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거두절미하고 박진우를 소개하겠다. 스펙을 읊어보면, 서울대 금속공예학과 졸업 후 영국 왕립예술학대학에서 제품 디자인을 공부했다.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로 2년째 근무하던 중 워커힐호텔 스케이트장·수영장 아트 디렉터(2006)를 맡게 됐고, 사표를 던졌다. 독립회사를 차렸고 흥국생명 아트 디렉터(2007), 갤러리아 백화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2008), 대신증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2009),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전시기획 자문위원(2009) 등 굵직한 프로모션을 쉬지 않고 진행했다. 파리·베이징·런던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무엇보다 세계적인 디자인 잡지 <프레임>에 소개되면서 국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모국이 아닌 타국에서 그를 점찍었고, 그제야 모국은 그를 알아봤다. 어쨌든 그는 현재 안팎으로 가장 분주한 전방위 팝 아티스트다. 끊임없이 고민하는 학구파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대표작은, 길거리에 차고 넘쳐나는 짝퉁 ‘루이바똥’ 가방에 대한 풍자를 담은 페이크(Fake) 가방, 전선을 자유롭게 늘어뜨려 고정관념을 깬 스파게티 샹들리에, 5분 동안 양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성냥 모양의 ‘5분 양초’ 등이 있다.
“아, 스펙 중에 빼먹은 게 있어요. 저 ROTC 출신입니다.”
“부모님이 봉제공장을 하셨어요. ‘아가방’ ‘김민제’ ‘톰보이’ 등 당시
아동복 브랜드의 하청업체였죠. 그래서 옷 잘 입는 초딩이었고요.
공장 누나들이 천 자르고 미싱 돌릴 때 저는 옆에서 스티커를 붙였어요.
그때 디자이너 DNA가 침투했죠”
코카콜라 보이
갤러리 ‘나비’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요즘 한국의 젊은 아티스트와 [butterflies] 프로젝트를 공동 전시 중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기자 앞에 그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전시 작품 속에는 ‘페이크 가방’도 포함돼 있다. 페이크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그가 명함을 내민다. ‘대구대학교 박진우 조형예술대학 산업디자인학과 조교수’라고 조신하게 적혀 있다. 페이크 같은 이 상황. 배기팬츠를 입고 있는 그가 교수님이었다.
“로컬 문화가 중요하니까요. 대구의 문화는 서울에서 트렌디한 것을 통째로 옮겨와서 전시하는 게 대부분이지요. 제가 본 서울 사람들은 직업과 별개로 이미 아티스트예요. 좋은 감각으로 마음껏 표현해내죠. 그래서 더욱 대구에서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대구는 내 고향이기도 하고, 서울을 떠나 휴식을 얻고 싶었던 것도 있겠죠.”
그러고는 그가 쉼 없이 얘기한다. 디자인, 아트, 미술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본질의 이야기.
“대중지 인터뷰인데 너무 깊게 들어갔죠? 본질에 대해 얘기할 자리가 많지 않아서요.”
그는 배고파 보였다. 어쩌면 그 배고픔이 그의 작품을 탄생시킨 팔 할일지도.
“직업만 ‘디자이너’인 디자이너가 많아요. 히트 상품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애플과 삼성을 비교해보면, 애플은 화면 안의 개념을 만들었고, 삼성은 그걸 가져와서 사업적으로 잘 푼 케이스죠. 본질은 애플 쪽에 가깝죠. 그럼에도 전 삼성 휴대폰을 사용하지요. 아이러니해요.”
학창 시절 학교보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MTV에서 배운 것이 더 많다는 그는 순수예술을 갈망하던 청춘이었다. 그 시절, 백남준에 열광하고 앤디 워홀을 사모했으며 당시 핫한 국내 작가 최정화를 주목하기도 했다.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한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처럼 디자인적인 개념을 적립한 선구자가 좋고, 그도 대한민국에 그런 디자이너이고 싶다.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미술학원을 쉰 적이 없어요. 부모님이 봉제공장을 하셨어요. ‘아가방’ ‘김민제’ ‘톰보이’ 등 당시 아동복 브랜드의 하청업체였죠. 그래서 옷 잘 입는 초딩이었고요. 공장 누나들이 천 자르고 미싱 돌릴 때 저는 옆에서 스티커를 붙였어요. 그렇게 유년 시절을 보내고 디자이너가 돼 가방을 제작하는데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더라고요. 공장, 디자인, 색감 등등이 생소하지가 않은 거죠.”
