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등진 채, 최시원이 성큼성큼 걸어온다. 잠깐, MBC <그녀는 예뻤다>의 김신혁인가? 순간 헷갈렸다. 아직도 드라마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가 극 중 역할의 옷을 그대로 입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밀짚 색 꽈배기 니트에 주황색 비니, 드라마에서 막 튀어나온 것만 같다. “<그녀는 예뻤다>의 ‘김신혁’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역할이었죠. 드라마에 출연하는 모든 순간이 감사했어요. 신혁이, 아직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요.” 함께한 시간 내내 ‘모스트스럽게’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등의 드라마 속 말투를 사용하는 그의 눈에서 깊은 아쉬움이 엿보였다.
지난 11월 11일 종영한 <그녀는 예뻤다>는 방영 기간 내내 높은 인기를 얻으며 수많은 화제를 뿌렸다. 미모를 감추고 ‘못난이’로 변신한 황정음의 실감 나는 연기와 까칠하고 냉정하지만 마음속엔 첫사랑에 대한 순정을 담고 있는 매력남 박서준의 커플 연기가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친구에 대한 우정과 끌리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고준희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준 배우는 역시 최시원이다. 이번 드라마를 통해 ‘슈퍼주니어’의 최시원은 ‘꽤나 괜찮은 코믹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최시원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예뻤다>가 끝났습니다. 아쉬웠겠어요.
네, 어제 마지막 방송 끝나고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스태프들과 식사를 했어요. 아쉬움과 감사, 깊은 정이 오고 가는 자리였어요. 다른 배우들이 모두 다음 작품 계획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눈치 없는 한 분이 군 입대를 앞둔 제게 “시원씨는 다음 작품 뭐 해?”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논산으로 간다”고 답해드렸고요.(웃음) 그간 국민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려고 노력해왔으니 국방의 의무 역시 잘하고 오겠습니다.
본인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이렇게 뜨거운 인기를 얻게 될 줄 예상했나요?
아니요.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면, 군 입대를 앞둔 상황에서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드라마 시작 전에 대본을 받기는 했지만 읽는 것을 계속 미뤄두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수만 선생님께서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 본인이 보는 앞에서 대본을 다 읽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읽고 나서도 내키지 않으면 출연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런데 대본을 읽고 나니, 이건 제가 그간 꿈꿔왔던 바로 그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꼈나요?
일단 제가 맡은 배역의 대사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김신혁은 유머러스한 캐릭터인데, 대사 속에 그 위트가 아주 잘 담겨 있더라고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잭 스패로 선장이나 <아이언 맨>의 토니 스타크의 대사에는 항상 캐릭터의 유머러스한 점을 녹여낸 좋은 부분들이 있잖아요. 사실 몸을 쓰면서 웃기는 건 감히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위트 있는 대사로 연기할 수 있다는 점이 기대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무조건 하겠다고 했어요.
시원씨의 유머러스한 연기가 드라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죠.
좋은 대사를 써주신 작가님의 공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또 캐릭터를 잘 살릴 수 있도록 해주신 연출가님께도 정말 감사해요. 사실 코믹 연기를 하는 장면의 끝맺음이 확실하지 않으면 지저분하기만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호흡을 맞춘 정음 누나가 잘 리드해줘서 장면이 제대로 살아난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감독님과 연출진, 배우를 비롯한 모든 스태프가 함께 작품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이런 팀과 일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에요.
‘최시원의 재발견’이라고 말하는 이가 많아요.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요.
심지어 이수만 사장님은 저랑 15년째 보는 사이인데도 “신혁이 성격이 원래 네 성격 아니니?”라고 말씀하실 정도예요. 저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저랑 신혁이는 기본 설정이 비슷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즐겁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감독님과 연출가님께서 최대한 배우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주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서포트해주시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도 이런저런 애드리브를 많이 시도해봤어요. 정음 누나가 사랑하는 남자와 베스트 프렌드의 키스 장면을 보지 못하도록 제가 뒤에서 껴안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거기서 ‘아, 이런’이라는 감탄사가 저도 모르게 나왔어요.
