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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의 표정

집이나 방 따위의 둘레를 막은 수직 건조물. ‘벽’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치열한 바깥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해준다. 벽은 지친 몸을 기댈 수 있는 치유의 공간이다. 누군가에겐 그리운 사람이나 장소를 영원히 간직하는 앨범이고, 오랜 취향이 즐비한 전시장이자, 자신의 재능으로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

On May 27, 2015


1 포토그래퍼 겸 선인장 카페 대표, 백성현

그와 선인장의 만남은 이렇다. 뇌종양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던 시절, 그를 찾은 지인들의 손에는 늘 꽃이 들려 있었다. 그에겐 꽃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힘없이 시들어가는 꽃을 보는 것이 못내 고통스러웠단다. 아마도 당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투영된 게 아니었을까? 애써 죽어가는 꽃을 외면하던 그는 어느 날 시든 꽃 사이로 굳건히 살아 있는 작은 선인장을 발견한다.

 

가게 구석에는 작은 선인장을 옮겨 심을 수 있는 작업 공간이 마련돼 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기특했던지, 건강해지면 선인장을 키워보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그 위로 덕분에 병마를 이겨낼 수 있었던 셈이다. 건강을 회복한 뒤 그의 집은 온통 선인장으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한쪽 벽면이 선인장으로 가득한 수준이었다고.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는 모습부터 좀처럼 죽질 않는 질긴 생명력까지. 아마도 자신을 쏙 빼닮은 선인장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 애정의 산물로 당시 국내 유일의 선인장 셀렉트 숍, ‘씨클로드’를 직접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선인장에게서 받은 위로를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숍을 오픈했다는 그의 ‘벽’엔 선인장이 가득하다. 직접 고르고, 옮겨 심고, 돌보며 숍에 자리한 모든 선인장에게 애정을 쏟는다. 또 모든 손님에게 선인장 하나하나에 대해 애정 어린 설명을 덧붙인다. 오늘도 그는 ‘씨클로드’를 찾는 사람들을 직접 맞이한다. 더 많은 이들에게 선인장이 주는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2 온라인 편집숍 분트 대표 겸 모델, 배정남

아직까지도 남성들의 우상인 배정남은 직업의 특성상 패션에 조예가 깊다. 그는 한국 패션계를 향한 애정으로 온라인 편집숍 ‘분트’를 운영하게 되었다. ‘분트(bund)’는 독일어로 ‘동맹, 협력’이란 뜻으로 한국 브랜드와의 협업을 기본으로 한다.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의 활성화가 가장 큰 목적인 것. 매일같이 사무실로 출근하는 그는 운동이나 다른 스케줄이 없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분트 사무실에서 보낸다.

 

이 공간은 협력 업체나 협력 브랜드 사람들과 회의를 진행하는 곳이다. 영감을 주는 벽이다.

 

 


사무실 한쪽 벽에는 기다란 블랙 소파와 함께 각종 빈티지 소품이 진열되어 있다. 그의 인스타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로 자신의 첫 반려동물인 도베르만, ‘벨’과의 인증샷을 찍는 단골 촬영지이다. 소파 뒤에 즐비한 빈티지 소품은 5년 전 뉴욕에 머물 당시 구해 오거나 이후 여행지나 촬영지에서 구한 소품들이라고. 어려서부터 빈티지 소품에 푹 빠진 그의 개인적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히 모델스러운 벽이다. 

 




3 래비티 디자이너, 최은경

온라인 스토어로 먼저 이름을 알린 ‘래비티’의 디자이너 최은경의 인스타그램에 와이드 팬츠와 퍼 재킷을 입고 색색의 머리끈으로 층층이 머리를 묶은 앙증맞은 아이의 사진이 게시됐다. SNS에서 스타 아기로 통하는 그녀의 딸 ‘토끼’ 서연이다. 딸의 별명인 토끼란 단어를 조금 변형해 브랜드 네임을 정한 그녀. 래비티는 페이크 퍼를 주로 다루는 브랜드로, 감각적인 페이크 퍼를 이용한 갖가지 디자인을 선보인다.

