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듣는다는 건 소설책을 읽는 것과 비슷해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들잖아요. 라디오는 소리만으로 놀라운 감동을 전할 수 있는 매체예요"
하루를 마무리할 무렵인 밤 10시. 귓가를 울리는 감동을 경험하고 싶다면 라디오를 켤 것을 권한다. 실력파 보컬 그룹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리더 가수 정엽이 최근 라디오 부스에 다시 앉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밤 10시부터 한 시간 동안 이어지는 SBS 파워FM <파워 스테이지 더 라이브>(107.7MHz)다. 앨범 작업에 집중하겠다며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지 꼬박 1년 9개월 만이다.
이번에 그가 DJ를 맡은 <파워 스테이지 더 라이브>(이하 <더 라이브>)는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과 확연히 다른 콘셉트다. 매일매일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을 초대해 스튜디오에서 한 시간가량 라이브로 공연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메인 테마다. 방송보다는 공연 위주의 활동을 이어가는 정엽에게 딱 어울리는 옷이다. 그는 지난 11월 2일 첫 방송에서 컴백 소감을 밝히며 첫 번째 초대 게스트로 자기 자신을 직접 소개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정엽의 목소리가 반가운 이유도 있겠지만 그가 준비한 생생한 라이브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더 소중한 시간이었다. 첫 방송 후 보름이 지난 어느 늦은 저녁 시간, 신사동 골목 어귀에서 그를 만났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새 앨범 준비 작업을 하며 보냈어요. 틈틈이 여행을 다니며 곡을 만들었죠. 지난 5월에 솔로 정규 앨범이 나왔고, 12월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새 음악으로 인사드릴 예정이에요. 앨범 작업 때문에 3년 넘게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그만뒀는데 이번에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다시 DJ를 맡게 돼 무척 기뻐요. 많이 그리웠거든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다른 멤버(나얼, 영준, 성훈)들은 잘 지내고 있나요?
다들 지금 앨범 준비 작업으로 고생을 하고 있어요. 제가 가장 형이고 리더다 보니 게으름을 부려도 애들이 잔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 기회에 멤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웃음)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네 분 중 가장 친숙한 느낌이에요.
그나마 제가 방송 활동을 하는 편이라서 그런가봐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친근한 성격으로 바뀌었어요. 어릴 적엔 정말 심했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자신감 없는 모습을 버리려고 무던히 노력했어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에 나가 노래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새내기 때 과대표를 맡기도 했죠. 한겨울에도 반바지에 워커 신고 두건까지 쓰는 등 옷을 좀 특이하게 입고 다녔어요. 한번 꽂히면 무일푼으로 기차 여행을 떠나는 등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하는 학생이었죠.(웃음) 그땐 뭘 해도 자신감이 넘쳤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용기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원래 아는 게 많아지면 두려움도 그만큼 커진다고들 하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제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앞뒤 재거나 따지지 않고, 진짜 ‘정엽’으로 살았던 순간들이니까요.
정엽씨에게 그런 과거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저는 원래 ‘할 때는 하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제 음악을 듣고 제가 섬세하고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 되게 남자다운 스타일이에요.(웃음) 뭔가 결정할 때도 뜨뜻미지근하게 하기보다는 시원시원하게 결정하는 걸 좋아하고요. 섬세할 땐 섬세한데 투박할 땐 또 굉장히 투박해요.
이번에 새롭게 <더 라이브>의 DJ를 맡았어요. DJ 정엽이 생각하는 라디오의 매력은 뭔가요?
상상할 수 있게 한다는 거요. 그런 점에서 책과 비슷한 점이 많죠. 목소리만으로 그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잖아요. 여백이 많기 때문에 자꾸 더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DJ와 청취자가 친밀해지고 프로그램에 대한 애착도 커지는 것 같아요. 뭔가 둘이서만 은밀하게 대화하는 느낌이 든달까요?(웃음) 그래서 개인적으로 ‘보는 라디오(방송 DJ와 게스트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채널)’를 좋아하지 않아요. 라디오는 소리만으로 놀라운 감동을 전할 수 있는 매체예요. 그 감동을 아는 사람은 라디오의 진가를 제대로 아는 거죠. TV 프로그램만큼 멋진 화면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보는 라디오를 만들 필요 없지 않을까요? 그런 건 어쩌다 한 번 특집 때나 해야 재밌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라디오에 매력을 느낀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예전에 DJ를 했을 때, 제가 청취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청취자가 원하는 역할을 대행해주는 코너가 있었어요. 가령 좋아하는 오빠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제가 그 오빠처럼 연기를 해주는 거죠. 한번은 부모님께서 이혼하셨다는 중학생 여자아이와 통화를 한 적이 있어요. 당시 새아버지와 살고 있는 친구였는데 방송에서 친아버지와 통화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친아버지 역할을 연기했는데 무척 힘든 상황인데도 아이가 정말 해맑았어요. 그 목소리를 들으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너무 울어서 생방송이 중단될 정도였죠. 목이 메어 제대로 진행을 못 해 전화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끊었어요. 광고가 끝나고 멘트를 해야 하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담당 PD가 멘트 대신 음악을 틀었죠. 그때 ‘아, 라디오의 힘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어요.
