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민 스님의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부터 가수 이효리의 여유로운 귀농기까지. 어느새 슬로 라이프는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했다. 하지만 요즘은 슬로보다는 패스트가 대세다.
패스트(fast)의 사전적 의미는 빠르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빨리빨리’라는 단어가 옥스퍼드영어사전에 등재되기까지 했을까? 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이 빨리빨리 문화에 반하는 슬로 라이프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패스트푸드를 입에 넣기보다는 홈베이킹을 배우고, 천천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기 계발서가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패스트’는 ‘나쁜 것’이라는 부정적인 단어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 불고 있는 ‘패스트 열풍’은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온 ‘패스트’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패스트 열풍의 의미를 짚어보기 위해서는 현재 어떤 패스트 품목들이 주목받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 2014년 12월 문을 연 이케아를 들 수 있다. 이케아는 스웨덴의 DIY 가구 업체로 ‘패스트 리빙’을 콘셉트로 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국내에서 붐이 일고 있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 역시 비슷한 예다. 패스트 리빙과 패스트 패션, 이 둘의 공통점은 유행과 계절에 민감한 제품군을 상시 선보인다는 것이다. 패션에서 시작해 리빙으로 이어진 이 변화는 최근 뷰티, 출판 시장에까지 번졌다.
현재 포털사이트 지식백과사전에는 ‘패스트 패션’에 대한 정의가 수록되어 있는데, 일반 패션업체들이 1년에 4~5회씩 계절별로 신상품을 내놓는다면, 패스트 패션업체들은 보통 1~2주일 단위로 신상품을 선보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시즌보다는 유행을 따른다는 의미다. 결국 ‘패스트 제품’들은 최신 트렌드를 즉각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빠르게 유통시키는 제품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패스트 열풍 왜?
개성 넘치는 싱글족 등장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싱글족의 등장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에는 100만을 겨우 넘겼던 1인 가구가 2014년에는 489만 명에 이른다. 그만큼 싱글은 소비 시장에서 간과할 수 없는 소비자가 됐다. 싱글족의 특징은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무엇보다 중시한다는 점이다. 싱글족은 인간 생활의 3요소인 의·식·주에 자신의 정체성을 입히고자 한다. 그런 중에 패스트 브랜드의 등장은 그들에게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저렴한 가격뿐 아니라 시즌마다 선보이는 다양한 제품은 싱글족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패스트 리빙 브랜드를 활용하면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연말 분위기가 흠씬 나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집을 장식하고, 봄이 되면 기분 전환을 핑계로 가구를 바꾸기도 쉽다. 언제 결혼할지 모르는 싱글들은 앤티크 같은 묵직한 아이템보다 차라리 실속과 개성이 넘치는 패스트 리빙 제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굳이 비싸게 돈을 들여 비싼 리빙 제품을 구매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유니클로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 중 단연 1위이다. 2위인 ZARA와는 매출에서 무려 세 배 차이가 난다.
SNS 통해 자기 과시
SNS의 발달도 패스트 열풍에 크게 기여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은 SNS를 이용해 자신의 일상을 효과적으로 자랑하기 시작했다. 방금 구매한 따끈따끈한 신상 옷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올리면 지인들은 실시간으로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아준다.
특히 ‘패스트 패션’ 브랜드를 이용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유행에 민감한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다. 값비싼 명품은 아니더라도 연예인의 스타일과 비슷하게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명품 브랜드 옷 한 벌 값으로 패스트 패션 브랜드 옷 여러 벌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다다익선’ 전략을 구사하며 SNS 속에서 패셔니스타로 거듭나기도 한다. 나를 보여주고, 드러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패스트 열풍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를 입는 셀러브리티들.
똑똑해진 사람들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똑똑해졌다. 확신이 없는 제품에는 섣불리 큰돈을 쓰지 않는다. 비록 수명은 짧지만 저렴한 가격의 패스트 브랜드들은 한마디로 ‘체험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몇 해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뷰티 큐레이션 박스’는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뷰티 큐레이션 박스는 계절과 유행에 따라 소비자에게 필요한 뷰티 제품들을 저용량 패키지로 매달 배달해주는 서비스다. 어떤 화장품이 내 피부와 잘 맞는지도 모르고 10만원이 훌쩍 넘는 본품을 무조건 구매하기보다는 다달이 필요한 화장품을 그때그때 받아 쓰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소비라는 것이 이용자들의 생각이다. 뷰티 큐레이션 박스를 이용해보고 마음에 드는 화장품을 만났다면 본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가급적이면 기회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자신의 입맛을 찾고자 하는 똑똑한 소비자의 소비 패턴인 셈이다.
