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50세)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제주도의 자랑’이었다. 1982년 대입 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고, 서울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 10년 뒤 사법고시까지 수석으로 패스했으니 당시 제주도에서 ‘정말 큰 인물 나오겠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12년 동안 지켜온 금배지를 내려놓고 고향의 제주지사 자리에 도전장을 냈다. 결과는 역시 무사 합격. 원 지사는 59.97%의 높은 득표율로 경쟁자를 제치고 당선됐다. 그리고 당선이 된 순간부터 취임 100일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원 지사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24시간이 모자라’라는 노래가 떠오를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는 ‘일꾼’ 원희룡 지사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제주도립미술관에서 만났다. 고되지만 행복한 표정이 역력했다.
“요새 정말 즐겁습니다. 매일같이 이렇게 환상적인 풍경을 보면서 일할 수 있으니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렸을 때는 잘 몰랐던 제주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껴가며 아주 즐겁게, 열심히 일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웃음)
잘나가던 국회의원에서 ‘쏘울’ 타는 제주지사로
원희룡 지사는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정치에 입문해 줄곧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권력의 상징이자 일생에 한 번 해보기도 어려운 국회의원을 연속 세 번, 12년 동안 해 자칫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권위를 내세울 법도 하지만 원 지사는 그 반대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국민과 소통하고 있다.
국회의원 시절 승합차인 카니발을 탔다는 원 지사는 제주도로 내려와 배기량을 한 단계 더 낮췄다. 소형차로 분류되는 기아 쏘울을 관용차로 택한 것. 게다가 전국 지방자치단체장과 정부 기관장을 통틀어 최초로 관용차로 전기차를 도입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날도 어김없이 흰색 쏘울을 타고 인터뷰 장소에 도착했다.
“전기차라 지금이 훨씬 조용하고 좋아요. 특히 제주에는 각 면사무소 등 공공기관마다 전기차 충전 설비를 마련해 충전하기도 어렵지 않고요. 현재 제주 내 공공기관에만 40여 대의 전기차가 배치돼 운행되고 있는데 점차 확대해나가는 중이에요. 쏘울을 선택한 것을 보고 주변에서 ‘교황을 따라 한 것이 아니냐?’라는 말도 우스갯소리로 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저에게 중요한 것은 차종이 아니라 환경에 무해한 전기차라는 점이었어요.”
‘정치의 중심’ 여의도에서 국회의원으로 일하는 것과 제주지사로 도청에서 일하는 것의 차이점도 궁금했다. 연봉 차이는 ‘노코멘트’라고 센스 있게 답했다.
“일단 지금이 노동 강도가 훨씬 셉니다. 지역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책임지고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국회 때는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주로 발언을 많이 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이 났는데 도지사는 어떤 것을 실행한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니까 어깨도 더 무겁고요.
국회에서는 주로 비판을 해오다가 비판을 받는 입장이 된 것도 큰 차이점이에요. 그제, 어제 이틀 동안 도정 질문 기간이었는데 도의원들에게 질문을 받는 입장이 돼보니 ‘예전에 총리나 장관한테 잘해줄걸’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스스로 흐뭇한 점은 역대 도정 질문 중 가장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부드러웠던 질문 시간이었다는 거예요. 이 정도면 선방한 거 아닌가요?”
실제로 이날 취재진과 만난 제주 공무원들은 “원 지사님이 도지사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도의원들의 모든 질문에 상세하게 답변을 해서 놀랐습니다. 도의원들도 지사님이 열심히 하는 건 모두 인정하는 반응이에요”라며 “공무원들도 사실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이 많았는데 원 지사님이 취임하면서 활기찬 느낌이 살아나고 있어요. 지사님이 열심히 하시는 덕분입니다”라고 호의적인 분위기를 전했다.
