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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강사 김미경 논문 표절 의혹 이후 첫 인터뷰

스타 강사 김미경을 만났다.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그녀가 완전무장한 채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내공이 겹겹이 쌓였다. 논문 표절이라는 꼬리표와 어떻게 맞짱 떴는지, 김미경식 위기 극복법이 궁금하다.

On June 10, 2014

오랜만입니다, 근황부터 들려주세요.
유학이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기간인 ‘3개월’ 동안 미국에서 공부를 했어요. 지난 20년 동안 일주일 이상 회사와 집을 떠나본 적이 없었죠. 심지어 제 소원이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어느 날 문득 내 앞에 다가온 ‘휴식'이 무슨 의미일까. 아팠지만 행운인 게죠. 재해석하면, 불행이 행운이 되어 돌아온 겁니다. 그 생각을 시발로 하나하나 바뀌기 시작했어요. 나한테 불행으로 온 게 행운이 됐다면, 나한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은인이 되는 거네? 내 나이 쉰 살에 3년 같은 3개월을, 그것도 미국에서 쓰고 있구나. 내 운명의 알람은 쉰 살에 유학을 가게끔 세팅되어 있었구나, 하고요.

미국에서의 일상은 어땠나요?
집을 구해서 오롯이 혼자 지냈어요. 재미있었어요. 24시간을 공부만을 위해 썼어요. 오래전부터 영어에 대한 갈증이 있어서 이를 악물고 미국에 간 거예요.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어학원에서 공부했고, 6시부터는 집에서 개인 레슨을 받았어요. 이후에는 집 앞 카페나 슈퍼마켓을 수시로 오가며 대화 상대를 찾았죠. 주말이면 집 앞 공원에 가서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어요. 사실 저는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상황이 두려워서 도피한 건 아니겠죠?
전혀요. 미국에 간다고 도망쳐지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아까 말했듯이 재충전의 알람이 울린 거예요. 예전부터 외국에서 강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다행히 공부할 기회가 온 것이죠.

결국 불행이 행운이 됐다?
고백하지만 콘텐츠가 바닥이 나 있었어요. 막바지 정점을 찍고 tvN <김미경쇼>에서 다 토해낸 상태였어요. 나조차도 꿈을 운운하는 게 식상하던 찰나였어요. ‘논문 표절’ 이후 다양한 경험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유체이탈이었어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불안해하면 결국 불안감이 시간을 다 잡아먹어요. 그런 나라는 사람과 가까이 있으면 더욱 불안해져요. 그래서 내가 나에게서 떠나야 해요. 저는 힘들 때 세월을 뛰어넘어 10년 후로 가서 해석을 하고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요. 마흔 살이 됐을 때 30대 때의 고민을 생각하며 유치할 때가 있듯이요. 결국 나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문제 해결이 간단해집니다. 가까이 있으면 악성 댓글 1백 개에도 무너지는 게 사람이에요. 결국 이번 일을 계기로 엄청난 깨달음이 패키지로 왔어요.

짐작하건대, 당시 악성 댓글이 엄청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안 봤어요. 미국에 있을 때도 포털사이트에 들어가서 제 이름을 검색해본 적이 없었어요. 꼬리표처럼 붙어 있는 ‘김미경 논문 표절’ 이라는 단어를 확인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렇게 피하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내가 내 문제를 넘어서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논문을 읽어보고, 잘못된 부분도 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 오자마자 10여 년 전의 논문을 다시 보니 정말 무지하게 쓴 논문이었어요. 인용은 그렇다 치고 재인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것이죠. 그래서 다 고쳤어요.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지만 어떻게 해결하는지는 내 문제이니까요. 그런 다음 포털사이트에 ‘김미경’과 ‘논문 표절’이 연관되어 검색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매일 들어가서 내가 한 일을 확인했어요.(웃음)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간 셈이네요.
그 과정에서 우울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식의 다양한 감정을 42가지 겪었어요. 예를 들어 ‘논문 표절’이 있은 후 스케줄이 전부 취소가 됐대요. 직원들이 그 사실을 빙빙 돌려 보고하는 거예요.

“그냥 취소됐다고 해, 걱정하지 마!”라고 큰소리 쳤지만 뭐랄까, 기분이 묘했어요. 믿었던 사람에게 차인 느낌이랄까? 그러면 그 감정으로 쑥 들어가게 돼요. 책을 읽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그 감정이 나를 당기는 거예요. 다음 날에 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요. 기자들이 집 앞에 와 있는 거죠. 참 섭섭하다, 하는 감정으로 쑥 들어가요.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어느 정도 회복돼요. 이런 42가지 감정이 매일매일 하루에 하나씩 내 몸에 들어왔다 나가는 거예요. 그럴 땐 몸이 아프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해요. 나중에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이런 일이 안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요. 제가 그랬어요. “내 인생에서 소중한 사건이에요. 논문 표절 그 자체가 저예요”라고요.