“최근의 관심사는 뭐예요?”
“디자인과 아트에 대한 구분. 아니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쓸모 있는 것보다 쓸모없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쓸모 있는 게 오점이 된 거죠. 여기서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가 생깁니다. 몬드리안의 그림과 몬드리안이 유일하게 만든 의자, 이 두 개의 가치는 1백억과 10억이었어요. 이게 무슨 개념일까요? 결국 가구는 유용성이라는 ‘오점’으로 그림에 비해 그 가치가 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쓸모가 있는 것에 가치를 덜 둔다는 것이죠.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면서 쓸모라는 사용성이 생기면 가격을 잃게 돼요. 그 모호한 부분에 대해 작업하고 싶어요.”
“쓸모는 없지만 도도한 인간이 되라는 거네요. 추구하는 디자인의 핵심은 뭐예요?”
“충돌. 전혀 다른 것이 어우러져 사람들에게 묘하게 다가오는 것, 참 매력 있어요.”
“본인에게 부족한 점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에요. 호기심을 좇기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해요. 유명한 디자이너를 보면 한 우물만 파는 분이 많은데, 저는 그 부류는 아닌 것 같아요. 네이버 지식인에 저에 대해 질문이 올라왔어요. 뭐하는 사람이냐고요.
여러 네티즌이 답글을 달았는데, 다른 박진우라는 동명이인 작가 4명을 거론하는 거예요. 그중 3명이 저였어요.”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상대에 따라 ‘맞춤형’이다. 상대가 디자이너를 원하면 디자이너, 크게는 아티스트 또는 작가라고 소개한다. 디테일한 수식어를 원한다면 조명디자이너.
“내 시작점은 뭐니 뭐니 해도 조명이니까요. 저는 금속공예를 전공했고 외국에서 제품 디자인을 공부하고 이후 사진전을 열었어요. ‘뭐 하는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조명 디자이너예요. 스파게티 샹들리에가 저를 세상에 알렸으니까 의미는 지켜야죠.”
코카콜라 작업을 한 지는 올해로 19년이 됐다. ‘코카콜라’는 상상의 원동력이다. 다자인은 이렇듯 삶에 알록달록 색을 입히는 것. 결국 행복과 디자인은 일맥상통한다.
“작업을 하는 데 영감을 주는 디자인이 있나요?”
“언제나 코카콜라병. 음료 자체에는 매력이 없지만 병과 캔, 컬러는 완벽하지요. 그린 에메랄드빛과 그 위에 박힌 독특한 필기체 로고가 맞물린, 예술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코카콜라 작업을 19년째 하고 있어요. 코카콜라병을 이용해 주전자로 만든다든지, 코카콜라에 제 털을 심은 적도 있어요. 하하. 아무튼 제게 좋은 영감을 줍니다.”
그는 왕년에 삼성맨이었다. 그곳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통돌이 세탁기 디자이너. 통돌이라는 놈이 그렇다. 후진국에 팔아치워야 하는 상황인지라 인도, 멕시코 등지로 출장을 갔고, 인도에 갔을 땐 통돌이의 경쟁자가 외국 브랜드의 세탁기가 아니라 강가에서 손빨래하는 아줌마라는 사실도 알았다. 심지어 전기세보다 인건비가 더 쌌으니 그야말로 강적을 만난 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꿈의 직장, 삼성전자를 박차고 나온 이유는요?”
“재미있는 경험이었고, 첫 직장이라 애착도 있었어요. 물론 조직이다 보니 조금 지루한 점도 있었지요. 하지만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것도 많았고, 되돌아보면 제게 큰 도움이 됐어요. 대기업의 메커니즘을 아는 디자이너가 흔하겠어요?”
