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고뛰는 강남의 슈퍼 키즈들
나는 강남에 산다(많은 이들이 ‘강남’이라는 말에 각자의 해석을 붙이는데 어찌 됐든 나는 대한민국의 ‘강남’이라는 지역에서 아이를 키운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영어를 썩 잘한다. 다섯 살 때 이미 챕터북을 줄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고, 여섯 살 땐 3일 만에 혼자 영문 소설도 한 편 써냈다.
지하철이라도 타면 강남에서 충무로역까지 가는 동안 책 한 권을 통으로 암기하다시피 해치웠고, 대한민국에 출간된 영어책이란 영어책은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어지간한 건 한 번씩 다 훑었다. 아니, 씹고 또 씹어서 몇 번씩 본 책이 수두룩하다. 강남에 살아서 좋은 것, 좋은 교육을 많이 접했을 테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글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아이 교육이 어디 부모 뜻대로, 곧이곧대로 흘러가던가?
우리 아이가 영어를 어느 정도 하다 보니 주위에선 ‘영어 영재’다 ‘언어 신동’이다 하며 아이의 언어 감각을 놀라워했다. 소위 ‘영재 테스트’라고 하는 시험을 보기도 했다. 상위 3% 안에 들면 영재성이 있다는데, 물론 그 안에 들었다.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엄마들도 있다곤 하는데, 나는 그 시험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평가 기준과 신빙성도 와 닿지 않을뿐더러 어디 가서 ‘영재’ ‘천재’라는 말을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이제 한창 자라나는 아이인데, 습득의 속도가 빠르다는 이유로 남과 다른 ‘특별한’ 아이로 비칠 수 있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간혹 블로그나 카페에 자기 아이의 언어 실력을 은연중에 자랑하며 숙제하듯 동영상을 업로드하는 맘들이 있는데,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개중에는 진짜 자기 아이를 자랑하고 싶어 올리는 맘들도 있지만 태반이 영어 교육 업체와 상업적으로 교묘히 얽혀 있는 관계다. 그리고 강남에 있는 한 영어유치원에만 가봐도 그보다 날고뛰는 ‘슈퍼 키즈’들은 쌔고 쌨다).
사실 우리 아이는 ‘독서 영재’에 가깝다.
책을 통해 언어를 깨치고 상상하고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국어, 영어 말고 다른 나라 언어도 보여주면 어떨까? 마찬가지로 흥미로워할까? 엄마인 나도 까막눈인 중국어, 스페인어, 아랍어 책을 어렵게 구해 슬며시 들이밀어봤다. 역시, 아이의 또 다른 호기심 주머니가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강남 키즈들 사이에 소리 소문 없이 불고 있는 제2외국어 열풍, 이제부터 하고 싶은 얘기다.
부활한 한자 인기 ‘조선족 도우미 환영’
“영어 하나도 빠듯한데 중국어, 일본어까지 한다고?” “대학 갈 때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그건 해서 뭐해?” 대략 3년 전만 해도 제2외국어를 대하는 엄마들의 자세는 대충 이러했다. 하면 폼 나고 좋지만, 굳이 할 필요는 없는 것.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땐 중국어를 못하면 취업하기가 힘들 것이다”라는 이건희 회장의 한마디 때문이었을까. 강남 키즈들의 하루 스케줄표에 제2외국어는 어느새 한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중국어를 가르치는 학원이 눈에 띄게 늘었고 원어민이 가정을 방문하는 중국어 학습지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반포동에 사는 A씨는 “이제 영어만 가르치는 유치원은 경쟁력에서 좀 밀리는 느낌이다. 국제학교에도 중국어 시간이 있고 나중에 유학을 가게 돼도 제2외국어는 필요하니 영어와 중국어를 병행하는 유치원이 끌린다”며 “요즘은 어린이집에서도 한자 급수 시험을 단체로 보니 중국어는 또 다른 필수과목이 됐다”고 한다. 실제로 최근 들어 중국어 인증 시험에 미취학 아동들의 응시가 눈에 띄게 늘었고 찬밥 취급받던 조선족 가사 도우미들이 중국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환영받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딸이 중국어에 빠진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오고 미국과 유럽권 내에서도 중국어 붐이 일다 보니, 까다로운 성조와 배우기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음에도 많은 어린이가 영어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중국말을 듣게 해주려고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과 닭갈비집에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고 간다”는 한 엄마의 푸념이 있는가 하면, “중국어까지 사교육을 시키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 거냐?”는 한탄도 들린다.
우리 아이와 몇 달 중국어 공부를 해보니 역시 어렵다. 어른인 나도 어려운 복잡한 한자와 발음, 공부할수록 영어가 훨씬 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영어와 마찬가지로 소리와 듣기로 먼저 접하니 갈수록 재미도 느껴졌다. 한국말과는 다른 특유의 음률과 악센트, 스펀지 같은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흥미를 느낀다.
낯설어하던 우리 아이도 흥겨운 중국어 동요에 점차 귀를 열었다. 명동의 한성화교소학교 인근과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면 중국어 교재를 구할 수 있고 문화를 익힐 수 있는 기회가 비교적 많다. 국내에 개설된 온라인 중국어 어린이 서점들도 너무나 훌륭하니 꼼꼼히 비교해보고 구입하면 좋다.
비슷한 듯 다른 스페인어의 매력
중국어와 일본어는 그나마 인접 국가의 언어이고, 교재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이나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 넘어가면 얘기는 복잡해진다. 일단 성인용 기초 회화책을 제외하곤 책 자체를 구하기가 힘들다. 아이에게 스페인어로 된 동화책을 읽게 해주려고 수소문해보지만 국내 대형 서점에서도 도통 찾아볼 수가 없다. 많은 맘들이 해외 직구나 인터넷 카페 공동구매를 통해 책을 구해 보는데, 얇은 동화책이나 페이퍼북도 가격대가 아주 ‘사악’하다.