생각보다 멘탈이 아주 강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웃음)
호탕하고 유머러스하고 엔터테이너의 기질도 있지요. 하지만 내가 가야 할 방향은 확고해요. 저는 스타나 유명인이 아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한데 어느 날 제가 유명인이 돼 있는 거예요. 심지어 하루에 두 개의 광고 섭외가 들어 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그때 내 심정은 복잡했어요. 선생님으로 살기는 힘들겠구나,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광고요? 말도 안 되죠. 선생이 물건 파는 일을 거들 순 없죠. 돈요? 내가 벌 돈의 총량은 정해져 있어요. 그걸 50년간 나눠 벌길 바라지 한 번에 버는 걸 원치 않아요. 그러면 전 끝나요. 결론은, 위기가 닥쳤을 때 요령껏 위기관리 능력을 동원해 헤쳐 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학생들이, 대중이 내게 실망했겠구나, 하는 감정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

앞으로도 광고를 통해 만날 일은 없는 거죠?(웃음)
전혀요. 그렇다고 돈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에요. 관심 많죠. 그래도 광고는 안 찍는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어도 먹고 살 자신 있으니까요. 쉬운 돈, 근거 없는 돈, 히스토리 없는 돈은 벌면 안 돼요. 누군가는 그래요. 처음 보도를 한 기자가 누구의 제보로 썼는지 궁금하지 않냐고요. 전 궁금하지 않아요. 올 것이기에 수순을 밟아서 온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신문 기사 1면에 나올 수 없어요. 심지어 제가 1층이 아닌 100층에서 떨어진 건 누군가의 시기와 질투가 부른 결과가 아닌,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이었죠.

인기가 올라갈 때 불안한 마음은 없었나요?
첫째,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니까 힘들어요.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사는 시간도 많죠. 넌 밥도 안 먹느냐며 밥 좀 먹자라는 사람이 줄을 서는데, 당시 저는 정말 밥을 안 먹었어요. 밥은 순위에서 엄청 밀려 있는 품목이었던 거죠. 차 안에서 대충 전화받으면서 김밥으로 때운 적이 많았어요. 그러니 행여 주부들 중에서 ‘그럼에도 저 아줌마 부럽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전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 안 부러워하게 부연 설명 좀 해주세요.
집집마다 복이 들어가는 컵이 하나씩 있어요. 인기나 돈, 비즈니스 등으로 어느새 그 컵은 꽉 차게 됩니다. 나머지들은 컵에 들어가지 못하고 컵 밖에서 떨고 있어요. 저는 우리 딸과도 3개월 동안 밥을 같이 못 먹은 적이 있어요. 그와 동시에 사람들에게 인기와 욕을 섞어가며 먹었죠. 인기와 욕은 세트 메뉴이니까요. 결국 컵 밖에 있는 것들이 해결이 안 되는 상황이 온 겁니다. 방법은 하나예요. 컵 안에 있는 것을 싹 비우는 것. 그래야 밖에 있는 것들이 들어와요. 그러니 인기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저요? 컵 안에 있는 것들이 차고 넘쳐서 결국 깨진 거예요. 내가 못 깨니까 누군가 깨준 것이죠.

부모님도 많이 걱정하셨을 것 같아요.
>컴퓨터를 못 하는 아버지가 포털사이트 검색의 도사가 되셨어요. 시골에서 매일 컴퓨터로 제 이름을 검색하셨거든요. 그리고 문자를 보내오세요. ‘미경아, 댓글 보지 마라. 내가 다 봤다. 어제랑 똑같다’ 뭐 그런 내용이었죠.(웃음) 마음에 힘이 생기기 위해서는 필요한 도구가 몇 가지 있어요. 좋은 말을 해주는 친구, 깨달음을 주는 사람, 내 상황에 맞는 좋은 인용글 등등…. 한 지인이 제게 그런 말을 했어요. 칭찬이 아닌 욕으로 정진하는 경우도 있다고요. 그러니 다 받아들이고 욕을 먹으라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저는 그 방법이 통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지는 않아요. 담담해지려면 마음에 에너지가 무지 쌓여 있어야 하거든요.

논문 표절을 계기로 <김미경쇼>에서 하차했을 때는 기분이 남달랐을 거 같아요.
강연을 끝내고 공항에 내렸는데, 휴대폰 전원을 켜는 순간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하차와 관련된 보도 자료의 내용이었어요. 두세 줄 읽었을까,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사람들이 쳐다봐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차에 탄 순간부터 대성통곡했어요. 내가 낳은 자식을 키워보지도 못하고 남의 집 앞에 버리고 온 기분이랄까요.

