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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란이라고 전해라

그저 운 좋게 하루아침에 트로트계의 신데렐라로 등극한 게 아니다. 직접 만나본 이애란은 ‘오늘’을 위해 25년을 준비해온 ‘무서운 여인’이었다.

On January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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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가 가장 잘나가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10명 중 8명 이상은 이 여인을 꼽지 않을까? 유머러스한 가사와 구수한 멜로디가 절묘하게 조합된 퓨전 트로트 곡 ‘백세인생’을 부른 가수 이애란 말이다. 지난 4월 <명품 가요쇼>에서 그녀가 ‘백세인생’을 부르는 동영상이 소위 ‘짤방(움직이는 사진)’으로 만들어져 인터넷에 올라온 것이 ‘이애란 붐’의 시작이었다. 이후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가사가 회자되며 그녀의 짤방은 일파만파 퍼졌다. MBC <무한도전>에 등장해 ‘무한도전 10주년 송’을 부르며 치솟은 주가를 증명한 그녀, 이애란을 만났다.

“어제는 게임 광고를 찍었어요. 광고 촬영은 처음이라 잘 몰랐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진행하더라고요.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촬영했어요. 제가 게임 광고를 찍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웃음)”

하긴 힘들어도 웃음이 날 만하다. 얼마 전에는 그녀의 출연료가 6배나 뛰었다는 기사도 떴지 않았나. 10대 학생들도 지나가다 이애란을 보면 “우와, 애란 언니다”라고 외친단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얼떨떨하기만 하다.

“‘백세인생’을 녹음하기 전 처음 들었을 때는 이렇게 잘되리라고 생각도 못했죠. 물론 좋은 노래라고는 생각했어요. 가사가 코믹하지만 애잔하게 슬프기도 하고, 멜로디도 쉬우면서 구수하잖아요. 딱 40대 전후 분들이 좋아하겠거니 했지요. 10~20대 분들이 제 노래 따라 부르는 광경을 보면, 꿈인가 싶어요. <무한도전>이랑 <스타킹>에 잠깐 나갔을 뿐인데 어쩜 이렇게 많이 알아봐주시는지, 그저 신기해요.”

최근 이애란은 SBS <스타킹>에 출연해 ‘백세인생’을 불렀다. 알고 보니 그녀의 20여 년 가수 인생 중 첫 공중파 완창 무대였단다.

“제가 무명 가수다 보니 남의 히트곡만 몇십 년간 불러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비로소 알겠더라고요. 무대가 작든 크든 저는 전혀 상관없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요가 아니라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을 흥얼거렸다는 이애란. 늘 노래를 벗 삼았던 그녀는 자연히 가수의 꿈을 품었다. 1990년에 드라마 <서울뚝배기> OST로 데뷔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자신의 노래로만 채워진 첫 앨범을 발매하기까지는 무려 16년이 걸렸다. 2006년에야 어렵게 1집 앨범을 내놓은 그녀.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제 힘으로 온전히 데뷔 앨범을 내려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요.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도 악착같이 조금씩 모으고 모은 돈으로 음반을 발매했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그런데 제가 참 어리석었던 게, 저는 제 노래만 나오면 바로 스타가 되는 줄 알았거든요. 모두가 제게 주목하고, 섭외하러 올 줄 알았어요. 물론 그 환상은 곧 깨졌지만요.(웃음)”

노래로 먹고살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나이가 차니 언제까지나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지방의 학교 동문회며 축제, 야시장 등을 돌며 유명 가수들의 노래를 불렀다.

“먹고사는 게 힘드니 가수를 때려치우겠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지만, 그래도 무대가 생기면 꼭 달려가 노래를 불렀어요. 당연히 돈은 많이 못 벌었죠. 교통비 정도의 금액이나 챙겨주면 운이 좋은 경우였고, 때로는 돈을 받지 못한 적도 많았어요. 지금도 그렇게 힘들게 사시는 무명 가수분이 많아요. 노래도 부르지만 가끔 무대 진행하는 사람을 못 구했다고 하면 ‘제가 해보겠다’고 나섰어요. 진행까지 하면 행사비를 좀 더 받을 수 있으니까요.”

전문가에게 노래를 교습 받고 싶은데 돈이 없어 포기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꼈을 때는 몸이 아픈데도 돈 걱정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했을 때다. 입원비는 얼마나 나올지, 검사 비용은 얼마나 될지 머리를 굴리다 보니 병원 갈 용기가 사라지더란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그녀는 노래를 놓지 않았다. 힘든 일이 있으면 산을 오르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렇듯 열정적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무대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이애란을 기특하게 생각한 선배 가수들은 그녀를 살뜰히 챙겼다고 한다. 그렇게 쌓은 평판으로 무명 가수 생활을 몇십 년간 버틸 수 있었다고. 지금 그녀에게 찾아온 행운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더 기뻐한단다. 그래도 역시 가장 기뻐하시는 분은 부모님 아니냐고 물으니 갑자기 이애란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게 올해로 12년이 되었어요. 제가 잘되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하시고 떠나셨죠. 어머니를 너무 힘들게만 해드렸어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철없는 큰딸 걱정을 얼마나 하셨을까?” 

