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그녀는 안방극장에 혜성처럼 데뷔했다. KBS2 TV <성장드라마 반올림>의 여주인공 ‘옥림이’ 역을 맡아 왈가닥 여중생 연기를 선보인 것. 결과는 성공이었다. 14세 나이에 꼭 맞는 캐릭터로 시작부터 대표작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후로 10년은 인고의 세월이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쉴 새 없이 도전했지만 어느 하나 흥행작이 없었다. 당연히 연기력에 대한 좋은 평가도 받지 못했다. 결국 대중에게 고아라는 ‘옥림이’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2013년, 마침내 고아라는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tvN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로 날아올랐다. <응사>는 평균 8% 안팎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고아라는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와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게 ‘옥림이’는 ‘나정이’가 됐다. 더 이상 고아라는 얼굴만 예쁜 CF 스타가 아닌 연기자로 인정받았다. 데뷔한 지 꼭 10년 만이었다.
“늘 변신을 위해 노력했어요. 이번엔 철저히 망가졌죠. 긴 생머리를 더벅머리로 싹둑 자르고, 살도 7kg이나 찌웠거든요. 연기를 어떻게 했냐고요? 글쎄요, 뭐 열심히 하는 거죠. 무작정요.(웃음) 그렇게 전 나정이가 됐고, 옥림이를 지울 수 있었어요.”
# “옥림이의 굴레… 배우라면 변신해야죠”
사실 고아라의 10년을 되짚어보면 변신의 연속이었다. 칭기즈 칸의 두 번째 부인(한·중·일 합작 영화 <푸른 늑대-땅 끝 바다가 다하는 곳까지>), 도도한 신인 배우(SBS TV <눈꽃>), 천재 발레리나(일본 영화 <스바루>), 가수 지망생(영화 <파파>), 장대높이뛰기 선수(영화 <페이스메이커>) 등 다양한 역을 소화했다. 쉬운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매번 어려운 역할만 골라 도전해왔다. 그만큼 연기에 대한 열망이 컸다. 고아라는 “배우로서 못 해본 캐릭터가 너무나 많다. 그 때문에 매번 변신을 주 과제로 삼아 노력하고 있다”면서 “흥행 여부를 떠나, 속된 말로 ‘필’이 오는 작품이 있으면 선택하는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곧 ‘옥림이’를 지우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실제로 고아라는 <응사> 제작진과의 사전 인터뷰에서 속내를 드러내며 눈물을 쏟은 바 있다. “옥림이 이미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며 “어느 순간 이렇게 살아도 될까 걱정했다. 기존의 이미지를 깨고 싶었다”라고 고백했다. 그렇게 출연을 결정한 드라마가 <응사>였다. 고아라는 “그동안 망가지는 캐릭터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서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를 믿고 시놉시스조차 받지 않은 상태에서 ‘콜’을 외쳤다”라고 전했다.
“이우정 작가님이 저를 보자마자 ‘아라씨를 어떻게 망가뜨릴까?’라고 물으시더라고요. 정말 멋지지 않아요? 그 말에 바로 꽂혔어요. 어디까지든 망가질 수 있으니 시켜만 달라고 대답했죠. 먹방·방귀·변기 신 등 전부 다 하고 싶다고요.”
# “20년 거스르는 방법… 고아라를 지워라”
하지만 ‘성나정’에 빙의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기존의 예쁜 이미지를 버리는 게 우선이었다. 외모 변신이 필수였던 것. 고아라는 그간 고수해오던 긴 머리부터 싹둑 잘랐다. 면도칼을 이용해 엉망으로 층을 냈고, 1994년도 스타일을 완성했다. 좀 더 평범(?)한 여대생이 되기 위해 살도 7kg 이상 찌웠다. 덕분에 진짜 고아라까지 지울 수 있었다.
“캐스팅 논란요? 사실 부담이 됐죠. 제가 나정이와는 안 어울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최대한 제 모습이 안 보이게 하려고 살을 많이 찌웠죠. 극 중에 먹방 신이 많잖아요?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감사하게 잘 먹었습니다.(웃음)”
생전 입어본 적 없던 구제 의상에도 도전했다. 고아라는 “제작진이 직접 구제시장에서 20년 된 옷을 구해 왔더라”면서 “입으면 정말 퀴퀴한 냄새가 나는 옷들이다. 내가 진짜 20년 전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사투리다. 고아라는 “내겐 외국어보다 힘들었다”면서도 “친척들이 경상도에 많이 살고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쓰던 사투리를 되새기며 부단히 노력했다. 마산·진주·부산 사투리를 낯설지 않게 섞어 사용했다”라고 말했다. <응답> 시리즈의 필수 코스, 빠순이 캐릭터도 섬세하게 준비했다. 극 중 농구 선수 이상민의 열혈 팬으로 변신했던 고아라는 “사실 SES, 핑클, HOT, 젝스키스 시대가 나와 맞는다”라고 고백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마지막 승부>나 농구대잔치 영상 등을 전부 구해 봤다. 신문 자료도 스크랩하고, 열심히 공부했다”라고 설명했다.