전현무씨와 함께 JTBC 토크쇼 <나만 그런가>로 컴백을 합니다.
저는 방청객 모집부터 방청객들 방석이 제대로 깔렸는지, 행여 경비실 아저씨가 방청객들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는지까지 참견하는 스타일이죠. 성품이 그러하니 이번에도 열심히 하겠죠. 얼마 전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미경아, 사람들이 너한테 뭘 보고 싶은지 알아?” 역으로 물었어요. “너는 다시 나온 나에게 뭘 보고 싶니?” 친구의 답은 진리였어요. “똑같았으면 좋겠어. 여전히 밝고 씩씩했으면 좋겠어.”

행여 주눅 들까 봐 그런 거죠. 예전에 강호동씨처럼 내지르던 사람이 조금이라도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대중은 바로 알아차리고 함께 눈치를 보니까요.
그런 건 있어요. 나란 사람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가 느낀 건 많아요. 예전에 내 강의는 꿈이면 다 돼, 라고 얘기했어요. 물론 지금도 꿈이 인생에서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인생에서 얘기치 못했던 운명의 사건이 얼마나 많아요? 예를 들어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사업이 쫄딱 망한다든지 하는 거요. 그런 일은 집집마다 다 있어요. 제가 그 운명에 대해서 심도 있게 얘기한 적이 없어요. 이제는 꿈과 운명의 밸런스를 맞춰 안 했던 얘기를 할 수 있게 됐어요.

멘토로 사는 것, 힘들죠?
카카오톡으로 자주 대화하는 스님이 계세요. 출가한 지 10년이 된 30대 스님이세요. “원장님, 저는 스님으로 사는 게 싫습니다. 사랑할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은데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수행자로 사는 게 힘드네요.” 제가 대답했어요. “스님, 이번 생은 접으시죠. 한 생에 하나씩 하고, 못한 건 다음 생에 하시죠.” 저도 이번 생에는 이렇게 살려고요. 유명해진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틀에 갇혀 살게 돼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요?
내가 좀 독특해요. 일이 없을 때 외에는 스트레스를 거의 안 받아요. 내 유용가치가 떨어지면 불안하니까요. 우울증, 슬럼프, 스트레스 같은 말은 쓰지도 않아요. 자기의 무력감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편한 말로 규정지어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건들지 않으니까요. 근데 그 슬럼프를 깊게 파고들면 원인이 있어요. 공부를 안 해서, 휴식을 취하지 않아서,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가서, 누군가에게 져서 등등. 그 원인을 얘기하면 되는데, 그걸 슬럼프라고 줄여서 말하는 거예요.

아닌 말로, 열정 넘치는 사장 때문에 직원들이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요.
인정해요. 실제로 사흘 전에 트위터에서 이런 내용을 봤어요. ‘김미경 그리고 법륜 스님은 내게 폭력적인 사람이다. 왜 호통치고 위로하고 착한 어른 코스프레를 하는가. 나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면 무관심이 더 좋다.’ 그 글을 읽고 반성을 했어요. 맞아요, 다수의 이야기를 만인에게 적용할 수 없어요. 그 논리는 분명 잘못된 겁니다. 그간 10명 중 7명이 좋아하는 얘기를 해왔다면 이제는 나머지 3명에 대한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제를 바꿔볼까요, 어떤 엄마인가요?
나다운 엄마. 저는 다른 엄마 흉내 따위 안 내요. 왜냐면 우리 애들은 이미 김미경이라는 여자에 최적화된 아이들이니까요. 큰딸은 올해 대학교 4학년이 됐는데, 우여곡절이 말도 못해요. 내가 지금 태어났다면 저렇게 살았겠구나 싶어요. 공부요? 공부를 안 하는 아이들은 그 시간에 다른 걸 채워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어려워요. 우리 딸은 미술을 전공했는데, 휴학을 하고 그림을 사고파는 사업을 해요. 초기 비용 1천만원을 갚는 조건으로 투자했습니다. 사업이 적성에 맞는다면 졸업을 안 해도 상관없어요. 그 아래로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아들이 있는데, 최근에 당당히 자퇴를 하셨지요.

진정 김미경에게 최적화된 아이들이네요.(웃음)
일본에서 음악 공부를 하겠다며 유학을 갔어요. 방사능요? 지 팔자대로 사는 거죠. 두어 달 됐어요. 현재는 어학코스를 밟고 있는데 며칠 전에 전화가 온 거예요. 일본에서 교회를 갔대요. 내 강의를 많이 들어서인지 살 방법을 스스로 찾는 데 도사가 됐어요. 교회엔 사람 있고 밥이 있고, 심지어 사람 삐죽거리지 않게 전도도 해주니까요. 심지어 얘는 재즈 피아노를 치니까 교회에서 VIP 대접을 받은 거죠. 우연히 뮤지컬 반주를 했는데 상도 받았대요.