출판업계는 아예 패스트가 대세가 된 듯하다. 잘나가던 대형 서점도 불황인 시대에 중고 서점의 사정은 오히려 상승세다. 대형 인터넷 서점에서는 아예 중고 서적을 거래할 수 있도록 섹션을 구분해두었고, 한국에서 최초로 중고 서적 매장을 만든 ‘알라딘 서점’은 영업점을 계속 늘려가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책을 오래도록 소장하며 보기보다는 사서 읽은 후에 되파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방증이다. 패스트 시대가 도래한 지금,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막힌 한 방’을 준비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무한 경쟁의 시대가 된 셈이다.
뷰티 분야에서도 열풍이 불고 있다. 그중 한 곳은 뷰티 멀티플렉스를 표방하는 스킨알엑스. 국내외 미유통 브랜드를 한 발 앞서 소개하는 공간이다.
빨라야 산다
case 1 격주간 패션 매거진 <그라치아> 안성현 편집장
"워킹우먼에게 필요한 엑기스만 담아드립니다"
흔히 ‘잡지’라고 하면 한 달에 한 번꼴로 나오는 월간지를 떠올린다. 그런데 패션지 <그라치아>는 2주에 한 번씩 책을 낸다. 패션 트렌드가 급변하면서 패션지도 더 빨라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위클리 패션지가 태동했어요. 이미 대세라면 대세인 거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패션의 시대적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에요. ‘ZARA’나 ‘H&M’, ‘COS’ 같은 브랜드들이 새 옷을 내놓는 주기는 2주일이 채 안 돼요. ‘버버리 프로섬’ 같은 대형 럭셔리 브랜드는 컬렉션을 SNS를 통해 실시간 생중계하죠. 그런데 변함없이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슬로’ 패턴을 고수하며 패션지를 발행한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뉴스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당연히 패션지의 발행 주기 역시 짧아져야 하는 거죠.”
<그라치아>의 모토는 ‘News Meets Fashion’이다. 20~30대 여성이 관심을 보이는 이슈를 패셔너블하게 다루는 것이 목표다. 특히 다른 패션 월간지들은 다루기 어려워하는 정치나 경제 분야까지도 재치있게 다룬다. 예를 들어 ‘머리가 짧을수록 지위가 높아진다’, ‘여자 후보들에게 매니큐어를 허하라’와 같은 기사가 그런 것들이다.
“타깃층은 바쁜 워킹우먼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패션을 다룰 때도 ‘차 떼고 포 떼고’ 진짜 화두인 것만 다루죠. 월간 패션지처럼 사소한 동향까지 다 전하지는 않아요. ‘액기스만 전달하자!’가 <그라치아>의 사는 법이에요.”
다른 월간지 에디터들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마감이 <그라치아> 편집부의 에디터들에게는 두 번 있다. 그만큼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만 ‘국내 유일의 격주간’이기에 자부심도 크다.
“주변에 아는 지인들이 체력 걱정을 많이 해주세요. ‘몸은 멀쩡하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맞냐?’ 하는 식이죠. 국내 제작 환경이 열악해 한 달에 한 번 만드는 것도 힘겨운 마당에 가당치도 않다는 반응이 많아요. 가끔 재미있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대충 나랑은 안 친한 사람들이에요.”
<그라치아>는 빠르게 변하는 이슈를 캐치해내는 것이 제1의 목표다. 요즘은 실시간으로 이슈가 바뀌기 때문에 <그라치아> 편집부 에디터들은 ‘실시간 시청률, 검색어, 월드 이슈’에 일희일비하며 살 수밖에 없다.
“월간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데일리 마감 시스템을 구현 중이에요. 데일리 마감은 매일매일 아이템을 교체, 추가, 업그레이드해 완성하는 <그라치아>만의 방식이죠. 그래야 호흡이 짧고 빠른 격주간 패션지를 생동감 있게 만들어낼 수 있어요.”
남들보다 빠르게 패션과 이슈를 캐치하고 싶다면 <그라치아>를 펼쳐 봐도 좋겠다. 누구보다 패스트 라이프를 즐기는 에디터들의 노력이 담겨 있을 테니 말이다.
case 2 '매경닷컴' 속보부 증권팀 김잔디 기자
"증권정보 '빠르고, 정확하게' 알려드립니다"
실시간으로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시대. 손 안에서 확인하는 증권 시황 정보 뒤에는 누구보다 ‘스피드’가 중요한 직업을 가진 증권 속보부 기자가 있다. 증권거래소를 출입하는 매경닷컴의 김잔디 기자의 출근 시간은 남들보다 조금 이른 오전 7시다. 김 기자가 하는 일은 주식 시장이 열리는 동안 변동하는 주가 정보를 시시각각으로 투자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제가 쓴 기사는 온라인으로 주식을 거래하는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 바로바로 올라가요. 앉은 자리에서 투자를 결정하는 개인 투자자들에게 증권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이죠. 정보 하나에 돈이 오가기 때문에 다른 분야보다 스피드와 정확성이 요구되는 직업이에요.”
