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촬영은 오후 3시부터였다. 그런데 오후 2시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자님, 호란입니다!” 씩씩한 목소리에 당황했다. 시간이 잘못 전달돼 그녀가 한 시간 일찍 도착한 것이다. “괜찮아요. 근처 카페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기자님도 서두르지 말고 오세요.” 영하 10℃의 날씨에 얼굴이 빨개진 호란이 촬영 장소로 뛰어 들어왔다. “귀가 떨어질 것처럼 추운 날이네요. 그런데 우리 오늘 야외 촬영하는 건가요?”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해방촌의 와인 바 옥상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살을 베는 듯한 칼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나부꼈지만 호란은 유쾌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만나던 모습 그대로였다.
“처음에 라디오 DJ를 제안받았을 때 엄청 고민했어요. 아침 7시 방송이라니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싶었죠.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야 하니 아무리 늦어도 새벽 1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해요. 그렇게 되니 저절로 술 약속을 안 잡게 되더라고요. 스트레스 받으면 술을 마시며 푸는 스타일인데 말예요. 일주일에 여덟 번은 먹었을걸요? 그런데 이젠 그렇게 못해요.(웃음)”
가수들은 매일 출퇴근하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호란이 진행하는 라디오는 일주일에 6일 매일 아침 7시마다 생방송을 한다. 남들 출근할 때 집을 나서는 것은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이다. 그렇다 보니 힘들긴 해도 하루를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호란의 일상은 라디오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라디오가 사람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어요. 듣는 사람은 그냥 흘려 넘기겠지 싶었거든요. 근데 별것도 아닌 내 이야기에 고맙다는 피드백이 와서 놀랐어요. 페이스북 쪽지로도 많은 인사를 받았죠. 착한 분이 정말 많아요. 제 멘트가 뭐라고 그렇게 즐거워하고 고마워하는 거죠?(웃음)”
‘지각하면 어떡하지?’ 하며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진행해 온게 벌써 1년 반이 됐다. 그리고 라디오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졌다. “안 잘렸으면 좋겠어요.(웃음) 라디오 그만두면 많이 힘들 것 같거든요. 아침을 여는 라디오의 DJ는 은근히 자부심이 생기는 자리거든요. 청취자들이랑 같이 출근하면서 ‘ 출근하는데 길이 너무 막히더라고요’라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세요?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귀한 경험이에요.”
라디오 이야기를 하는 내내 호란의 표정은 환했다. 요즘 그녀는 오랜 침체기 뒤에 찾아온 행복을 누리는 중이다. 얼마 전엔 모노드라마 형식의 음악극인 <천변살롱>에서 주인공 ‘모단’ 역으로 열연을 펼쳤다. 2008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는 이 작품은 만요(익살과 해학을 담은 우스개 노래)를 중심으로 트로트, 신민요까지 15곡의 노래와 함께 노랫말에 맞는 상황을 끼워넣어 한 편의 이야기로 꾸며졌다. 배우 황석정과 함께 더블 캐스팅된 그녀는 연기 경험이 거의 없음에도 무대를 장악하는 능력을 보여주며 호평을 받았다.
“원래 연기에 관심이 많았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2009년 무렵 이런저런 제의가 들어오긴 했죠. 실제로 미니시리즈 한 편도 찍었고요. 그러다 덜컥 겁이 났어요.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분야인데 내가 과연 발전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게다가 제가 몸담았던 소속사도 음악인 중심 기획사였고요. 맨땅에 헤딩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란 생각에 마음을 접었죠. 그렇지만 욕구는 마음속에 늘 있었어요. ‘내 인생의 지나간 기회다. 연기를 하려면 좀 더 어린 나이에 진작 시작해야 했어’라며 애써 마음을 잡았죠.”
그러다 <천변살롱>의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 ‘음악극이니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고민 끝에 수락했다. 결과적으로는 만족한다. 연기에 대해 조금이나마 귀띔으로 듣고 어떻게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계기였기 때문이다. <천변살롱>의 제작진은 “호란은 가수라고 하기엔 연기를 너무나 잘한다”라며 극찬했다. 호란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좋게 말씀해주신 거죠. 악극 연기는 정극 연기랑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맡은 캐릭터를 새롭게 창조하기보다는 저와 겹치는 부분을 찾아 제 이야기를 녹여내려고 했어요. 저는 공연 경험이 많은 사람이니, 아무래도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많잖아요. 완전히 몰두해 뭔가를 만들어낸 경험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참 상쾌했어요.”
호란은 명쾌하고 정돈된 목소리와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말했다. 완결되지 않은 문장이 없고, 우물쭈물함이 없다. 호란답다. “실제로 저를 만나본 분들은 ‘어쩜, 생각보다 헐렁하시네요’라고 말하죠. 잘하는 게 별로 없어요. 다만 언어 쪽에는 관심이 많아요. 글을 쓰고 말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훈련이 된 편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말을 잘하면 다 잘하는 줄 알더라고요. 말 잘하는 이미지 덕 좀 봤다고 할 수 있죠.(웃음)”
호란은 유독 여자 팬이 많은 가수다. ‘여자들이 동경하는 여자’. 물론 감사하지만 그녀는 때로 그 이미지가 버겁다고 했다. 그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책임질 것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 예로 그녀는 “호란은 음악을 잘해”라는 말이 부담스럽단다.