아들의 자퇴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이 없었나요?
처음엔 반대했죠. 한데 자퇴를 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한 뒤 응원해줬어요. 아이가 매사에 의욕 상실이었고 학교에도 안 갔어요. 어렸을 때 피아노를 잠깐 치다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예고를 간 거예요. 악보를 잘 읽지 못했지만 절대음감이 있어 재능을 인정받았어요. 문제는 입학 이후 10년간 꾸준히 레슨을 받아온 아이들 앞에서 매일매일 무너지는 거예요. 자존감이 상실당했죠. 그걸 아이가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실제로 많은 엄마들이 자녀의 고뇌 앞에서 무식해요. “그럴수록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피아노를 쳐야지!” 하니까요. 엄마들은 초감성적인 내 아이를 이해하지 못해요. 저는 자식이 발가벗고 전위예술을 한다고 해도 안 부끄러워요. 엄마와 자식 사이일 뿐 우리는 개별 운명이니까요. 너는 네 맘대로 살아, 하지만 서로를 응원하고 지원하는 것이죠. 자퇴하던 날, 집에 플래카드를 걸어줬어요. 실사 출력 1만5천원. 매사에 의욕이 없던 아이가 유학생활 2달 만에 완전히 변했어요. 자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죠. 막내는 천방지축, 11살짜리 딸이에요.

잊을 만하면 하나씩 낳았군요?
재미있어요. 아이들로부터 나오는 진하고도 무한한 콘텐츠를 통해 저는 인생을 배웁니다. 저는 아이들이 중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함께 여행을 가요. 이른바 파트너십 선언이죠. 이것들이 내가 누군지 알 때가 됐다는 것이죠. “나 너희 엄마 아니야. 나 김미경이야” 하고 선언해요. “내가 네 엄마 되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난 한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네 엄마가 아니었어. 26세 때 갑자기 네 엄마가 된 거야. 착각하지 마. 난 네 엄마라는 역할도 성스럽게 수행하고 있는 좋은 여자란 말이야!” 하고 제 히스토리를 얘기하죠. 내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내 꿈과 운명을 이야기해요. 그걸 이해해야 파트너가 될 수 있죠. 그렇게 여행을 다녀오면 아이들이 부쩍 달라져 있어요. 김미경이라는 여자의 삶을 보는 거죠. 저 역시 공부가 가장 중요한 중학교 3학년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무지 많고, 앞으로 거친 운명을 살아야 하는 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죠.

아이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꼰대 엄마는 아니구나, 할아버지에게 반항한 걸 봐서 나랑 똑같았네, 하는 동질감을 느끼죠. 상태 괜찮은 엄마였네, 하고 결론 내리겠죠.

어떤 아내인가요?
김미경 같은 아내. 역시 다른 아내들과 비교 불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결혼한 이후 가장 다이내믹하게 변합니다. 서른 즈음부터 환갑까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뤄요. 결국 모든 성장은 결혼 후에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남자 역시 남편이 된 이후 남자다워져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남편은,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인가? 절대 그럴 리 없죠. 행여 그렇게 세팅된 로보트라고 할지언정 한국에 떨어지면 변질될 거예요. 결국 시간이 약이에요. 같은 잔소리를 10년 이상 어떻게 하겠느냐고요. 같은 게 반복되면 그걸 삶으로 인정해버리죠. 어떤 부부든 배우자와의 갈등은 시간이 70%는 해결해준다고 봐요. 뭉개면 해결되더라고요.

자, 이제 인생의 전환점을 돌았습니다. 기분이 어떤지요?
나의 액션도, 사람들의 액션도 기대가 됩니다. 설레기도 하죠. 한편으로는 나의 깊이 있고 넓어진 생각을 예전과 같은 ‘fun’에 어떻게 담을까 고민도 돼요. 두려움요? 없다면 거짓말이고요. 다만 앞으로 제게 생각지 못한 걸림돌이 닥치면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 준비는 돼 있습니다. 그렇게 큰 틀에서는 두려움이 없지만 작게 쪼개서 보면 두려움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제 꿈은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강의를 하는 거예요. 강의할 때 가장 행복하고, 가장 김미경다우니까요.

이렇게 깨달음이 패키지로 온다면 10년 뒤 한 번 더 시련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괜찮은 장군은 태어나서 세 번 망가져야 나온다는 말도 있잖아요.
악담을! 섭리대로 합시다!(웃음).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뒤 남아 있는 숙제는 본인 몫이다. 그녀는 김미경답게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비 온 뒤 땅이 굳는다.

CREDIT INFO
취재
하은정
사진
박원민
2014년 03월호
2014년 03월호
취재
하은정
사진
박원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