라디오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때요?
처음엔 굉장히 어색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도 가끔은 ‘내가 진짜 이런가?’ 싶을 때가 있어요. 웃음소리가 약간… 경박스럽게 느껴질 때요. 라디오라서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요. 오로지 목소리에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에 작은 리액션도 크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만큼 감정 전달이 확실하게 되고요. 그래서 라디오에서는 진심을 보여주지 않을 수가 없어요. 가식적인 사람들은 금방 들통이 나거든요.
평소 라디오를 즐겨 듣나요?
혼자 운전할 때면 거의 라디오를 듣는 편이에요. 요즘은 SBS 라디오에서 장예원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오늘 같은 밤>을 즐겨 들어요. 장예원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정말 자정 무렵과 잘 어울리고 특유의 편안함이 참 좋아요.
"멘트를 해야 하는데 목이 메어서 말이 안나오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음악을 틀었죠. 그때 느꼈어요. 아, 라디오의 힘이 이런 거구나"
<더 라이브>는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한 콘셉트인 것 같아요.
대부분 라디오 초대석에서는 가수가 나와도 본인의 히트곡 외 한 곡 정도를 더 하잖아요. 많아야 세 곡 정도고요. 그런데 <더 라이브>에서는 앨범 속에 숨겨진 곡은 물론이고 초대받은 뮤지션이 참여한 다른 곡들도 들을 수 있어요. 음악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초대된 주인공의 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어요. 진행을 하는 저조차도 1시간 동안 소극장 미니 콘서트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한 팀이 여섯 곡 정도를 소화해야 하니까 사실 게스트가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 프로그램이죠.
<더 라이브>를 진행하면서 인상 깊었던 게스트는요?
밴드 ‘루나플라이’요. 멤버들이 아이돌처럼 잘생기기도 했고 연주면 연주, 노래면 노래, 못하는 게 없는 친구들이더라고요. 쇼맨십도 있는 것 같고, 외국인 멤버도 있어서 곧 케이팝(K-POP)을 알릴 수 있는 세계적인 밴드가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혼자 있을 땐 어떤 음악을 들어요?
특별히 ‘어떤 걸 들어야겠다’ 하고 찾아 듣는 음악은 없어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이미지 때문인지 사람들은 저희가 꼭 R&B 음악만 들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포크, 록, 재즈 등 장르를 가리지 않죠. 혼자 운전할 때는 물론이고 주변에 항상 음악을 끼고 사는 사람들과 지내서 그런지 주로 조용한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아요. 최근에는 ‘비치 보이스’의 음악을 계속 들었어요.
어떤 DJ가 되고 싶은가요?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제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청취자들이 주인공이죠. 제 역할은 청취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제 이야기를 양념처럼 치는 거예요.
정엽에게 라디오란?
청취자와 많이 닮은 저를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형이기도 하고 또 친구이기도 하잖아요. 직업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사람의 중심은 다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바로 라디오죠.
브라운 아이드 소울 콘서트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특별히 콘셉트를 정해두지 않았어요. 음악 자체를 들려드리는 데 집중하려고 해요. 저희는 원래 공연장에서 연출된 이벤트를 거의 하지 않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멤버들이 다들 말수가 적은 편이라 처음 공연할 때는 거의 저 혼자 말을 다 했어요. 다른 멤버들은 입이 없는 줄 알았다니까요.(웃음)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영준씨가 멘트와 개그 욕심을 내기 시작해 제가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어요. 애들 말 많이 하라고 제가 말수를 줄이는 중이죠.(웃음)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특별한 계획이 있나요?
12월 초에 용산구 해방촌 쪽에 아주 작은 카페 겸 바를 오픈할 계획이에요. 서울에 몇 곳 안 남은 달동네인데 옥상에 올라가면 뷰가 정말 끝내줘요. 퓨전 재즈 바를 구상하고 있는데, 가끔 라이브 공연도 할 계획이에요. 친구들과의 아지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라 공간이 되게 좁아요.(웃음) 지금은 인테리어가 절반 정도 마무리된 상태예요. 가게에선 커피와 술 등을 팔고 메뉴는 친한 지인이 직접 컨설팅해줬어요. 가게가 오픈하면 저는 아마 매일 거기서 시간을 보낼 것 같은데요?
이번 12월호부터 ‘라디오 스타’ 연재를 시작합니다. SBS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들을 차례로 만나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