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2주에 한 번씩 언니랑 자수클럽에 가는데 재밌어 죽겠어. 자수가 원래 내 취향이었나 봐.” (배우 양희경)
“앉아서 수를 놓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니까. 점심 먹고 시작했는데 어느새 저녁이래.” (가수 양희은)
자매의 깨알 같은 수다에 집 안에 온기가 돈다. 가수 양희은, 배우 양희경 자매는 얼마 전부터 자수클럽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게 다 엄마 윤순모(85세)씨 덕분이란다. 엄마는 자매가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 옷에 수를 놓기도 하고 헝겊 조각을 이용해 퀼트를 하곤 했다. 엄마가 이것저것 사 모은 재료들이 양희은씨 집 다락에 한가득 있다. ‘이걸 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에라, 나라도 한 번 써보자’ 하는 생각에 자수를 시작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양희경도 가세했다.
“엄마는 털실로 뜨개질을 했고 헝겊 조각들을 덧대 옷을 기워 입혔어요. 두 무릎에 구멍이 나면 양쪽을 똑같은 색으로 기워주는 법이 없었죠. 그래서 한쪽 무릎엔 데이지가, 다른 무릎엔 튤립이 새겨져 있었어요. 길 가던 사람이 세워놓고 ‘얘, 그 옷 누가 만들어줬니?’ 하고 물을 정도로 엄마는 솜씨가 좋았죠.” (양희은)
“우리 자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옷을 입고 자란 거예요. 비록 나는 언니 옷을 물려받아 입었지만.(웃음)” (양희경)
양희은씨 집 이곳저곳에 엄마 윤순모씨의 ‘취미생활의 흔적’들이 눈에 띈다. 테이블과 의자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도 있고 직접 만든 퀼트 가방도 보인다. 취미라고만 하기엔 솜씨가 수준급이다. 자매는 그런 엄마의 취향과 손재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노후에 즐길 취미로는 이만한 게 없어요. 계속 손으로 바삐 만드니까 시간도 잘 가죠. 노년 취미생활의 중요한 포인트가 ‘혼자 즐기는 걸 하라’는 거예요. 짝과 함께 다니다 보면 누가 먼저 떠났을 때 취미도 함께 그만두게 되잖아요. 자수는 그럴 일 없으니까 좋죠.” (양희은)
자매가 나란히 앉아 자수를 하니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엄마는 일생을 외롭게 살았다. 딸만 셋을 낳자 실망한 아버지가 밖으로 나돌았던 것. 어느 날 부부가 크게 다투고 엄마가 친정으로 가 있었는데 그 길로 새어머니가 집 안에 들어앉았다. 얼마 후 아버지는 집 문제로 처리할 것이 있다면서 엄마에게 도장을 보내라고 했다. 그것으로 이혼이었다. 세 딸도 뺏겼다.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쉬지 않고 손을 놀렸을 엄마를 생각하니 왠지 짠했다.
“저걸로 외로움을 달랬던 게 맞아요. 집에만 있다 보면 밖에 나갈 일이 없어 우울해지는데, 헝겊 조각들로 퀼트를 하고 재봉질로 옷을 만들면서 시간을 보냈죠. 그러면 그 핑계로 재료 사러 동대문시장에도 나가고 그랬으니까요.” (윤순모)
모녀는 서로에게 꿈을 주는 존재다.
엄마는 딸들의 옷을 기워 입히며
꿈을 키웠고, 딸들 역시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내일을 꿈꾼다
솜씨 좋은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한 후 서울 소공동에 양장점을 차렸다. 하지만 그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고 양장점에 불이 나 쫄딱 망하기도 했지만, 손재주 하나만은 그대로였다. 큰딸 양희은은 어려운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가수로 나섰다. 엄마는 공연장에서 기타를 치는 딸을 위해 나무 발판에 예쁜 꽃그림을 그려 넣어주었다.
엄마는 딸 양희은을 따라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아트스쿨에 다녔다.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하루는 아트스쿨에서 ‘패브릭 콜라주’를 배우는 시간이 있었는데, 아이들 옷을 예쁘게 기워 입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엄마가 예전부터 해온 게 ‘패브릭 콜라주’고, ‘패치워크’였죠. 다만 엄마는 그게 ‘작품’이 될 줄은 몰랐던 거예요. 엄마가 워낙 잘하니까 아트스쿨 사람들이 다들 놀라더래요. 저는 지금도 엄마의 여러 작품 중 ‘패브릭 콜라주’ 작품들이 가장 좋아요.” (양희경)
엄마는 배우로 일하느라 바쁜 둘째 희경과 대학교수로 일하는 셋째 희정씨의 아이들을 대신 돌봐줄 때도 솜씨를 발휘했다. 손주들이 좋아하는 인형과 장난감의 집을 만들어주는 센스 있는 할머니였던 것. 그러던 어느 날 큰딸 희은이 제안했다.
