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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돌뱅이’의 전국 맛 기행 6

경주의 ‘옹골진’ 맛

신라의 숨결이 흐르는 천년 고도 경주는 특별하다. 음식도 그렇다. 3백 년 넘게 이어온 고집스러운 맛부터 그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특허’ 음식들이 잊지 못할 추억을 더한다. 14년 차 맛집 전문 리포터 ‘맛돌뱅이’ 박범수씨와 떠난 경주 식도락(食道樂) 여행.

On March 17, 2014


“불국사, 석굴암만이 경주의 전부는 아니에요. 오랜 역사를 거쳐 완성된 옹골진 음식 문화는 보고, 느끼고, 즐기는 재미가 있어요. 3백 년 넘게 이어온 최씨 부잣집의 가정식,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것 같은 특허 받은 갈비찜, 달달한 황남빵 등 어느 것 하나 반짝 얻은 ‘유명세’가 아닌 전통이 있는 음식이에요.”


낭만주의적 경주!
서정주 시인은 ‘오, 하늘보담 아름다운 낭만의 왕국이여! 경주 사람은 로맨티스트라야 하오’라며 경주를 예찬했다. 신라의 숨결이 도시 곳곳에서 흐르고 있는 천년 고도 경주는 절로 노래가 나올 만큼 낭만적일 수밖에 없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도 저마다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뭔가 아련한 감성을 자극한다. 특히 한국인에게 경주는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수학여행지로 특별하게 다가온다. 풋풋했던 시절의 사랑 이야기부터 친구들과 철없이 놀던 순간까지 추억 예찬이 시작된다. 더욱 재밌는 건 신라 천년 고도의 전통을 지키느라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모습에 배신당하지 않은 안도감마저 느껴진다. 경주는 개발 제한 규제를 받는 지역이라 건물의 고도를 제한해서 하늘로 솟아오른 건물이 없고 오래된 것은 보존해야 한다고 믿으니 쉬 고칠 수도 없다. 덕분에 차를 타고 가면서도 고분, 왕릉, 안압지, 향교 등 유적지를 두루 둘러볼 수 있어 재미가 있다.
오늘날 경주를 더 빛나게 하는 것은 오랜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전통 음식들이다. 3백 년 넘게 명맥을 이어오는 경주 최씨 가문의 반상 차림은 이미 경주 사람들 사이에서 ‘워너비’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이 집안의 절제가 담긴 상차림은 맛이며 모양이며, 심지어 건강에도 특별함을 보인다. 특히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경주 최씨 14대 며느리가 선보이는 ‘수란채’는 사전 예약을 해야 맛볼 수 있다. 수란채는 손수 갈아 만든 잣과 소금, 식초, 설탕을 섞어 만든 국물에 해삼과 문어, 전복, 대게, 쑥갓을 넣고 뜨거운 물에 익힌 수란을 띄워 먹는 최 부잣집의 전통 음식이다. 제1회 전국고기요리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갈비찜도 빼놓을 수 없는 경주의 진미. 찹쌀을 뿌려 만든 ‘흰눈소갈비찜’은 말 그대로 갈비찜 위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것 같아서 보는 맛도 일품이다. 고구마도 곁들여져 여러 가지 식감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지역을 가든 시장 음식은 꼭 맛봐야 아쉽지 않다. 경주역 근처에 있는 성동시장에는 기본 30년 이상 한자리를 지킨 분식집들이 즐비하다. 우엉김밥, 찹쌀순대 등 단돈 3천원에 소박하지만 인정 넘치는 따뜻한 손맛에 배가 절로 부르다. 마지막 디저트 코스로 부드러운 빵 속에 단팥이 가득한 경주의 대표 주전부리 황남빵도 꼭 먹어봐야 한다. 그 옛날 동네 빵집의 달달한 단팥빵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경주의 대표 주전부리인 황남빵과 보리빵.

신라시대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이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알려진 첨성대는 최근 피사의 사탑처럼 점점 기울어가고 있다.

개발 제한 지역이라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만큼 경주를 제대로 알려면 천천히 자전거로 여행을 해도 좋겠다.

경주엔 집이며 가게, 주유소까지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다. 도시 한가운데 낮은 층수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고분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는 대릉원에선 천마총을 비롯해 미추왕릉·황남대총 등을 두루 둘러볼 수 있다.


“경주는 동해안을 따라서 아래로 내려오는 태백산맥이 끝나는 지점이에요. 태백산맥이 막았던 바닷가와 평야 지대가 만나는 지점인 거죠. 그래서 각종 해산물과 곡물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어요. 그 덕에 산해진미가 풍성한 반가의 음식 전통이 잘 이어지는 것 같아요.”


맛돌뱅이 추천! 경주 ‘먹방’ 로드

솔직히 말하자면 경주 하면 불국사만 떠올랐다. 신라의 유적을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야외 박물관이자 수학여행지 정도로만 경주를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맛돌뱅이 박범수씨와 떠난 식도락 여행에서 경주의 진짜 맛을 깨달았다.


