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현은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30분가량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일찍 오셨네요” 하고 기자가 말을 건네자 “죄송합니다”라고 화답한다. 일찍 온 건 잘못이 아닌데도 말이다. 무리한 포즈를 요구해도 그녀는 “맞아요.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라며 늘 동의를 해줬다. 10년 넘게 라디오를 진행하며 다져진 그녀만의 공감 코드인 듯했다. 촬영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다섯 시간 동안 기자의 마음은 왠지 편안했다.
그녀는 얼마 전 종영한 KBS 일일드라마 <고양이는 있다>에서 늦은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노처녀 ‘한은숙’ 역을 연기했다. 동년배의 다른 배우였다면 조금은 올드한 러브 라인이 전개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박소현이 그린 사랑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맞선에서 만난 남자에게 반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가 하면 그 남자를 두고 고민하는 모습에서 영락없는 소녀 감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일드라마는 굉장히 오랜만에 한 거라 감회가 새로웠어요. 2008년 일일드라마 <착한여자 백일홍> 이후 세트장에는 처음 가본 거였거든요. 첫 촬영 들어갔을 때는 ‘아,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긴 호흡으로 6개월 정도 하다 보니 점점 편해지더라고요.”
극 중 박소현은 한 남자를 놓고 대학 동창과 눈물겨운 라이벌전을 펼치는 모습을 그린다. 결국 결혼에 성공한 후 상대 배우와 펼치는 닭살 연기도 인상적이다. 사랑스러운 외모와 달리 털털한 성격으로 알려진 그녀와는 사뭇 다른 캐릭터다.
“사실 예전에는 남자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거든요. 친구들이 ‘어제 모임에 흰 스웨터 입고 나왔던 남자 어때?’ 하고 물어도 기억을 잘 못 하는 스타일이었죠. 또 삼각관계 상황에서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사랑을 쟁취한 경험도 없었고요. 사실 40대가 되니 사랑을 쟁취하기보다는 나와 잘 맞는 남자가 나를 선택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그녀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SBS 라디오 <박소현의 러브게임>의 DJ를 맡고 있다. 일일드라마 촬영으로 1년 반 정도 휴식기를 가졌던 때를 제외하면 장장 12년이 넘는 긴 시간이다. 12년이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을 밟는 시간과 동일하다. 그만큼 박소현이 수많은 사랑 이야기를 접하고 또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이야기다.
“라디오를 오래 하다 보니까 요즘에는 저보다 청취자분들이 더 어려요. 예전에는 제 또래들과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말이죠. 하루에 한 번씩 친구나 동생을 만나 이야기한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사실 라디오라는 매체 자체가 스타성이 있는 건 아니니까 돈을 벌려고 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하지만 저처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큰 메리트죠. 2시간 동안 15곡 이상의 음악을 들려줘야 하고, 새로 나온 아이돌 그룹의 신곡도 들어야 하거든요.”
라디오를 진행하다 보면 라이프스타일도 남들과 똑같을 수만은 없다. 오후 6시부터 8시, 남들은 친구를 만나 수다 떨거나 남자친구와 데이트할 시간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결같이 라디오 부스를 지켜왔다.
“제가 오랜 시간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비결은 그만큼 오랫동안 연애를 안 해서인 것 같아요. 생각해보세요. 보통 모임은 일반 회사원들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 6시, 7시부터 시작되잖아요. 그런데 제가 라디오 끝나고 이것저것 정리한 뒤 모임 장소에 가면 벌써 저녁 9시가 넘어요. 그땐 이미 술자리도 파장 분위기인 데다 결혼한 친구들은 밤 10시, 11시 정도 되면 집에 가겠다고 일어나죠. 이 시간대에 라디오 진행하면 저녁 모임을 아예 못 가진다니까요.”
연애 휴식기가 꽤 됐다. 그녀는 연애 세포는 싱싱하게 살아 있는데 현실이 뒷받침이 안 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실제로 박소현은 방송에서 줄곧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치곤 했다.
“예전에 여자 연예인과 일반인 남자의 맞선 과정을 담은 <골드미스가 간다>(이하 <골미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사실 기대가 엄청 컸거든요. ‘괜찮은 남자를 만나면 결혼과 동시에 바로 하차해야겠다’ 하는 마음이었죠. 처음 들어갈 때는 다른 여자 멤버들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어요. 오로지 관심은 맞선남에게 쏠려 있었죠.
그런데 방송에서 세 번 만난다고 해서 낯선 남자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예를 들어 평소 면 티셔츠에 청바지를 즐겨 입는 사람인데, 방송에선 정장을 갖춰 입고 나오는 거예요. 방송이 가진 한계 때문에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거죠. 또 프로그램 특성상 따로 만나면 프로그램에서 하차해야 하는 상황이라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없었어요.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얻은 거라곤 <골미다>의 성격 좋은 여자 멤버들? 우리는 <골미다> 작가들이 중간에서 맞선남들을 낚아챘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웃음)”
<골미다>가 맞선 형식의 프로그램이었다면, <우리 결혼했어요>(이하 <우결>)는 동료 연예인 김원준과의 가상 결혼 생활을 다룬 예능이었다. 40대 싱글 연예인 중 극강 비주얼을 자랑하는 두 사람의 조합이 워낙 훌륭하다 보니 핑크빛 열애설이 솔솔 흘러나오기도 했다.