제주 최초 여성 시장을 임명하다
제주 출신인 원희룡 지사의 당선을 두고 ‘금의환향’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였다. 하지만 원 지사는 당장 해결해야 할, 그리고 앞으로 변화시키고 보완해야 할 일들로 어깨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특히 정치에 입문한 뒤 따라다니는 ‘젊은 피’라는 수식어처럼 원 지사는 뜨거운 열정으로 제주 전역을 누비고 있다. 제주의 1백82개 마을을 일일이 발품을 팔고 다니며 도민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가 제주지사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저는 집무실이 마을과 현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민 한 분 한 분이 스승이자 가장 좋은 조력자이고요. 그리고 마을 구석구석에 가보니 도민들이 정말 중요하게 느끼는 일상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어요. 예를 들어 어떤 마을은 초등학교 학생 수가 줄어 폐교 위기에 놓였는데, 주민들이 푼돈을 모아서 하긴 벅차니 도와달라고 절절한 호소를 하시더라고요.
마음과 마음을 열고 거리낌 없이 얘기를 하다 보니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보였어요. 사람들이 정말 아파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민들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막연하게 느껴지던 이야기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피부에 와 닿고요. 가장 좋은 학습이자 경험이 되었습니다.”
제주도는 특별자치도로서 도지사가 행정시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원희룡 지사는 자신의 고향인 서귀포 시장 자리에 제주 역사상 최초로 여성 시장을 임명했다. 이는 남성 중심, 이권에 따른 편 가르기가 만연해 있던 제주 공직 사회에 커다란 변화였다. 공무원들도 원 지사의 여성 시장 임명에 꽤나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일을 정말 잘하니 다들 바로 인정을 하더라고요. 여성들은 특유의 세심함으로 소통도 잘하고, 부드럽다는 강점이 있어요. 북유럽처럼 대통령부터 국회의원까지 여성이 절반인 사회도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에요. 다만 기회를 공정하게 주고, 혹은 그동안 소외돼왔기 때문에 일부러 더 주는 방식으로라도 여성 인력을 키워가야 해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사회, 그게 바로 제가 추구하는 거예요.”
어쩌면 이렇게 여성 친화적인가 했더니, 원 지사는 꽃 같은 두 딸을 둔 전형적인 ‘딸바보’ 아빠다. 아내까지 해서 세 여자의 사랑을 홀로 독차지하고 있는 셈. 집에서는 어떤 남편인지 물었더니 바로 “충성!”을 외친다.
“제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은 항상 옳다’고. 특히 아내한테는 ‘토 달지 말자’는 주의로 살고 있어요. 제가 공인이다 보니 짊어져야 할 부분이 많아서 가급적 가족들에게는 폐를 안 끼치려 하는데 그것도 잘 안 되니까 고생을 많이 시키잖아요. 그래서 미안해서 집에서는 순종하려고 해요. ‘여자 말 잘 들어서 손해 보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그 말에 적극 동의합니다.”(웃음)
전국의 유부남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타도 원희룡’을 외치며 들고 일어설 지도 모르겠다. 주부들은 연신 “부럽다”는 말을 할 것 같다. 하지만 스타 정치인이자 도지사의 아내로 사는 것도 쉽지 않단다.
원희룡 지사의 아내 강윤형씨는 서울대 82학번 동기로, 제주 출신 서울대 신입생 모임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서울에서 정신과 전문의로 일했지만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병원도 그만두고 제주에 함께 내려와 생활하고 있다.
“아내 입장에서는 황당해진 거예요. 심심해도 수다 떨 친구 한 명 없고, 정치적 인맥관리라는 말이 나올까 봐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요.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고 큰 행사에도 안 가고 개인적으로 봉사활동 다니며 시간을 보내요. 저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주변 분들의 수많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부 때문에 서울에 있는 두 딸은 몇 년 전 생일에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줄 정도로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재주를 지녀 각각 패션과 미술 공부를 하고 있다. 학구파인 엄마, 아빠와는 너무 달라 신기하다는 게 원 지사의 말. 하지만 아빠에게 요즘 젊은 층의 생각과 흐름을 알려주는 통로 역할은 톡톡히 한다고 한다.
