상하고, 상상 속 그의 말투를 따라 해보고, 캐릭터가 풍기는 분위기를 그려봤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백인호가 탄생한 데는 배우 차승원의 영향이 컸다.
“<화정>에서 만났던 차승원 선배가 얘기해주셨어요. ‘서강준이 묻어나지 않는 캐릭터는 매력적이지 않아’라고요. 어떤 캐릭터든 그 안에 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 말씀을 듣고 제가 백인호처럼 욱할 때 어떤지, 백인호처럼 말할 때는 어떤지를 곰곰이 생각해봤죠. 저는 평소에 백인호처럼 자동차 사이드미러를 발로 차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야!’라고 불러본 적도 없거든요. ‘만약 내가 화를 낸다면 어떨까?’라고 상상했죠. 최대한 저의 모습을 담아내려고 했어요.”
서강준은 그렇게 백인호에게 자신을 묻혔다. 고민하는 그에게 이윤정 감독도 손을 내밀었다. <커피프린스 1호점> <하트투하트> 등을 연출하며 따뜻하고 감성적인 드라마를 만들어온 이 감독은 서강준에게 “내려놓으라”고 조언했다. “‘치어머니’들의 관심과 기대가 있으니까 웹툰 속 캐릭터와 비슷하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죠. 제가 너무 걱정하고 고민하니까 이윤정 감독님이 ‘욕심을 내려놓고, 못해도 되고 망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좀 놀았으면 좋겠어’라고 하시더라고요. 미련도 없고 집착도 없고, 떠도는 방랑자 같은 캐릭터를 하려면 나 자신도 욕심이 많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편안하게 하려고 했어요.”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웹툰을 뛰어넘는 전개, 원작 캐릭터와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배우들, 게다가 7.2%(닐슨코리아 기준)의 높은 시청률까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을 보란 듯이 씻어내고 싶었던 서강준의 바람은 이뤄진 셈이다. 반응은 뜨겁지만 사실 그로서는 100% 만족스럽지는 않다. <화정>에서 표현해내지 못했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화정>에서 헤맸던 길을 찾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한다고 했다. 한 뼘 성장한 자신을 발견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하이킥을 날릴 때도 있었다.
“아쉬워요. 모니터를 하면 단점만 보이거든요. ‘이 장면에서는 이렇게 해볼걸’ ‘내가 왜 이렇게 연기했지?’ 하는 마음이죠. 다만 스스로를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연기를 아주 잘한 건 아니지만 열심히 했다고 저에게 칭찬해주고 싶은 그런 거요. 지금은 시청자들이 잘 봐주셔서 뿌듯해요. 마무리를 잘해야겠다는 마음이에요.”
<치인트>는 쪽대본이 난무하는 드라마 촬영 현장에 일침을 가하는 작품이다. 방송 전에 이미 많은 분량이 촬영을 마친 상태였고, 종영 한참 전에 마지막 촬영을 끝냈다. 캐릭터와 대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가능한, 배우들에게는 꿈같은 시스템이다. 시간의 제약 없이 마음껏 연기했던 촬영 현장을 생각하는 서강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사전 제작 드라마가 정말 좋더라고요. 촬영 중에 누구든 ‘다시 한 번만 촬영하고 싶습니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이에요. 찍다가 마음에 안 들면 ‘감독님 다시 한 번만 할게요’라고 말씀드릴 수 있으니까 좀 부족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별로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아요.” 고민할 시간이 많다는 장점이 있는 것과 동시에 시간적 여유가 많아 현재의 감정이 깨지기 쉽다는 단점도 있다.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스토리의 완급 조절이 가능한 기존 방식에 비하면 장면을 되돌릴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아직까지 신인인 서강준에게는 그것도 결코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런 점이 딱 하나 아쉬운 부분이에요. 하지만 그건 작은 부분이고 그 외에는 모두 좋은 점이죠. 사전 제작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공간 초월 촬영 기법, 그러니까 오늘은 1회를, 내일은 4회를 찍는 식의 촬영 방식 때문에 갈피를 못 잡았던 부분은 아쉽지만요.” 진지하게 말하던 서강준이 잠시 멈칫했다. 사전 제작 시스템이라서 가장 수혜를 본 사람이 자신이라면 가장 큰 피해를 본 이는 이성경이었을 거라고 안타까워했다. 드라마에 녹아들지 못하고 튀기만 한 탓에 시청자로부터 뭇매를 맞은 이성경. 대중의 반응에 따라 인물의 성격을 조율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글쎄요. 아마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다고 해도 백인하 캐릭터는 지금과 같았을 거예요. 웹툰 속 백인하는 속된 말로 미친 여자 캐릭터거든요. 성경 누나는 그걸 십분 살려주고 있는 거죠. 만화 속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성경 누나가 만드는 백인하가 매력적이에요. 아마 시청자들도 방송 후반으로 갈수록 백인하에게 빠져들 거예요.”
서강준이 말하는 이성경은 자유분방하다. 노래와 춤 실력이 출중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도 많다. 알다가도 모를 성격이지만 오래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녀의 속 깊음에 놀라곤 한다고. 이성경에 대한 칭찬에 침이 마를 새가 없는 그의 모습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극 중 라이벌로 나온 박해진은 어떤 사람일까?
“정말 친구 같아요.(웃음) 워낙 선배님이라 처음에는 연예인 보는 느낌이었죠. 그런데 처음 만나서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대사를 주고받으니까 열 살 터울도 사라지고 정말 친구 같았어요. 그리고 사실 외적으로도 제가 성숙하잖아요.(웃음)”
대화 중간중간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오갔다. “서강준에게 사랑이란?”이라는 돌발 질문에는 “사랑은 어려운 거다. 아무리 해봐도 모르는 게 사랑이다”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열혈 청년임에 틀림없었다.
“제가 올해 스물네 살이에요. 작품으로나 배우로서나 더 큰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작품을 대하건, 사람을 대하건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중심이 나의 가장 큰 가치가 되면 좋겠어요.”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져 내린 지난 시간을 뒤로하고 단단해져 돌아온 서강준이 펼칠 내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