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이며, 땀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배우 공형진은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sbs 드라마 <애인있어요>에서 연기하고 있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남자 ‘민태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채널A <풍문으로 들었쇼>의 ‘깨방정스러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각설하고, 공형진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터벅터벅 들어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그의 큰 키에 놀랐고, 생각보다 다부진 체격에 또 한 번 놀랐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면서도 말 속에 따뜻함이 묻어 있는 반전 매력은 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배우로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일 게다.
공형진에게 ‘배우’라는 타이틀은 삶 자체다. 운명에 이끌려 배우가 됐고, 단순히 연기가 좋아서 힘들어도 버텼다. 어떤 역할도 소화할 수 있는 천의 얼굴을 가진 그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라면 그게 무엇이라도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했다.
“연기요? 세상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것 중 하나예요. <애인있어요>에서 대놓고 악역인 인물을 맡았는데 배우 생활 25년 중 처음 만나는 캐릭터라서 재미있죠. 사람들이 ‘민태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욕을 하더라도 저는 굉장한 연민을 느껴요.”
최근에는 7년 동안 진행해온 라디오 프로그램의 DJ석에서 내려왔다. 오랜 시간 마음을 주고 진행했던 터라 마지막 방송에서 숨이 멎을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셀러브리티와 현직 기자가 연예가 뒷 이야기를 나누는 <풍문으로 들었쇼>의 MC를 맡아 시청자와 만나고 있다. 드러나는 삶을 사는 연예인으로서 동료 연예인의 뒷담화를 하는 게 부담일 수도 있을 터. 공형진에게 연예 정보 프로그램의 MC는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TV조선 개국 프로그램인 <연예 in TV>의 MC를 맡았었어요. 한 번 경험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죠. 물론 스타의 안 좋은 이야기를 할 때는 힘들기도 하고 심적으로 불편하기도 해요. 친분이 있는 동료 배우들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는 더욱 그렇죠. 되도록 개인적 감정을 넣지 않으려고 하고 있어요.”
취재원을 보호해야 하느냐, 혹은 국민의 알권리를 대변해야 하느냐의 중간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기자들과 같았다. 공형진은 자신의 사생활을 사수해야 하느냐, 혹은 사랑해주는 대중과 공유해야 하느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25년 차 베테랑 배우도 피해 갈 수 없는 숙제 같은 거였다.
“힘들죠. 내가 원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삶이니까요. 그래도 제가 선택한 길인데 어떡해요. 감수해야죠.”
최근에는 ‘세금 체납’으로 자택이 경매에 붙여지는 등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철저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단순한 일인데도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중이 만들어낸 논란의 도마 위에 앉았다. 한 면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상처받았지만 ‘관심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지난 3년 동안 개인적으로 일이 많았어요. 처가의 일로 힘들어하기도 했고요. 처남의 실수로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을 수습하느라 세무와 관련된 제 개인적인 일들을 보지 못했죠. 기사가 나간 후 종로세무서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요. 악의적인 보도를 그냥 둘 거냐고 묻더라고요. 종로 일일 세무서장까지 했던 제가 상습 체납이라뇨. 세무서 담당자가 되레 펄쩍 뛰더라고요. 데뷔 후 지금까지 한 번도 구설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힘든 시간이었는데 ‘이것도 대중의 관심이다’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지금은 완벽하게 다 해결된 상태고요.”
그 사이 이수만 대표의 권유로 손을 잡았던 SM엔터테인먼트와 결별해 새 둥지를 틀었다. 소속 연기자와의 계약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했던 SM엔터테인먼트가 공형진의 손을 놔주었다는 소식에 업계에서는 다소 충격적인 이적이라며 놀라워했다.
“제 선택이었고, 어떠한 분쟁도 없이 잘 나왔어요. 그 뒤 지금 소속사를 만났고, 개인적인 일들을 해결하느라 멀리했던 본업에 충실하고 있어요. 힘든 시간이 있어야 좋은 시간도 오는 건가 봐요. 일과 가정 모두 안정을 찾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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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형진은 종종 지난 시간을 반성했다. ‘공형진이 나오는 영화’와 ‘안 나오는 영화’로 구분되던 시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콧대가 지금의 이런 시련을 가져다준 것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속된 말로 ‘꼴값’ 떨었었죠. 내가 없으면 영화판이 안 돌아가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다행인 건 이제라도 깨우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시련과 상처가 가르침을 가져다준 것 같아요. 인생의 ‘인’ 자도 모른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는데 말예요.”
그는 ‘사필귀정’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든 결국 옳은 이치대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부끄러움 없이 살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왜곡하는 사람들은 분명 죄값을 돌려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고 나서 인생의 교훈을 얻었어요. 앞으로는 잘될 일밖에 안 남았어요.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 거고요. 아들에게 존경받는 아빠가 될 거고, 아내에게 당당한 남편이 될 거예요. 부모님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고자 하고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공형진의 여린 면모가 느껴졌다. 브라운관을 통해서 보던 강하고 단단한 모습보다는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순박하고 여린 성격이 도드라졌다. 그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의리파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파였다.