“아이들과 30년 정도 세대 차이가 나는데도 대화가 잘되는 편이에요. 그래서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미래가 어떻게 되고, 젊은 사람들이 뭘 생각하는지를 딸들을 통해서 많이 듣고 배우죠.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아주 재미있고 즐거워요.
제가 인생 경험이나 지혜는 더 많이 알고 가르칠 수 있지만 젊은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서는 딸들이 선생님인 셈이죠. 요새 젊은 세대들이 많이 힘들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부모 세대보다 훨씬 행복하고 가능성이 많은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고요.”
다음 세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제주의 교육 환경에 대해 물었다. 최근 서울에서는 ‘제주에서 아이 키우기’ 같은 제목의 책이 인기리에 팔릴 정도로 제주에서의 육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제주도는 청정 자연과 더불어 공교육이 잘 마련되어 있는 곳이에요. 입시 교육은 강남의 대치동 같은 곳에 비해 부족할 수 있겠지만 제도 교육에서는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게다가 천혜의 자연을 활용한 자연체험학습은 물론 영어 교육도시도 있어 국제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많고요. 좁은 지역 내에 다양한 환경과 문화가 있는 점도 아이들이 자연을 느끼고 국제적 환경에 적응하는 데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범죄 없고 오염 없는 ‘청정’ 제주를 꿈꾸다
2~3년 새 제주도는 ‘힐링’을 대표하는 장소이자 한 번쯤 살고 싶은 꿈의 도시로 손꼽히며 젊은 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이효리 등의 유명인들이 이주한 덕인지 도시 생활을 포기하고 제주로 내려가 게스트하우스 등을 열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 원 지사가 느끼는 제주의 매력은 무엇일까?
“자연과 격리되어 있는 서울의 빌딩 숲 속, 무한 경쟁 시대에 살다가 제주에 오면 바로 마주하는 게 자연입니다. 그리고 제주도에는 다들 쉬러 오지 경쟁을 하러 오는 사람은 없어요. 그렇다 보니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정신적으로 영혼의 균형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게 제주의 장점인 것 같아요. 제주가 고향인 저도 이렇게 내려오니 좋은데 타지 사람들은 얼마나 좋겠어요. 저는 관광객들이 제주에서 머무는 시간이 인생에서 특별한 시간으로 기억되고 치유와 감동의 시간, 충전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요.”
더불어 원 지사는 범죄 걱정 없는 안전한 제주 만들기에도 노력을 쏟을 예정이다. 제주도에는 유난히 여성끼리 혹은 여성 혼자 여행을 많이 오는 관광지인 만큼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 마음 편히 여행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제주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강력사건은 적은 편이에요. 하지만 올레 코스처럼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에서는 그만큼 범죄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자치 경찰 등을 통해 사고를 줄이고 범죄를 예방하는 도시 디자인 등을 도입할 생각이에요. 또 밤길이 너무 어둡다는 민원이 많아 공포심을 없애고 안정감을 줄 방법도 찾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먼센스> 독자들에게 제주 출신 도지사로서 추천해주고 싶은 힐링 스폿을 공개해달라고 요청했다.
원 지사는 기다렸다는 듯 “제주의 서쪽 해안에서 바라보는 달빛이 아주 절경입니다. 흔히 석양을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것보다 훨씬 환상적이라고들 합니다. 꼭 가보세요. 또한 대평리에 박수기정이라는 절벽이 있는데 그곳은 경치뿐 아니라 동양적인 의미에서 기운이 아주 강하고, 깊은 곳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가까운 시일 내에 가서 기운을 받고 오려고 합니다. 제주 도민을 위해 열심히 뛰어야 하니까요.”
혹여 뻔한 관광지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역시 원희룡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