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은 그냥 아무나(anybodies)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수백만 명의 이산가족에겐 아직 북쪽에 그들의 가족이 남아 있습니다. 비록 지금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겨우 수백 킬로미터 거리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인권 유린을 고발한) 유엔 북한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보며 가슴이 찢어지고, 탈북자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같은 비극을 겪은 듯 눈물을 흘립니다. 부디 훗날 우리가 오늘을 되돌아볼 때 북한 주민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해 12월 22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에서 오준 주 유엔 한국대표부 대사가 연설을 마치자 장내는 숙연해졌다. 한국이 비상임이사국 자격으로 참여하는 마지막 회의이자, 안보리가 북한 인권 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채택한 첫 회의였다. 오 대사는 각국 대표들의 발언이 끝나고 가장 마지막으로 연설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보고서를 덮은 채 각국 대표들의 눈을 응시하며 즉흥 연설을 시작했다. 현장에 있던 서맨사 파워 주 유엔 미국 대사는 눈물을 훔쳤고 각국 대표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더 뜨거운 것은 한국 청년들의 반응이었다. 오 대사의 연설 장면은 실시간으로 공유되며 화제를 모았다. 잊고만 살았던 북한 주민에 대해 우리 모두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화제의 인물이 되는 것은 부담스럽다”면서도 “연설을 통해 진심이 전달된 것 같아 기쁘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1 싱가포르 대사 시절, 오준 대사 부부의 모습.
2 작년 12월, 장애인권리 협약의장으로 활동하며 뉴욕맹인학교를 방문했다.
대사님의 연설이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날 회의는 유엔 안보리가 사상 처음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어요. 한국 대표인 제가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소감과 희망을 덧붙여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 감회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감성적인 표현을 사용했는데, 남북 분단의 현실을 직접 체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도 공감을 준 것 같습니다. 주로 SNS를 통해서 보신 분이 많은데, 국내 언론에 보도된 후 작년 12월 24일 하룻밤 사이에만 저에게 1백50명의 페이스북 친구 신청이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페이스북이 고장 나서 다른 사람 계정과 뒤섞인 줄 알았어요. 신청한 분 대부분이 학생이나 군인 같은 젊은 분들이더군요. 2주일 사이에 8백 명이던 페이스북 친구가 1천 6백명으로 두 배 늘었습니다.(웃음)
각국 대표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설하시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릴 때 삼촌께서 외할머니의 회갑 잔치에 모인 1백여 명 앞에서 인사말을 하시는 것을 보고, “나도 언젠가 저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날이 오면 어떡하지?” 하고 며칠간 걱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천 명 앞에서 이야기를 해도 조금 긴장할 뿐이지 며칠 전부터 걱정하지는 않습니다.(웃음)
덕분에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요. 한국이 안보리 회의에 비상임이사국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또 임기 마지막 회의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룬 것도 큰 수확이었고요. 우리가 이사국으로 참여한 기간 동안 북한 문제 토의에 큰 도움을 주고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른 이사국들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해석하고 대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했지요.
30년 전부터 유엔에서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유엔 한국대표부 외교관으로 근무를 시작할 무렵에는 우리나라가 유엔 회원국이 아니라서(1991년에 가입) 참석 가능한 유엔 회의가 극히 일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관련이 있는 한반도 문제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룰 수가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유엔의 주요 기관인 안보리나 경제사회이사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고, 유엔 창설 이후 8명밖에 나오지 않은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했어요. 일평생을 국제기구에서 보낸 저 같은 사람에게는 무척 감개무량한 일입니다.
3 드럼 연주는 오준 대사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4 UN 회의장에서 발언 중인 모습.
