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가왕 히어로 백청강
그가 복면을 벗었을 때 객석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하이힐을 신고 여자 가수의 노래를 부른 복면 속 주인공이 남자 가수 ‘백청강’이었기 때문이다. 작곡가 김형석은 “남자가 여자의 음역대로 노래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가창자”라며 감탄했고, 가수 백지영은 “여성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감성을 그대로 소화해내고 성별을 넘나드는 음역대의 가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백청강의 등장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중국 동포 출신으로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초대 우승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갑작스러운 직장암 판정을 받고 한동안 무대를 떠나 있었다. 그런 그가 재기를 꿈꾸며 카메라 앞에 섰다. 30℃를 웃도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오후.
푹푹 찌는 날씨에도 그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따금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 나지막이 불러보기도 했다. 병상에 있는 동안에도, 방송 활동을 쉬는 동안에도 그의 버팀목은 음악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곡을 무대에 올리는 것을 매일 꿈꾼다고 했다. 오랜만에 무대에서 느낀 짜릿함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위대한 탄생> 때보다 더 떨렸어요. 사람들을 속여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있었으니까요. 제가 복면을 벗는 순간, 객석에서 탄성이 들렸어요. 여자 가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 가수라서 놀랐던 거죠. 그리고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어머, 백청강이었어?’ 하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듣는데 저도 모르게 울컥했어요. ‘아, 아직도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구나’ 하는 고마움이었죠.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무대였어요.”
그토록 그리워하던 무대였다. 그가 암 판정을 받았을 때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후 이제 막 날개를 펴려던 시점이었다. 가끔씩 배가 살살 아프더니 나중에는 혈변을 봤다. 안 되겠다 싶어 병원을 찾았고 의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중국 동포 출신인 그에게 ‘가족은 있는지, 함께 사는지’ 등을 조심스레 묻는 것을 보고 ‘암’인 거냐고 되물었다고 했다. 고작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던 그이기에 암 투병은 더욱 가혹했다.
“상상도 못했어요. 20대 초반인데 어떻게 암일 수 있나 싶었죠. 한편으론 후회도 됐어요. ‘왜 진작 몸 관리를 하지 않았을까?’ 하면서 제 자신을 많이 원망했어요. 이제 막 가수가 됐는데 건강 때문에 못 한다는 게 되게 아쉬웠어요. 몸이 아픈 것보다 심정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어요.”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고 어머니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들을 살뜰히 살피지 못해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이었다. 방송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그의 가정환경은 일반인들과 조금 달랐다. 그가 막 아홉 살이 될 무렵 그의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홀로 남겨두고 러시아로, 한국으로 일을 하러 가야만 했다. 백청강은 혼자 지내는 것이 오히려 익숙한 아이였다.
“혼자 지내던 시절 하루 용돈이 중국 돈 1원이었는데, 그걸로 10전짜리 길거리 음식을 네댓 개씩 사 먹으면서 지냈어요. 나머지 50전은 돼지저금통에 날마다 모아서 학비로 쓰고요. 조금 커서는 밤무대 공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혼자서 라면을 네 봉지씩 끓여 먹는 게 낙이었죠. 몸을 돌볼 여유 자체가 없었던 거예요. 어린 나이에 암에 걸린 것도 식습관과 불규칙한 생활 패턴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지금은 병이 모두 완치됐다. 이제는 건강을 생각해 가급적 몸에 무리가 가는 행동은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그 좋아하던 라면도 이제는 아주 가끔씩만 먹는다고 했다. 이른 나이에 얻은 병은 그를 한 뼘 더 성장하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성장하게 된 계기는 암 투병 말고도 여럿 있었다. 순탄치만은 않았던 인생사였기에 그는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탄생> 우승자가 돼 ‘연변 청년의 코리안 드림’이라는 수식어도 달았지만 한국 연예계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일화가 바로 <위대한 탄생>의 멘토였던 스승 김태원과의 불화설이다. 우승을 거머쥔 후 김태원의 소속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던 백청강이 얼마 뒤 중국의 한 소속사로 옮기기로 했다는 소식이 보도된 것이다. 대중은 그를 맹비난했다. 급기야 “제자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김태원의 멘트까지 보도됐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후 김태원의 오랜 동료가 대표로 있는 소속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루머는 일단락됐지만 ‘토사구팽’이라는 꼬리표는 쉽사리 떼어내기 어려웠다.