무료함이 들 때마다 청계천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놀잇감을 찾았다.
“그런 것 있잖아요, 디자인 용도로 쓰지 않는데 디자인적으로 아주 나이스한 것들. 그중 하나가 공사장의 작업등이었어요. 공사장에서 눈에 잘 띄라고 오렌지색, 빨간색 등 색깔이 강렬한 전선이 달린 등이 있어요. 심지어 야외에서 사용하기 편하라고 전선도 아주 길죠. 처음 보는 순간 홈 데커레이션으로 좋은 재료 같았어요. 그 전선으로 샹들리에를 만들었는데 많은 화제가 됐지요. 그렇게 스파게티 샹들리에가 탄생한 겁니다. 빨간 전선을 사용하니 토마토 스파게티, 검은 선을 사용하니 먹물 스파게티라고 불러줬어요.”
한국에서 핫한 아티스트로 살기
그러고 보면 그는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았다. 서울대, 영국 왕립예술학대학, 삼성전자.
“문서상으로는 엘리트이지만 사람만 보면, 글쎄요. 저 서울대 3수 했어요. 최고의 집단 안에서 아웃사이더가 되자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과에서 자신감은 수석감인데 점수는 바닥을 치는 학생이었죠. 최고의 조직도 맹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애먼 것에 집착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의 이점은 분명히 있다. 그는 “관심 없음”이라고 말한다. 그 맹점을 이용할 수 있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배제했다. 안주하는 게 싫었고, 양복 입는 삶이 싫었다.
“퇴사 이후 회사를 차렸는데,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 이른바 전성기를 구가했었죠. 삼성은 아니지만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컬래버레이션을 쉬지 않고 진행했으니까요. 몇 년 그들을 상대하다 보니 영업직 사원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뭐랄까, 돈에 영혼을 파는 느낌이랄까. 앞으로의 10년도 이렇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이 없었어요. 멈춰 있는 나 자신이 두려웠겠죠. 안되겠다 싶어 회사를 때려치우고 영등포 공장으로 들어갔어요. 60년대 방직공장인데요, 공장이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건물이 비게 되어 디자이너들 공동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어요. 작업실 옆엔 카센터가 있고, 그 옆엔 고무공장이 있어요. 봉제공장집 아들이어서 그런지, 공장은 제게 영감을 주는 곳이죠.”
한국에서 아티스트로 사는 것은 어떨까? 핫한 아티스트의 생각이 궁금했다. “거두절미하고 지금 이 순간이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너지 넘치고, 뭐든 받아줄 것 같은 2014년 대한민국의 관대함이 아티스트에게는 마음껏 놀 수 있는 놀이터 같다고 했다.
물론 패션 하면 이상봉, 디자이너 하면 김영세가 전부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지만 환경적인 흐름을 봤을 때 아시아는 현재 지금 가장 핫한 디자인 구역임은 분명하다. 경기 침체와 함께 디자인 정체기에 접어든 고지식한 유럽과는 분명 다르다.
“외국 디자이너들이 홍대 앞에 오면 눈이 휘둥그레져요. 새벽 3시에도 대낮 같은 거리를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죠. 저는 에너지가 아티스트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해요. 마음껏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좋아요.”
환갑 즈음에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디자인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천천히 생각하며 걸어가는 중이다.
“욕심내봤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디자인을 오랫동안 하고 싶어요.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것 따위는 없이 그냥 행복하게 계속 디자인을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20년 뒤, 코카콜라를 마시며 을지로 상가 뒷골목을 누비는 멀쑥한 중년 신사 박진우를 상상해본다.
학교보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MTV에서 배운 것이 더 많다는 그는 순수예술을 갈망하던 청춘이었다. 그 시절, 백남준에 열광하고 앤디 워홀을 사모했다.
유명해지면 짝퉁이 나오기 마련.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스파게티 샹들리에의 90%가 가짜다. 작품은 갤러리를 통해 한정 제작해 판매 중이다. 가격은 3백만~5백만원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