 

귀여운 이 아이가 바로 ‘토끼’라 불리는 그녀의 딸 서연이다. 엄마를 쏙 빼닮아 사랑스럽다.

 

 


온라인 스토어만 운영하던 그녀가 최근 쇼룸을 오픈했는데, 쇼룸 벽에는 한때 갤러리에서 일했던 남편의 감각이 녹아든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벽은 미팅룸으로 사용하는 곳의 구석진 작은 공간에 자리한 핑크색 벽이다. 그곳에는 선명하게 빛나는 ‘R’이라는 글자와 그녀의 감성이 녹아든 컬러풀한 래비티의 키즈 라인이 자리했다. 너무나 앙증맞은 모습으로!

 




4 아이콘, 이효리

손수 심고 가꿔 수확한 콩, 이웃과 둘러앉아 담그는 김장김치, 앞마당에서 남편이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우려낸 모닝커피, 손끝에서 탄생한 작고 귀여운 자수들, 간간이 찾아오는 지인들의 웃음소리…. 가수로서 최정상의 자리에 있던 이효리가 화려한 무대 대신 택한 값진 인생이다.

 


그녀가 돌연 결혼을 발표하고 제주도로 향했을 때 팬들은 아쉬움에 그녀의 선택을 원망하기도 하고, 모든 걸 내려놓은 그녀의 용기를 지지하기도 했다. 블로그를 통해 팬들과 교감하는 그녀는 따뜻한 벽난로 사진을 게시했다.

 


사진 속에는 그녀의 애완견 ‘순심이’와 그녀의 남편 ‘상순이’가 담겨 있다. 서로를 마주보는 그들 뒤로 따뜻한 벽난로가 한창 따뜻한 온기를 내뿜고 있다. 도시가스가 없는 탓에 값이 만만찮은 기름보일러를 써야 하는데, 매번 기름을 시키기도 번거로워 벽난로를 지핀다고. 춥게 살아야 더 건강하다는 남편의 논리 때문에 불을 때는 일이 적지만, 어쩐 일인지 벽난로를 피워주었다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기뻐하는 그녀 덕분에 구수한 나무 타는 냄새와 따뜻한 온기가 여기까지 전해진다. 이렇듯 이효리의 벽은 따뜻하다.

 




5 사진계의 거장, 김중만

60세가 넘어서야 ‘한국의 사진가’ ‘한국인’이라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깨달았다는 대한민국 사진계의 거장 김중만. 2008년 당시 스타 포토그래퍼였던 그는 돌연 상업 사진에서 등을 돌렸다. 그 후 ‘한국’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그는 현재 전 세계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진정한 토종 예술가다. 독선적인 면모와 뛰어난 예술적 기질 덕분에 혹자에게 ‘괴짜’로 통하는 그의 벽은 남다르다.

 

그의 스튜디오에는 여러 마리의 새들이 날아다닌다. 새장의 존재가 무색할 정도로 자유롭게.

 

그의 등 뒤로 세워진 벽에는 토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조각과 그림이 자유롭게 흩뿌려져 있다. 모두 그가 여행에서 구입해온 ‘취향품’이다. 항상 꺼지지 않는 향 연기가 마치 그의 자유로운 감성을 대변하듯 벽을 타고 흐른다. 이곳은 시안에 대해 상의하거나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곳으로 그의 감각이 발현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떠오르는 영감을 주체할 수 없는지, 무수히 많은 그림을 쏟아내는 그녀. 그녀의 벽에 또다른 그녀가 있다.


6 내면을 그리는 배우, 이혜영

그녀만큼 SNS에서 활발한 셀럽이 또 있을까? 그녀는 팬들과의 소통을 단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배우로서, 작가로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은 그녀는 패션 센스를 비롯한 미적 감각을 타고난 듯하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공간은 남편이 각별히 신경을 쏟은 아틀리에다.