“원준씨와는 18년 동안 알고 지내온 동료예요. <우결> 찍기 전이나 후나 좋은 관계인 건 변함없고요. ‘둘이 한번 정식으로 사귀어라, 진짜 결혼해라’고들 많이 하셨는데, <우결>을 찍으면서 ‘아, 이래서 우리가 안 사귀었지?’ 하고 새삼 깨닫게 되더라고요.(웃음) 쭉 아는 사이였으니까 만약 ‘이 사람이다’ 싶었다면 20대 때 진작 연애했겠죠. 원준씨는 굉장히 섬세하고 꼼꼼한데, 저는 화끈한 스타일이라 같이 있다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나요. <골미다> 멤버들도 김원준씨에 대해 잘 아니까 농담처럼 ‘걔랑 사느니 차라리 혼자 살아라’ 하며 놀리곤 했죠.”
대개 나이가 들면 결혼에 대한 가치관도, 좋아하는 남성상도 많이 변한다. 박소현 역시 그렇다고 했다.
“20대 때는 가능성을 보고 사람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학벌 좋은 사람이 장래에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일종의 스펙을 따졌죠. 그런데 40대가 되면 가능성은 보지 않아요. 오히려 가치관을 보게 되죠. 이제 친구 같은 남자를 만나서 살아가야 하는 거지, 제가 무슨 남자에게 큰 덕을 보겠다고 숟가락을 얹을 나이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가치관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네요.
저는 몸 관리한다고 저염식 식단에 육식도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남자는 사회생활 한다면서 매일 술 마시고 야식으로 치맥을 원한다면 함께하기 어렵겠죠. 또 저는 라디오 DJ 하느라 아이돌 신곡에 관심이 많아 ‘비투비가 이번에 컴백했대요’ 하고 말했는데 남자가 ‘그게 뭐예요? 먹는 거예요?’ 하면 얼마나 맥 빠지겠어요. 나눌 이야기 자체가 없는 거죠.”
방송이 없는 날이면 그녀는 운동을 하거나 집에서 요리를 해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이따금 친구들과 만나 좋은 화장품이나 조리법, 운동법 등을 공유하기도 한다.
“제가 발레를 그만둔 이유가 무릎 부상 때문이었거든요. 그런데 몸무게가 늘어나면 무릎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더 안 좋아질 수 있대요. 그래서 평생 식단 조절과 운동을 꼭 해야 하죠. 다행히 주변에 발레 하는 친구가 많으니까 식이요법이나 운동법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얻어 듣곤 하죠. 저는 아직도 육식을 완전히 못 끊었는데 아예 채식만 하는 친구도 많아요.”
인생의 동반자도 친구 같은 남자였으면 좋겠는데, 갈수록 찾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쉰다.
그녀는 내년이면 데뷔 20년 차다. 방송 경력으로 치면 중견급인 셈. 대학에서 발레를 전공했던 그녀가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땐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다고 했다.
“방송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빨리 시집가든지 발레로 컴백하든지 하겠다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이었죠. 그런데 요즘은 ‘어, 나 이러다가 윤여정 선생님 나이 될 때까지 일하고 있을 것 같네?’ 싶어요.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면 일을 하든 결혼 생활에 전념하든 어쨌든 선택지가 늘어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되니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거죠.”
선택지가 적다는 것은 분명 불안한 일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이 그녀가 방송 활동을 더 열심히 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녀는 다작을 하지는 않지만, 라디오, 교양, 예능, 드라마 등 다양한 일을 한다. 그녀가 오랜 시간 대중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
“라디오와 드라마의 매력은 많이 달라요. 드라마는 인내심과 끈기가 필요하다면, 라디오는 순발력이 중요하죠. 드라마는 실수하더라도 스무 번, 서른 번 다시 찍으면 되지만, 라디오는 ‘죄송합니다. 다시 갈게요’가 없잖아요. 또 드라마에서는 겉모습만 박소현일 뿐, 진짜 제 모습은 드러나지 않아요. 하지만 라디오에선 백 퍼센트 실제 박소현을 드러내죠. 리얼 버라이어티는 드라마와 라디오 그 중간 어디쯤인 것 같아요.”
2014년의 끝자락, 그녀의 새해 소망은 올해도 어김없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란다.
“일을 늘려서 돈을 많이 벌고, 그 돈으로 ‘세계 일주 떠나겠다, 명품 백 사겠다’ 같은 것은 원하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건 행복이죠. 그리고 그 옆에 인생을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가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 비춰지는 캐릭터 말고, 진짜 나를 알아주는 그런 사람이오.”
이젠 정말 사랑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내년엔 드라마 같은 사랑이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