“제가 중국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저도 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어요. 중국 엔터테인먼트 쪽 사람을 만난 적도 없었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판단하기도 어려웠죠. 사실 그때 <위대한 탄생>이 끝나고 저는 어느 소속사와도 계약을 맺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한국 연예계가 힘들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죠. 그래도 괜찮았어요. 제가 정말 잘못해서 기사가 났다면 마음이 불편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백청강은 사람을 단번에 하늘로 올렸다가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냉혹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순진무구하게 꿈만 좇던 연변 청년은 그렇게 조금씩 성숙해갔다. 그의 투병 사실이 알려진 뒤 스승 김태원은 직접 그의 입원실을 찾아왔다. 본인도 암을 이겨내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터라 제자에게 하고픈 말이 무척이나 많았을 것이다. 김태원은 “병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이다. 최악의 경우만 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인생의 좋은 밑거름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제자를 위로했다.
그는 가수가 된 후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MBC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이라는 꼬리표 탓에 다른 방송사의 프로그램에는 출연하기 어려웠다. 신인이라는 벽, 중국 동포 출신이라는 선입견도 그를 짓눌렀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이제 난 모든 걸 할 수 있어’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자만심이었죠. 그런데 실상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아마추어들끼리 경쟁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1등을 한 것뿐이지 가요계에서 1등을 한 건 아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어요.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걸요.”
사실 백청강이 꿈꾸는 가수의 모습은 비트감 있는 음악에 맞춰 무대 위에서 춤과 노래를 함께 선보이는 댄스 가수였다. 어려웠던 가정환경이었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음악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춤추고 노래하며 가수의 꿈을 키우던 때였다고 말했다. 의외였다. 당연히 지금의 백청강을 만들어준 오디션의 순간을 꼽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탄생>에서 ‘나의 꿈’을 주제로 한 경연을 준비해야 했는데 그때 제가 선곡한 곡이 ‘We are the Future’예요. 사실 바로 전주에 지드래곤의 ‘하트 브레이커’를 불러서 제작진이 발라드풍의 곡을 선곡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조언해주셨죠. 그런데 전 제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어요. 떨어져도 상관없으니 내가 가수라는 꿈을 키우게 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죠.”
우승을 바랐다면 제작진의 말을 따랐겠지만 그는 “무대를 즐겼을 뿐 솔직히 우승은 바라지 않았었다”고 말한다. 그의 진심이 통했던 걸까. 멘토 평가에서는 낮은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백청강의 선택을 지지했다.
“원래 고집이 있는 성격이에요. 다른 건 몰라도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죠. 음악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한국에 온 것도 어쩌면 그 고집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그 무대에 올랐던 거니까요.”
가수로 데뷔한 후에도 그는 고민이 많았다. 댄스곡을 부르고 싶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주변에선 계속 풍부한 감성으로 ‘발라드곡을 부르는 백청강’을 원했기 때문이다.
“늘 고민이었어요. ‘나는 댄스 가수가 되고 싶은데 왜 자꾸 내게 발라드를 시키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안 되는 건가?’ 하고 생각했죠. 서운하고 속상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복면가왕> 무대에 서면서 확실히 알았어요. 백청강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발라드를 불렀을 때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것을 보면서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도 행복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노래를 부를 때도 이렇게 행복하구나’ 하는 걸 알게 된 거죠.”
백청강의 성장은 이번 <복면가왕> 무대에서 십분 발현됐다. 안재모와 듀엣으로 부른 ‘우리 사랑 이대로’와 솔로곡인 ‘화장을 고치고’ 모두 풍부한 감성으로 객석을 감동시킨 것이다. 조장혁과의 대결에서 밀려 아쉽게 탈락했지만 다음 라운드를 위해 준비했던 ‘가슴에 진 태양’이라는 곡이 미방영분 영상으로 인터넷상에 공개되면서 한동안 화제몰이를 했다. 백청강 자신에게도 뜻깊은 무대였고, 대중에게도 하나의 선물이 된 무대였던 셈이다.
“그동안은 나를 위한 노래,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한 노래만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를 위한 노래는 노래방에서 하면 돼요. ‘가수’라는 직업은 남을 위해 노래하는 거잖아요. 이제는 진짜 가수가 뭔지 깨달았어요.”
‘아픈만큼 성숙한다.’ 진부한 말 같지만 이제 그는 안다. “깊어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스승 김태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백청강은 진짜 가수가 됐다. 그래서 행복한 요즘이다. 그는 오는 7월 새로운 싱글 앨범을 발매할 계획이다. 그의 풍부한 감성을 담은 록발라드 장르의 곡이다. 오는 10월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정규 앨범도 발매할 것이다. 그는 “한결같이 나를 지지해준 팬들에게 드리는 선물이 될 것 같다”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제 막 진짜 가수로 발돋움을 시작한 백청강의 위대한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