 


미술학원에 보내 달라며 떼를 쓰던 유년 시절의 못다 한 한을 모조리 풀어내기라도 하듯 그녀는 엄청난 양의 그림을 대거 쏟아냈다. 복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벽부터 집 안 도처에 그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자신과 가족을 모티브로 한 그녀의 화풍은 멕시코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녀는 그림 속에 자신이 겪어온, 겪고 있는 고통이나 아픔을 덤덤히 녹여낸다.

 

 

 

수많은 작업을 해온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재배치해 SNS에 게시했다.

 

7 트렌드 메이커 배우, 정려원

그녀가 입은 옷부터 모든 라이프스타일이 트렌드가 되는 트렌드 메이커 정려원. 그녀는 국내 최초 아트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MC를 맡으며 자신만의 작업실을 만들었다. 이는 팬들 사이에서도 미술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인들이 미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표출한 것이다. 사실 그녀의 작업실은 여러 명의 작가가 공동으로 사용 중인 레지던스 입주 형식의 아틀리에. 이곳에서 그녀는 배우 정려원이 아닌 ‘요아나’라는 예술인으로 함께하고 있다.

 


밤 12시면 주차장을 닫아 가끔 자고 갈 때도 있다고. 이젠 집보다 더 편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작업실 벽에는 그녀의 작품이 늘어서 있다. 그 벽 앞에서 이젤을 펴고 유화 물감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 자신의 끼와 재능을 갈고닦고 있다. 이젠 배우로서의 모습보다 아티스트의 모습이 잘 어울리는 그녀. 앞으로의 작품 활동이 기대되는 이유다.

 




8 K-팝스타, 씨엘

2NE1의 리더인 씨엘. 그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K-팝 스타다. 존재만으로도 아이코닉한 그녀는 현재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 미국 진출에 성공한 첫 앨범으로 그녀는 미국 <타임>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가면 그녀만이 소화할 수 있는 파격적인 룩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녀의 사진은 항상 벽 을 배경으로 한다. 커다란 벽에 기대 섹시한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환하게 웃기도 한다. 다양한 벽 앞에서 찍은 사진이 유난히 많은데, 그녀가 모델인 탓일까? 사진마다 패션 화보 포스를 풍긴다.

 




9 비욘드 클로젯 디자이너, 고태용

자신을 꾸며 브랜드의 성공을 노리는 홍보성 SNS가 판치는 요즘. 고태용 디자이너는 사뭇 다른 감성을 지녔다. 억지로 자신을 꾸미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승세를 유지하는 그는 얼마 전 열린 2015 F/W 서울 패션 위크에서 1990년대에 화제를 모았던 ‘오렌지족’을 콘셉트로 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의 사무실에는 그의 노력과 노고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간이 벽에는 그만의 색이 묻어나는 비욘드 클로젯의 티셔츠들이 가득하다.

 

 


미팅과 회의를 진행하는 테이블에는 갖가지 스와치가 붙어 있는 책자가 가득하고 그의 등 뒤로는 사무실을 나누는 간이 벽이 있다. 벽에는 그의 시그너처 프린트인 견공들의 귀여운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올려져 있고, 벽면 가득 ‘비욘드 클로젯’의 옷이 걸려 있다. 이 공간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려한 쇼에 가려진 그의 노고를 십분 느낄 수 있었다.

CREDIT INFO
기획
하은정 기자
취재
손혜지 객원기자
김승환, 최항석, 이혜영·려원·씨엘·현아 인스타그램, 이효리 블로그, 서울문화사 자료실
2015년 05월호
2015년 05월호
기획
하은정 기자
취재
손혜지 객원기자
김승환, 최항석, 이혜영·려원·씨엘·현아 인스타그램, 이효리 블로그, 서울문화사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