워낙 속도에 예민한 직업이다 보니 기사를 쓰고 있는 중에 시장 상황이 바뀌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코스피 지수가 상한가라는 기사를 작성 중인데 갑자기 주가가 폭락해 하한가로 바뀌는 경우다. 이런 경우 기자가 쓴 기사는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된다. 김 기자가 쓰는 기사는 여느 ‘패스트 제품’들처럼 수명 주기가 짧다.
“꼼꼼하게 쓰겠다고 붙잡고 있으면 쓸모없어지는 게 한순간이에요. 특히 투자자들은 임팩트 있으면서도 압축적인 기사를 원하죠. 그래서 정확한 정보를 담은 기사를 빨리 내보내는 것이 중요해요. 또 어떤 기업에 관한 이슈가 터지면 그것 역시 빨리 써야 해요. 그래야 기사를 본 투자자들이 빨리 털고 나오거나 먼저 투자를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김 기자는 자신이 하는 일이 파급력이 크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고 했다. 기업과 관련된 이슈성 기사를 쓰자마자 그 기업의 주가가 요동치는 것도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종종 ‘투자자’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도 있어요. 전화를 받으면 다짜고짜 화부터 내죠. 들어보면 제 기사 때문에 본인이 산 주식이 엄청 떨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손실을 봤다면서요.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제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겐 정말 중요하다는 걸 많이 느껴요.”
요즘은 예전보다 주식 투자가 쉬워져 직접 투자를 하는 사람이 주변에도 많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김 기자를 보면 “뭐 괜찮은 종목 없니?” 하고 묻는단다. 그녀가 다른 누구보다 증권 트렌드에 빠삭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매일매일 쫓기듯 살아서 힘들진 않냐고요? 그보다는 남들보다 빠르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더 크답니다.”
case 3 해외 직구 마니아 한수경씨
"품절 대란의 묘수는 직구뿐이라니까요"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제품을 누구보다 빨리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해외 직구는 둘도 없는 묘수. 직구를 생활처럼 즐긴다는 주부 한수경씨는 2007년 처음부터 해외 직구를 시작했다. 순전히 취미 생활 때문이었다.
“취미가 미싱이었어요. 여기에 빠져들다 보니 동대문표 패브릭은 싫어서 조금 돈을 들여서라도 국내에 들어온 수입 패브릭 숍에서 천을 구매해 사용했죠. 그런데 수입 제품이다 보니 가격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취미로 즐기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요.”
그러던 차에 우연히 한 직구 사이트에 들어가게 됐는데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천들로 가득한 데다 수입 숍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쾌재를 불렀단다. 이후로는 미싱용 패브릭을 구하는 것 외에도 직구 사이트를 수시로 방문하여 더 괜찮은 제품은 없는지 꼼꼼히 따져보기 시작했다.
현재 넷째 아이를 임신 중인 그녀는 육아용품과 아이들의 장난감을 직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국내에선 구하기 어려운 제품도 해외 직구 사이트에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직구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한다.
“영화 <겨울왕국>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어린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겨울왕국> 장난감을 사려고 혈안이 되었어요. 국내에서 병행수입을 거친 제품은 나오자마자 품절이었죠. 저는 한 달 정도 기다린 끝에 직구로 구입할 수 있었어요. 제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본 다른 엄마들이 엄청 부러워하더라고요. 품절 대란 속에서 외국 제품을 가장 빨리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해외 직구뿐이라니까요.”
이 외에도 유아용 화장품, 과자, 자전거, 유모차 등 수경씨는 거의 모든 육아 관련 제품을 직구로 사들였다. 덕분에 또래 엄마들 사이에서 트렌드 리더로 통할 정도다.
“한때 일본 기저귀가 유행한 적이 있어요. 품질과 디자인이 탁월한 제품이었죠. 그때 직구를 할 줄 모르는 엄마들이 제게 구매를 부탁했던 적도 있어요. 대량으로 구매하면 배송료를 아낄 수 있어서 공동구매에 열을 올리는 것도 직구의 기술 중 하나예요.”
물론 직구로 구매한 제품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땐 환불이나 교환을 요청하기보다는 인터넷 중고 시장에 재판매하는 방식을 택한다. 아직 국내에는 들어오지 않은 괜찮은 제품은 가격을 높이 책정해도 불티나게 팔린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똑똑한 엄마 한수경씨는 오늘도 클릭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