스페인어권 책을 가장 싸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동네 헌책방 뒤지기다. 유명 프랜차이즈 중고 서점에도 없다. 오로지 동네 헌책방이다. 신림동, 청계천, 안양 등지 헌책방 한편에 보면 주인이 영어책 이외에 따로 제2외국어권 책을 모아둔다. 그곳에 가면 한 권에 2만원이 넘는 책도 1천원, 2천원에 수두룩하다. 굳이 새 책이 아니어도 되니 이럴 경우엔 보이는 대로 쓸어 담아야 남는 거다. 책 구하기도 이렇게 힘든데, 굳이 먼 나라의 언어를 알게 해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아이는 제2외국어로 스페인어를 가장 좋아한다. 스페인어는 영어와 많은 부분이 유사하고 미국 내에서도 영어 다음으로 많은 인구가 병행해 쓰는 말이다.
스페인어를 듣고 읽은 지 여섯 달, 이제 우리 아이는 스페인어 축구 방송을 들으며 낄낄대기 시작하고, 마드리드에 가서 ‘하몽’을 먹어보고 싶어 한다. 영어 잘하는 아이들에게 스페인어는 배우기 가장 유리한 언어다. 학비가 비교적 저렴하고 영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배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스페인으로 대학을 보내는 맘들도 늘었다고 하니, 관심 있는 맘들은 자세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욕심냈다간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
영어는 물론이고 다개국어를 공부하는 아이들이 늘다 보니, 관련 업계 시장도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5개국어 음원이 동시에 들어 있는 전자펜이 출시돼 유행하고 있고, ‘쌍둥이북’으로 불리는 다개국어 교재는 엄마들 사이에서 필수 교과서처럼 팔리고 있다. 좋다는 교재, 교구를 어지간히 써본 입장에서 한마디 하자면 ‘어떤 교재도 내 아이와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고, 빠른 시간 내에 결과물을 얻고 싶어 하는 엄마들은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교구를 아이가 하루라도 빨리, 소위 ‘뽕빨’을 빼서 자기 것이 돼주길 원한다. 하지만 아이마다 습득의 속도가 다르고 자극받는 루트가 천차만별이다. 아무리 엄마가 밤새워 ‘엄가다’를 하며 스티커 작업을 해도 아이가 안 보면 헛일이다.
한번은 엄청난 회원 수를 자랑하는, 다개국어를 지도하는 엄마들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언어별로 스터디를 결성하고 동영상을 올리는 등 한눈에 봐도 그 열기가 대단했지만 내가 아이와 공부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 같아 ‘눈팅’으로 그쳤다. 나름 주위에서 언어 감각이 있다고 하는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 입장에서 깨친 가장 큰 교훈은 서두르지 말고 들볶지 말고 아이 스스로 공부가 아닌 ‘언어’로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제 육아’라고 욕도 먹지만, 어찌 됐든 현재 KBS 시청률의 일등 공신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추블리네 가족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랑이가 태블릿도 보고 사운드북도 보고 한국어 교사 방문 학습도 하지만 한국어를 익히는 가장 큰 통로는 아빠다. 그리고 한국말을 하는 뽀로로다. 부모가 모두 외국어를 할 줄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고? 아이에게 다른 나라 언어가 쓰인 책을 한 권이라도 보여준 적이 있는지, 다른 나라의 말을 한 번이라도 들려줘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부모의 세심한 노력 없이는 아이의 호기심 주머니를 채워줄 수 없다.
제2외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면 대부분 뭘 그리 유난이냐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우리 때 공부하던 방식으로 아이를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뒤돌아보자. 또한 제2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도 명확해야 한다.
대입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라면 내신에 포함될 외국어를 집중 마스터하는 게 현실적이고, 세계 어디에서도 언어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 글로벌 키즈로 키우고 싶다면 조급함을 버리고 꾸준히 길게 봐야 한다. 또 하나, 다개국어 한답시고 모국어 무시했다간 큰코다치니 국어부터 기초를 튼실하게 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요즘은 국어가 제일 어렵다.
다개국어 지도 꿀 Tip
중국어 온라인 서점도 잘돼 있지만 직접 보고 책을 고르고 싶다면 명동의 한성화교소학교 앞에 있는 중국어 책방 거리와 종로에 있는 서점을 가보는 것도 괜찮다. 또 중국어를 쉽게 익히는 데는 중국어 만화 영화가 유용한데, <짱구는 못 말려> 중국어판을 많은 원어민이 추천했다.
스페인어 <리틀X>나 도 좋지만 역시나 최고의 교재는 동화책이다. 영어책으로 재미있게 읽은 책이 있다면 스페인어로 된 똑같은 책을 구해보자. 영어로 내용을 이해한 책이니 자연스럽게 비교하며 읽게 된다. 유튜브에 있는 동영상들을 강력 추천한다.
일본어 가장 손쉽게 교재를 구할 수 있는 언어다. 특히 광화문에 있는 대형 서점에는 엄청난 가짓수의 일본어 책들이 있다. 여기서 일본어 동요와 히라가나 사운드북을 샀는데, 아이들 반응이 아주 좋았다.
프랑스어 샹송 따라 부르기나 간단한 프랑스어 동영상을 반복해서 보는 것으로 부담 없이 시작해보자.
아랍어 수능 상대평가로 절반만 맞아도 1등급이라고 알려지면서 무턱대고 시작하는 이들이 많은데,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장 유용한 언어라고 볼 수 있다. 자금력 좋은 중동의 성장을 감안한다면, 배워둬서 손해 볼 일은 절대 없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