“그동안 유쾌하고 강한 역할을 많이 해서 ‘상남자’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저 되게 섬세한 남자예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울 정도로 눈물이 많죠. 잔정도 많고 은근히 애교도 많아요.(웃음)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친해지기가 쉽지는 않지만 ‘내 사람이다’ 생각하면 앞뒤 안 가리고 다 퍼주는 성격이랄까요.”
공형진은 검소하다. 13년째 차 한 번 바꾸지 않았을 정도다. 값비싼 명품에는 관심조차 없다. 자신을 치장하는 데 돈을 쓰기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한턱’ 쏘는 걸 좋아한다.
“제가 돈을 버는 이유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예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고, 언제든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건 약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유연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도 있지만 결코 후회하지는 않아요. 이런 천성을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고 손해도 보지만 그런 손해라면 감수할 수 있어요. 온전히 제 몫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일까. 그의 주위엔 늘 사람이 많다. 그와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동안 그의 휴대폰은 쉼 없이 울렸다. 공형진의 한마디에 행동을 개시하는 후배들이 줄을 서 있고, 전화 한 통에 달려와주는 선배들이 손발을 다 합쳐도 셀 수 없을 정도다. 그의 곁이 따뜻하다는 증거다.
“사람들이 종종 인맥의 비결을 물어봐요. 저는 진심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에요. ‘나보다 더 유명하니까 친해져야지’ 하는 얍삽한 생각이 없죠. 진정성과 코드만 통하면 그때부턴 다 친구예요. 앞뒤 안 재고 잘해주죠. 다만 한 가지, 친할수록 더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어요. 그래서 더 오래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공형진은 말 끝에 ‘부모님’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 말로 ‘치맛바람 1세대’인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서울 명문고에 진학했다. “까부는 놈이 공부도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게 죽기보다 싫어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고, 공부도 썩 잘했다. 그러다가 운명처럼 연기를 알게 됐다. 연세대학교에 진학하길 바랐던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이었다.
“저는 하고 싶은 건 해야 하고, 꼭 이뤄내야 하는 성격이에요. 싫은 건 절대 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죠. 수학은 절대 공부하지 않았으니까요.(웃음) 대학진학을 고민할 때 부모님에게 연영과에 가서 연출을 전공해 교수가 되겠다고 했어요. 부모님 역시 강압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저를 믿어주셨어요. 아버지가 열흘 동안 고민하신 것 빼고는 별문제 없었어요.”
따뜻한 어머니 밑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강한 아버지 밑에서 정의롭게 사는 법을 배웠다. 공형진이 공형진일 수 있었던 것, 부모님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귀여운 우리 엄마가 좋은 곳으로 가셨네’ 하면서 편히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패닉에 빠질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거든요. 제일 무섭고 제일 사랑하는 분이죠. 제 인격 형성의 주축이었고, 범접할 수 없는 큰 산 같은 분이세요.”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일까. 공형진은 친구 같은 아빠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애지중지하다 보니 아내의 귀여운 질투를 받기도 한다.
“한번은 아들을 크게 혼낸 적이 있어요. 뒤돌아 생각해보니 ‘교육’이 아니라 제 화를 못 이긴 거였더라고요. 그 후로는 엄하게 다스리지 않아요. 제가 아들에게 바라는 건 딱 두 가지예요. ‘인사 잘해라’ ‘존댓말 해라’요. 다행히 아들도 제 교육 방식을 잘 따르고요.”
아내는 친하게 지내던 형의 애인의 친구였다. 한양대학교 퀸카였던 아내의 높은 콧대를 누르겠다고 장난 삼아 시작한 내기가 결국 사랑이 됐다. 그리고 그는 19년째 한 여자와 한 이불을 덮고 있다.
“이건 비밀인데요, 제 와이프는 웬만한 남자는 못 이기는 여자예요.(웃음) 외모는 예쁜데 성격이 굉장해요. 아직도 손을 잡고 다니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결혼하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막상 해보니 장난이 아니더라고요.(웃음) 19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서로를 알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혹은 결혼을 앞둔 사람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어요. 결혼은 장난이 아니다!”
공형진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희로애락을 오갔다. 속내를 숨기지 않았고 가식 떨지 않았다. 허심탄회한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지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소회가 어떤가요?” 돌아오는 대답 역시 공형진답다.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을 느낀 한 해였어요. 저 자신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해라고 할까요.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고 싶지 않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침서를 마련한 것 같아 든든해요. 2016년요? 사통팔달로 잘될 거예요. 가정도 더 단단해질 거고, 일적으로도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업을 준비 중인데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내년이 공형진 성공의 원년이 되기를 기대해요.”
눈물과 웃음, 회한이 공존했던 그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진한 포옹과 함께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이 나무라지 마라. 네가 걸어온 길이요, 어른 무시 마라. 네가 걸어갈 길이다.’ 제 인생의 모토예요. 제가 걸어온 길은 떳떳했고 앞으로 걸어갈 길 역시 당당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