“지난해 5월에야 비로소 제 미니 솔로 앨범이 나온걸요. ‘호란이 음악 잘한다’는 이미지는 제가 ‘클래지콰이’에 있을 때 생긴 거예요. 그룹이 좋은 평가를 얻었으니 보컬인 저까지 묶여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뿐이죠. 제 음악적인 한계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아요. 지금 저는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요.” 듣는 사람이 의아할 정도로 호란은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음악적 역량에 대한 평론은 차치하고라도 그녀는 감미롭고 듣기 좋은 노래를 불러왔고 나름의 팬층도 거느린 뮤지션인데 말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제가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책임이 생기는 게 싫었어요.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해 채워나갈 것을 고민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만든 이미지 때문에 ‘호란은 음악 잘해’ ‘아니야. 호란은 완전 거품이야’라고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어요. 운 좋게 뮤지션 이미지를 덧입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있지만 무거운 짐이기도 했어요. 한동안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결론을 얻었죠. 그저 지금은 묵묵히 실력을 쌓아나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요.”
호란은 담담하게 자신에게 열등감이 많음을 인정했다. 언제나 당당해 보이는 그녀에게 ‘콤플렉스’라는 단어는 왠지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저 콤플렉스 덩어리예요. 겉으로 강해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더 그런 경우가 많아요. ‘내가 존재 가치가 있는 가수일까?’ ‘계속 음악을 해도 되는 걸까?’ ‘내가 무엇을 증명하고 있기는 한 걸까?’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괴로워하던 때가 있어요. 위험한 시기였죠. 이런 질문에 매몰될수록 분노가 쌓이고 나중에는 엇나가겠더라고요.”
지병도 없고 건강한 몸을 가졌지만 멘탈이 엄청 약하다고 하며 호란은 웃었다.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이 찾아오면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댄다고 했다. 과거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좋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했다. 2013년에 결혼한 그녀의 남편도 그런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좋았어요. 하지만 정신적인 슬럼프는 제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대신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긴 슬럼프를 보내며 남편을 만나 자칫 음악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죠.”
그럼에도 호란은 결혼을 통해 많이 바뀌었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음악관이나 인생관이 아니라 ‘SNS관’이란다.
“SNS는 하나의 광장이라고 생각했어요. 네티즌이 보러오는 광장. 나만의 사적인 공간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싶지는 않았어요. 내가 어떤 이야기를 적어 누군가가 날 싫어하게 된다면 그건 받아들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한 거죠. 누가 날 싫어할 자유가 있는 것처럼 나도 내가 할 말을 다할 자유를 누리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왜 공인이 할 말 다하고 사느냐?’는 말에도 반박했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내 주변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결혼 전에는 참 혈기왕성하고 날이 서 있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한 대상을 향해 바로 비판하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결혼 후 그녀는 ‘정면 돌파’만이 효과적인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부드럽고 간접적인 방식도 때로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라디오 때문에 이제 술을 마실 수 없는 그녀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다른 방법은 또 없느냐고 물으니 ‘만화’라는 답이 돌아왔다.“만화를 정말 좋아해요. 요즘은 웹툰을 특히 많이 보죠. 일단 포털 사이트별로 좋아하는 웹툰이 요일마다 있고요, 유료로 운영하는 사이트에서도 많이 봤어요. 제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그런지 고양이를 사랑스럽게 그린 웹툰을 보면 절로 맘이 가더라고요. 오늘 아침에도 재미있는 웹툰을 하나 봤는데, 잠깐만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과연 소문난 만화 마니아답게 그녀는 작품과 작가의 이름을 줄줄 외우며 소개하기 시작했다. 명료한 음성과 어휘로 만화의 전체적인 주제와 대략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걸 들으니 꼭 그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 걸 느꼈다.
그녀가 목소리로 출연한 ‘아이폰 TV 광고’가 겹쳐 들렸다. 전문 성우가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명료한 톤과 세련된 그녀의 목소리에 많은 이들이 ‘최고’라는 반응을 보였다. 신뢰를 주는 목소리, 그 자체랄까? “저도 워낙 그 폰을 좋아해 기쁜 마음으로 임했죠. 주변 분들도 다 엄청 좋게 피드백해주시더라고요. 남편은 ‘가문의 영광’이라고까지 말하던데요?(웃음)”
그녀에게 어떤 뮤지션으로 남고 싶으냐고 물었다. “어떤 뮤지션이오? 저는 뮤지션 그 자체로 남고 싶은데요? 제가 지금 음악을 그만두면 ‘뮤지션이었던 사람’으로 남겠죠. 그런 건 싫어요. ‘지금 뮤지션인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들으시는 분은 웃으시겠지만 제겐 꽤나 절박한 문제랍니다.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뮤지션으로 남고 싶거든요. ‘어떤’ 뮤지션이냐는 그다음 문제예요. 잘해낼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묵묵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거예요”
이달의 라디오 스타
SBS 파워FM 107.7MHz
<호란의 파워 FM> 월~일요일오전 07:00~09:00 radio.sbs.co.kr/power_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