“엄마, 칠순 때 잔치 대신 전시회 여는 게 어때?”
그렇게 해서 윤순모씨는 1999년 강화의 한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말로는 ‘귀찮다’고 하면서도 보름간이나 강화에 머물며 화랑을 찾는 사람들을 손수 맞이했다.
“그저 좋아서 만든 것들이잖아요. 그게 작품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하나둘씩 작품이 쌓여 개인전을 여니, 무척 흥분되더라고요.” (윤순모)
그때 전시한 작품은 퀼트로 만든 침대 덮개, 손바느질로 만든 가방, 포크아트로 장식한 가구 등 생활용품이었다. 작품 하나하나는 곧 윤순모씨의 일상이었다. 양희은·양희경의 엄마가 전시회를 연다고 하니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온 사람도 많았다.
“엄마가 그때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화랑 근처 목욕탕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윤순모 작가님 아니시냐’면서 알아봐주시더래요. 관심을 많이 가져주신 덕에 강화의 고속버스터미널도 많이 붐볐죠.” (양희은)
윤순모 작가의 첫 번째 전시회는 그렇게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때 만든 도록은 엄마 윤순모씨가 살아온 인생을 정리한 한 권의 자서전이 됐다. 작품을 살 수 없느냐고 문의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팔지 않았다. 작품을 세 자매에게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나서 팔순 때도 잔치 대신 전시회를 열어드리자고 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일흔아홉, 여든쯤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신 거예요. 결국 그때 전시회를 못 열고 엄마도 한동안 쉬셨어요.” (양희경)
다행히 윤순모씨는 이내 건강을 되찾았다. 꼭 한 번 배워보고 싶었다는 유화를 배우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문화센터에 나간 지도 꼬박 2년이 됐다.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 중에 최고령이란다. 여든이 넘어서도 불타는 엄마의 열정은 세 자매를 놀라게 했다.
강화에서 전시를 연 지 15년. 딸들은 ‘더 늦기 전에’라는 생각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어드리기로 했다. 대학로 샘터갤러리에서 5월 28일부터 2주간 열리는 이번 전시는 ‘엄마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퀼트, 가방, 포크아트, 가구, 생활용품, 유화 등 윤순모 작가의 작품 50여 점을 전시한다.
“엄마 연세가 여든다섯이니까, 어쩌면 이번 전시는 엄마의 마지막 전시가 될지도 몰라요. 저 역시 요즘 제 인생의 마지막 음반을 준비하고 있어요. 제 노래 ‘한계령’이 대중에게 알려지기까지는 5년이 걸렸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7년이 걸렸어요. 제 나이가 지금 예순셋이니까, 제 노래가 알려질 때쯤이면 저는 일흔이겠죠. 여든다섯의 엄마가 이번 전시를 위해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번 전시에 제 나이 또래들이 오면 재밌게 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양희은)
“딸들만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엄마도 재능이 있잖아요. 엄마의 재능을 모아서 잔치를 해드릴 수 있어서 기뻐요.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니까, 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오셔서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동년배끼리는 또 통하는 게 있으니까 아마 좋아하실 거예요.” (양희경)
“15년 전에 강화에서 연 전시처럼 따뜻하고 아늑한 전시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런 건 나도 하겠다’ 하셔도 좋고, ‘여든 넘어 저걸 다 어떻게 했을까?’ 하셔도 좋아요. 많은 이들에게 ‘할 수 있다, 늦지 않았다’는 꿈을 주는 전시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윤순모)
윤순모씨와 세 딸은 서로가 서로에게 꿈을 주는 존재다. 엄마는 딸들의 옷을 기워 입히며 꿈을 키웠고, 딸들 역시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내일을 꿈꾼다. 딸만 셋을 낳아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속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딸 셋이 있기에 세상의 그 어떤 엄마보다 행복하다.
어머니의 작품
1 여인(패브릭꼴라주)
2 딸들의 어릴 적 모습을 윤순모 작가가 스케치한 것.
침대커버와 쿠션들.
윤순모씨와 세 딸, 그리고 증손녀.
1 테이블(포크아트)
2 보석함들(포크아트)
작업실에서 퀼트작업을 하고 있는 윤순모 작가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