나중에 작가님께서 신혁의 성격과 성향이 묻어나오는 결정적인 한마디였다며 칭찬해주셨어요. 저도 계속 그 장면을 보며 흐뭇해했다니까요.(웃음) 지난 두 달간, 최시원은 드라마를 위해 수염을 길러왔다. 그리고 드라마 후반부, 사랑하는 여인(황정음)을 떠나보내며 수염을 시원하게 밀었다. 역할을 위해 기른 수염이었지만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단다. 다른 일정을 잡는 것도 어려웠다고. ‘조금 다듬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며 스태프들이 제안하기도 했지만, 최시원은 끝까지 덥수룩한 수염을 고집했다. 많은 시청자에게 한순간의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계속 꾹 참았단다. 목이 잔뜩 메었을 때 마시는 사이다 같은 짜릿한 감동을 주고 싶었다나. 자신이 맡은 배역에 완전하게 몰입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잘 나타난 한 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선택이었지만, ‘망가지는’ 역할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았나요?
제 이미지가 비호감이잖아요. 저도 알고 있어요.(웃음) ‘최시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결국 양날의 검이더라고요. 극 중에서 계속 연예인 역할만 맡았고요. 그렇다고 제가 갑자기 살인자 역할을 할 수는 없잖아요. 나름대로 고민을 하던 차에 제가 맡은 역할에 조금씩 양념을 치기 시작했어요. 개그로요. 또 제가 가요계에서 가장 유쾌하기로 소문난 ‘슈퍼주니어’ 멤버 아니겠습니까.(웃음) 멤버들과 생활하며 쌓아온 코믹한 면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 회가 너무 뻔한 해피 엔딩이라는 여론도 있어요.
모든 시청자가 원하는 결말을 재현했다고 생각해요. 만일 주인공이 죽었다거나, 모든 이야기가 꿈이었다거나 하는 결말이라면 시청자들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겠어요. 저는 결말에 아주 만족합니다.올 한 해, 최시원은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슈퍼주니어의 음반과 콘서트 활동도 순조롭게 마무리했고, <무한도전>에서는 의외의 입담을 뽐내며 단숨에 예능 기대주로 떠올랐다. ‘아이돌’ 혹은 정형화된 ‘엄친아’ 이미지로만 보였던 그가 색다른 매력으로 대중에게 어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 한껏 물오른 코믹 연기까지 성공적으로 소화하며, 최시원은 스스로의 역량을 입증해냈다.2015년은 아주 남다르게 기억될 해네요. 그렇죠? 저는 매해 마지막 날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그해의 감사한 일을 모두 적어요. 작년에는 33개였어요.
근데 올해는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68개의 감사할 거리가 있더라고요. 할리우드 배우들과 제작진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또 사랑하는 우리 슈퍼주니어 멤버들과 스페셜 앨범을 낼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해요. <무한도전>에서는 제 끼를 보여드렸다기보다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다행히 재미있는 요소들이 팡팡 터졌고요. 몸은 좀 힘들었지만 많은 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어서 더없이 뿌듯했습니다. 항상 어두운 표정 지으시던 SM 연기자 관리팀에서도 웃으셨고요.(웃음) 제가 좋은 선물 드리고 가는 거 맞죠?
인터뷰 기사가 나올 때쯤엔 입대 이후겠네요. 매 순간이 소중할 텐데 어떻게 보낼 계획인가요?
일단 기자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서 좋고요. (순간 기자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일분일초가 황금 같다’라는 표현은 문학적인 수사라고만 생각해왔는데, LA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 말을 실감했어요. 지금은 일단 밀린 스케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감사하게도 유니세프 특별 홍보대사로 임명을 받았고요. 최연소라고 들었는데, 김연아씨가 계시니 최연소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웃음) 아무튼 부족한 제게 과분한 역할을 주셔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고 떠나야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2년, 금방 갑니다.(웃음)
모든 것이 정점에 오른 시기에 군에 입대해서 아쉽지는 않나요?