경주 최씨의 ‘귀한’ 반상 차림, 요석궁
‘부자(富者) 3대(三代)’라는 말처럼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지만 경주 최씨 부잣집은 3백 년 동안 가문을 지키고 있다. ‘만석 이상은 사회에 환원하라’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마라’ 등 경주 최씨 집안의 철학은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한데, 그중 ‘과객 대접을 후하게 하라’ ‘주변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지침은 오늘날 ‘요석궁’이라는 음식점을 내기에 충분했다. 요석궁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던 궁터이자 경주 최 부자의 터였던 만큼 오래된 한옥과 2백 년 넘은 고목이 특유의 기품 있는 분위기를 전한다. 반월, 계림, 안압, 요석 등 유적지의 이름을 딴 한정식 코스 요리로 해물버섯잡채, 생선구이, 한방삼겹구이, 갈비찜 등을 맛볼 수 있는데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만큼 술술 잘 넘어간다. 특히 14대 종부가 정성껏 만드는 집장, 육장, 멸장은 꼭 맛보아야 할 별미. 삭힌 메주와 갖은 채소를 섞어 발효시킨 집장, 고추장과 쇠고기를 조려 만든 육장, 소금에 절인 멸치를 7 시간 조린 멸장은 그때그때 만들어 맛이 깊고 진하다. 경주 최씨 집안 철학에 따라 정성껏 후하게 대접하려다 보니 품질 좋은 재료에 손품도 많이 들어 코스 가격이 3만~13만원대로 부담스러운 건 사실. 그래서 얼마 전 요석궁 바로 옆에 ‘최가밥상’(054-775-7557)이라는 세컨드 브랜드를 론칭했다. 예로부터 경주 최씨 집안에 잔치나 행사가 있을 때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내던 1인 1상을 선보이는데, ‘쇠고기에 쌀밥’ ‘경상도식 비빔밥’ ‘뚝배기불고기’ 등의 정식을 1만3천원에 맛볼 수 있다. 가족 행사나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는 ‘요석궁’, 여행을 가거나 가벼운 모임을 할 때는 ‘최가밥상’으로 가면 최씨 부자의 음식 문화를 접할 수 있다.

  • SHOP INFO

    가격_
    안압정식 9만9천원, 요석정식 13만2천원, 수란채 5만5천원(요석정식 이상 사전 주문 가능)
    주소_경북 경주시 교동 59
    문의_054-772-3347


눈이 내리는 갈비찜, 홍은식당
부모님의 생신상에 케이크 대신 올린다는 ‘흰눈소갈비찜’은 이미 경주 사람들에겐 유명한 메뉴다. 케이크 대용까지 한다니 유별나다 싶었는데 막상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눈처럼 소복하게 쌓인 흰 찹쌀과 샛노란 단호박, 불그스름한 대추의 조화가 눈에서 먼저 배가 부르다. 더욱 놀라운 건 만드는 과정에 생각보다 꽤 정성이 깃들어 감동스러울 정도다. 생고기를 2시간 동안 물에 담가 핏기를 뺀 후 대파, 양파, 사과, 배, 생강 등 8가지 재료와 함께 냄비에 넣어 40분간 끓이는데 신선한 맛을 내기 위해 매일 소량씩 손질한다. 그다음 고기를 재우는 집된장, 표고버섯 등 10가지 재료로 맛을 낸 홍은식당표 특제 소스는 김형순 사장이 인기 비결로 꼽을 만큼 정성이 농축되어 있다. 대나무 찜틀에 섬유질이 풍부한 고구마, 단백질이 많은 고기, 카로틴이 함유된 단호박 등을 켜켜이 쌓아서 찌면 서로의 시너지 효과로 고기의 기름기는 빠지고 담백한 맛은 한층 살아난다. 흰눈소갈비찜은 제1회 전국고기요리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특허까지 받은 토속 메뉴로 경주 토박이는 물론 관광객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갈비찜에 곁들어 나오는 시래기국도 별미.

  • SHOP INFO

    가격_
    흰눈소갈비찜 4만2천원(대), 3만2천원(중)
    주소_경북 경주시 동천동 799-8
    문의_054-772-8450


30년간 이어온 우엉김밥, 성동시장 보배김밥
경주역에서 나와 황성동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좁은 골목 사이로 ‘먹자골목’이 펼쳐진다. 바로 이곳이 성동시장이다. 종로에 ‘김떡순’이 있듯, ‘경주의 김떡순’이라 불리는 우엉김밥, 떡볶이, 찹쌀순대가 성동시장의 명물이다. 식도락 여행객들의 말을 빌리자면 떡볶이와 순대도 맛있지만 경주에서 즐기는 달달한 우엉김밥이 제맛이란다. 성동시장 내에는 우엉김밥을 판매하는 가게가 여럿인데 먹자골목 초입에 위치한 보배김밥이 원조다. 다른 집에 비해 먹음직스럽게 잘잘 흐르는 우엉의 윤기며 조금 더 달라고 할 때 인색하지 않게 한 움큼씩 퍼주는 아주머니의 인심은 분명 다른 포스를 풍긴다. 매일 아침마다 우엉을 손질해 물엿과 간장에 조리는데 그 황금 비율을 묻자 ‘내 맘대로’라며 그때그때 다르단다. 얼마나 우엉이 맛있는지 우엉조림만 사러 시장을 찾는 경주 토박이도 많다. 시장에서 김밥집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지만 30년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은 아마 여기뿐이지 않을까 싶다. 화통한 성미의 할머니가 만든 우엉김밥은 어릴 적 소풍 가서 먹던 추억의 김밥을 생각나게 한다.

  • SHOP INFO

    가격_
    우엉김밥 3천원
    주소_경북 경주시 성동동 57-2
    문의_054-772-7675
CREDIT INFO
기획
김은혜
사진
김연지
일러스트
김일영
2013년 10월호
2013년 10월호
기획
김은혜
사진
김연지
일러스트
김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