잠시 인터뷰가 중단됐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올해 5월 10일에 96세의 나이로 제 곁을 떠나셨어요. 다행히 아버지에게는 ‘백세인생’을 들려드릴 수 있었는데, 노래를 듣자마자 참 좋아하시더라고요. ‘가사가 참 좋다, 얘야’라고 하시며 흥얼흥얼거리셨어요. 나이가 많으신데도 노래를 모두 외우시더라고요.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제가 조금씩 유명해지는 시기를 아버지께서 보셨다는 거예요.
단 몇 달이라도 기다려주셨다면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시던 공중파 방송에 큰딸이 나오는 걸 보여드릴 수 있었는데….”

부모님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녀의 인기가 수직 상승하기 시작하더란다. 더 많은 사람이 그녀를 알아보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위에서 도와주고 계시구나’라고.

“지금 생각하니 저는 참 철이 없었어요. 부모님은 그냥 돈을 어디서든 만들어 올 수 있는 분들인 줄 알았거든요. 자식이 달라는 대로 주시니까 ‘아, 말만 하면 돈이 나오는구나’ 했어요. 돌이켜보면 얼마나 죄스러운지 몰라요. 우리 부모님은 딸이 노래하는 걸 자랑스러워하셨어요. 아버지는 친구분들에게 ‘내 딸은 가수야’라고 자랑하셨는데, 한번은 친구분이 ‘그래? 무슨 노래를 불렀는데?’라고 물어보신 거예요. ‘응. 우리 딸은 아직 자기 노래는 없어’라고 웃으시면서 말끝을 얼버무리시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그때부터 언젠간 반드시 ‘내 노래’를 부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달려왔어요.”

가족은 그녀가 오랜 무명 생활을 버티게 해준 힘이다. 음악인으로 살아가는 큰딸을 걱정하면서도 든든하게 지지해준 부모님, 그리고 ‘큰언니’를 응원하는 여동생들과 조카들은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동생들도 제가 TV에 나오면 다 찾아서 보고 피드백을 해줘요. 요즘은 조카가 학교에서 칭찬을 듣거나 상장이라도 타 오면 지네 엄마한테 ‘빨리 큰 이모한테 나 장난감 사달라고 전해라~’라고 노래를 부른다는 거예요. 초등학교 2학년밖에 안 된 녀석이 센스가 남다르죠?”

이애란에게 제2의 기회를 연결해준 것도 가족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 “애란아, 너 노래 안 하니?”라고 질문하는 사촌 오빠에게 그녀는 “나 가수 때려 치웠다. 평생 남의 노래나 부르며 살아갈란다”며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사촌 오빠는 포기하지 말라며 작곡가를 한 명 소개했다. 그가 바로 ‘백세인생’을 작곡한 김종완이다. 알고 보니 이애란의 데뷔곡인 ‘서울뚝배기’ OST의 작사가였단다.

“놀라운 인연이죠? 김종완 선생님이 그 후 제게 본격적으로 노래를 가르치셨어요. 오빠 친구니까 제게 친절히 대해주겠거니 했는데 얼마나 엄격하게 가르치셨는지 몰라요. 노래 한 소절이라도 제대로 못 살리면, ‘그럴 거면 가수 때려치워라’ 하며 호되게 혼내셨어요. 요즘도 선생님께서는 ‘애란아. 너 뜬 거 아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살아라.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하세요. 제게는 무섭지만 늘 감사한 호랑이 선생님이에요.(웃음)”

‘백세인생’은 트로트와 국악이 혼합된 곡이다. 두 장르의 선을 절묘하게 지키며 구성지게 불러야 노래의 ‘맛’이 사는 탓에 음반 작업을 하는 내내 이애란은 늘 연습실에서 살았다. 그리고서 깨달았다. 멋모르던 시절 그녀가 부른 노래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노래가 제일 어려워요. 세상의 모든 가수가 저보다 노래를 잘하는 것 같거든요. 이미자 선생님이나 패티김 선생님의 노래를 들으면, 데뷔 때나 몇십 년이 흐른 지금이나 목소리가 똑같아요. 기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요. 어쩌면 저렇게 관리를 잘하신 걸까 존경스럽고 부러워요.”

이애란은 본인을 향한 “한 방에 떴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노래’를 얻기 위해 달려왔던 그 수많은 나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길고 힘들었던 과정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어떤 분들이 ‘백세인생’이 너무 떠서 후속곡에 대한 부담은 없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다음 곡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많은 분이 유명해졌다 하시지만 저는 이 노래를 더 열심히 알리고 싶어요.(웃음) 작은 무대, 큰 무대 가리지 않고 찾아주시면 열심히 부를 거예요.”

연초까지 스케줄이 꽉 들어찼지만, 돌아오는 명절에는 꼭 동생네 식구들과의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언제나 힘이 되는 가족들한테 맛있는 비싼 밥을 사주고 싶어요. 얼굴 본 지 오래된 조카들에게도 선물과 함께 덕담도 해주고요. 위에서 부모님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겠죠?”  

CREDIT INFO
취재
정지혜 기자
사진
박원민
2016년 01월
2016년 01월
취재
정지혜 기자
사진
박원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