항상 20대는 제 인생의 1막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제 29살이니 슬슬 인생의 2막을 준비해야 할 시기인데, 군 입대는 그걸 준비하기에 좋은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2막에는 뭘 하고 싶어요?
음… 뭐든지 때가 있잖아요. 그 때를 잘 맞춰서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20대인 것 같아요. 인생 2막에서는 제가 받은 사랑을 좀 돌려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또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싶고요. 가령, 외국에서 배우로 활동을 할 때 항상 조금 아쉬웠던 게 있거든요. 서구에서는 동양 남자에 대한 선입견이 아직 존재해서 훌륭한 배우들이 다소 고정된 이미지의 역할을 맡아오지 않았나 싶어요. 이젠 재능 있는 동양권 배우들이 좀 더 다양한 배역을 맡아 연기할 수 있도록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슈퍼주니어와 함께해야죠. 팬 분들과도 얼굴 맞대며 마음을 나누는 기회를 꼭 마련하고 싶고요.
슈퍼주니어에 대한 애정이 정말 남다른 것 같아요.
이제는 진짜 가족이에요. 따로 활동할 때에도 늘 연결된 느낌을 받아요. 슈퍼주니어는 오래갈 거라고 확신해요. 비록 은혁씨는 입대 이후로 소식 없고, 드라마가 잘되었다는 이유로 멤버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내고 있지만 괜찮습니다.(웃음) 제가 멤버들에게 밥 좀 더 사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슈퍼주니어, 사랑합니다.
최시원은 인터뷰 내내 본인이 소속된 ‘슈퍼주니어’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럴 만도 하다. 10년 동안이나 함께 손잡고 걸어온 멤버들이 있는 곳 아닌가. 얼마 전에는 데뷔 10주년을 맞은 슈퍼주니어의 단독 레이블 ‘레이블 에스제이(Lable SJ)’를 설립한다는 뉴스가 발표됐다. SM엔터테인먼트(SM)는 슈퍼주니어에 최적화된 시스템과 전폭적인 지원을 위해 레이블 에스제이를 설립한 것이다. 앞서 슈퍼주니어의 모든 멤버가 데뷔부터 현재까지 10년의 시간을 함께한 SM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전원 재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별다른 부침 없이 언제나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한 최시원이 있다.
시원씨의 행보를 보면 항상 지치지 않고 달린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 비결은 뭔가요?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가수나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수만 선생님은 제게 비전을 찾아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주셨고, 저는 그에 수긍하고 최선을 다했을 뿐이에요. 좋은 스승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셈이지요. 앞으로도 모든 일을 즐기면서 달려가려고 해요.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그 위에 열정적으로 즐기는 마음을 더해야죠. 그렇게 달려가다 보면 저도 와인처럼 숙성한 멋진 남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오늘 인터뷰 다음 일정은 뭐예요?
뭐지? 인터뷰 벌써 끝난 거예요? 1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저는 2시간도 더 할 수 있어요! (매니저가 다가와 속삭였다.) 아, 벌써 점심시간이구나! 기자님도 식사하셔야지, 참.(웃음) 제가 군 입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찾아주신 브랜드가 몇 군데 있어서 광고 촬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군 입대 전날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 보낼 거예요.
최시원이 잘생겼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그러나 그의 진짜 매력은 매사에 유쾌한 노력가라는 점이었다. 인터뷰의 재미를 위해 굳이 등장인물의 의상을 갖추어 입고, 드라마의 코믹한 말투를 재현하는 열정이라니!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 기자님들의 고충을 100분의 1이나마 느꼈어요. 마감 중이니 얼마나 부담이 크시겠어요?” 하며 기자를 진심으로 위로하다가도 “오늘 점심은 제가 아니라 이수만 선생님이 사시는 거니까 비싼 거 많~이 드세요. 힘들 때는 밥심으로 버텨야지!” 하며 깨알 같은 유머를 끼워 넣는 유쾌함까지. 군대 가 있는 동안 책상에 두고 보라며 본인의 사진이 든 액자를 건네주고는 유유히 사라지는 이 남자, 최시원의 2막을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