가족 중 실향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북한이나 통일 문제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한국전쟁 직후에 태어난 저는 주변에서 북한 사투리를 흔하게 들으며 자랐어요. 요즘 젊은 세대야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저와 비슷한 세대라면 실향민이나 이산가족을 주변에서 흔하게 만나보셨을 겁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 고향이 개성이었습니다. 장인어른 역시 함경도 출신으로 20대 초반, 전쟁 통에 홀로 직업을 구하려고 남한에 오셨다가 실향민이 되셨지요.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된 뒤 매번 신청을 하셨지만 워낙 신청자가 많은 데다 추첨도 되지 않아 한 번도 상봉자 명단에 포함되지 못하고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을 멀게만 느낍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국제사회에서 경제적·정치적으로 앞서가는 국가로 부상하고 있어요. 유엔에서는 다른 나라의 분쟁과 문제 해결에도 기여하는 위치에 있고요.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문제, 즉 민족의 분단이라는 현실을 안고 있습니다.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입니다. 북한이 우리와 같은 민족이며 그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번 안보리의 북한 인권 토의와 같은 국제사회의 압력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느냐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감시와 압력은 분명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날 그 어떤 국가도 외부와 단절된 섬(island)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박을 초래하는 일을 계속하기는 어렵다는 의미지요. 우리가 북한과 대화, 협력을 추구하면서도 핵 문제나 인권 문제와 같은 부분에서는 지속적으로 변화를 촉구함으로써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당국도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을 북한에 초청하고 국제사회와 인권 대화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북한이나 통일 문제에 대해 자녀들에게 어떤 식으로 교육하면 좋을까요? 북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서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올바른 북한관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주민은 원래 우리와 역사, 문화, 언어를 함께하는 같은 민족인데, 왜 우리보다 어려운 환경에 있고 열악한 경제, 인권 상황으로 고통받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 주민을 모두 ‘뿔 달린 괴물’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므로 북한 정권이 잘못하는 것까지도 눈감으려 한다면 그 또한 그릇된 북한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후세들이 북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어야, 남북 분단의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그들이 앞으로 통일 문제를 다루게 될 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기문 총장님, 오준 대사님 등 외교관을 보고 유엔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는 청소년이 많습니다.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죠. 자전거를 만드는 사람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 사람이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만든 자전거가 외국산 자전거와 국제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열린 마음으로 배울 것은 배워서 우리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와 다른 인종, 문화를 존중하면서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오랜 기간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이 세상의 많은 분쟁과 문제들은 사람들이 자기와 인종이나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는 비난하고 배척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문화와 풍습을 편하게 생각하고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아이에게 열린 마음을 길러 주는 일이 쉽지 않아 보여요. 저는 가끔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컴포트 존(Comfort Zone)’ 이야기를 합니다. ‘Comfort Zone’은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영어 표현인데, ‘편안한 영역’이라고 할까요.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게임을 하거나 친구들과 놀 때만 컴포트 존에 있는 것 같고, 그 밖의 모든 상황은 불편해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그 아이는 매우 좁은 컴포트 존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음식을 먹어본 아이는 한국 음식만 먹고 자란 아이보다 음식에 대한 ‘컴포트 존’이 넓은 것이 당연하겠죠? 그만큼 부모님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뜻이고요.
최근에 본 책이나 영화를 추천해주세요.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는 <명량>을 재미있게 봤어요. 어려운 일을 할 때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특히 젊은 세대에게요. 책 중에선 를 추천합니다. 유명 역사학자인 곰브리치가 젊은 시절 청소년들을 위해 쓴 세계사 책이에요. 원래는 독일어로 썼는데 나중에 영어로 번역돼 다시 베스트셀러가 됐죠. 우리말 번역본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대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이 읽으면 영어 공부도 되고, 세계사에 대한 이해도 높일 수 있다고 봅니다. 또 반기문 총장님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총장님의 유엔에서의 활동을 담고 있는 책들이 젊은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젊은이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추천해드렸나요?(웃음) 사실은 제가 요즘 짬짬이 이 시대 젊은 영혼들을 위한 책을 집필하고 있거든요. 미래를 이끌어갈 주인공은 바로 그들이니까요.
* 오 대사가 추천한 책 : <곰브리치 세계사>(에른스트 곰브리치 저, 비룡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