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나페아 포아 이포이포’(왼쪽)와 ‘테 아아 노 아레오이스’(오른쪽).
폴 고갱의 생애는 파란만장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페루로 망명하는 아버지를 따라 어린 나이에 먼 길을 떠나는 배를 탔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는 도중 죽었고 고갱은 어머니, 누나와 함께 페루에 살다가 일곱 살 때 다시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왔다. 고갱은 성장한 뒤 하급 선원으로 배를 타기도 하고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일하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으니, 바로 화가가 되어 자신의 영감과 가슴속 열정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어느 날 직장을 버리고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됐고, 그림에 빠진 남편과 궁핍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났을 때도 그의 예술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주류 미술 아카데미의 교육을 받지 않은 고갱에 대해 화단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그는 가난한 화가 생활에 점점 지쳐갔다. 이후 반 고흐의 제안으로 ‘프로방스 아를’에서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기도 했지만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를 만큼 큰 갈등을 겪고 나서 아를에서의 작품 활동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런데 그즈음, 고갱은 1889년 ‘만국박람회’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한다. 낯선 동양 타히티의 이국적인 문화와 원시적인 이미지가 냉혹한 파리의 문명에 상처받은 그를 단숨에 사로잡은 것이다. 고갱은 1891년 마흔셋의 나이에 “오로지 미술 창작에만 매진하고 원시적 태초의 자연에서 그들처럼 살고 싶다”며 타히티로 떠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작품 35점을 팔아 받은 돈이 전부인 고갱이 타히티에 도착해서 본 현실은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미 곳곳에 유럽의 문화가 스며 있고 속물근성이 만연해 그가 상상하던 낙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고갱의 작품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섬유산업이 발달했던 프랑스의 식민지인 타히티 주민들이 개발과 문명화를 빌미로 무작위로 수출된 옷감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것. 유럽 섬유 회사의 값싼 옥양목을 걸친 남국의 여인들에게서 슬픈 역사의 단면이 드러난 셈이다.
물론 고갱이 사회참여적 관점으로 타히티의 사람들과 자연을 그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분히 식민주의적 관점인 경우가 더 많았다. 문명을 비판하고 떠났으면서 거기서 그린 그림들을 서둘러 파리에 발표하고 싶어 한 것이 그랬고, 타히티에서 함께 살던 여인을 버리고 2년 만에 급급했던 파리행도 그렇다. 그럼에도 파리 평단은 고갱의 그림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크게 좌절한 고갱은 또다시 타히티로 간다.
사는 동안 호의와 풍요를 별로 누려보지 못한 고독한 화가를 위로해준 것은 결국 밝고 자유로운 남국의 여인들과 화창하고 원색적인 원시의 자연이었다. 고갱은 타이티의 색과 풍만함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았고, 그것이 그만의 화법이 되어 미술사에 길이 남을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 화가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글쓴이 이수민씨는…
현재 상명대 외래교수이며 동강국제사진제, 강원다큐멘터리사진사업, 서울사진축제 등 많은 전시와 페스티벌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예술이 우리 일상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고 믿으며, 현대 예술에 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예술평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