# “성나정으로 변신… 주변 도움도 컸죠”
만반의 준비를 한 덕분일까? <응사> 촬영은 시작부터 순조로웠다. 거친 욕설과 몸싸움, 사투리, 빠순이 연기, 자장면 먹방 등 여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장면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미스 캐스팅 아니냐’는 숱한 우려에 제대로 한 방을 먹인 셈이다. 하지만 고아라는 과찬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사실 나정이와 내 실제 모습이 정말 비슷하다”면서 “지인들이 방송을 보고 나면 ‘저게 네 실제 모습이란 걸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문자를 보내곤 했다”라고 말했다. 성나정 캐릭터가 자신과 닮았다는 것이다. 동료 연기자들과의 호흡 또한 좋았다. 특히 정우(쓰레기 역)와는 찰떡 호흡을 보여주었다. 고아라는 “정우와는 정말 교감도가 남달랐다”면서 “예를 들어 20회 때 쓰레기와 재회하는 장면에선 정말 마음을 담아 울었다. 밤샘 촬영임에도 몰입도가 정말 높았다”라고 회상했다.
덕분에 애드리브도 쏟아졌다고. 17회 ‘거꾸리’ 신이 대표적으로, 쓰레기가 생일 선물로 반지 대신 거꾸리(척추 디스크용 운동 기구)를 주자 화를 내는 장면이다. 여기서 고아라는 정우가 탄 거꾸리를 위아래로 흔들고, 주먹으로 때리며 웃음을 유발했다.
“감독님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거든요. 그래서 애드리브도 많았죠. 특히 기억나는 장면은 ‘거꾸리’ 신이에요. 생각나는 대로 표현했는데, 재밌게 잘 나온 것 같아요. 촬영 현장에서도 다들 빵 터졌죠.”
# “쪽잠, 부상 투혼… 어떻게 버텼냐고요?”
그러나 모든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잠과의 사투가 계속됐다. 촬영 종료 한 달 전부터는 쪽잠을 자며 촬영하는 등 강행군을 이어가야 했다. 비축해둔 체력은 이미 바닥날 대로 바닥난 상태. 고아라는 이를 악물고 정신력으로 버텨야 했다.
“막바지에 나정이 분량이 많았잖아요. 밤을 정말 많이 새웠어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1~2시간밖에 못 자며 촬영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겨울이다 보니 무척 춥기도 했고요. 졸리고 춥지,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설상가상으로 부상도 입었다. 촬영 도중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수술을 요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고아라는 드라마의 완성도를 위해 응급처치만 한 채 연기에 임했다. 그녀의 부상 투혼은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야 알려졌다.
“아버지(성동일)가 다쳤다는 전화를 받고 뛰어가는 신이었어요. 추운 날씨에 며칠 밤을 새워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전력 질주하다 삐끗했는데, 너무 아프더라고요. 깁스하면 촬영을 못 하니까 파스만 뿌리고 계속 연기했죠.(웃음) 이번 기회에 수술해서 고치려고요.”
그래도 고아라는 웃었다. 오랜만에 느낀 연기의 ‘맛’ 때문이었다. 잃은 것보단 얻은 게 많았다. 화기애애한 촬영장 분위기도 좋았단다. “촬영 현장이 재밌다는 걸 처음 알았다”면서 “스태프와 감독님, 배우들과 모두 친해져 한 식구 같았다. 다들 종방연 때 헤어지기 아쉬워 울 정도였다”라고 털어놓았다.
# “배우 고아라의 2막… 이제부터 시작이다”
치열한 노력의 결과는 대성공이다. 데뷔 후 처음으로 외모가 아닌 연기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옥림이’가 아닌 다른 인물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호평이 쏟아졌다. 팬들도 대거 유입됐고, 자신감도 생겼다. 배우 고아라의 재발견이다.
“많은 시청자와 공감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이번에 절실히 느꼈어요. 시청률이 매주 1%씩 오르고, 방송을 본 친구들이 재밌다며 문자를 보내고…. 너무나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고아라는 또다시 출발점에 서 있다. 그녀 역시 지금부터가 진짜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연기하겠다는 것. <응사>를 통해 재도약의 기점을 마련했으니, 이제는 또 다른 대표작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응사> 덕분에 또다시 도전할 힘을 얻었습니다. 앞으로 진한 격정 멜로도 하고 싶고, 사극도 해보고 싶어요. 로코, 스릴러, 액션… 아직 도전할 장르가 정말 많거든요. 이제부터가 진짜예요. 앞만 보고 달려갈 겁니다. 2014년엔 더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계속 지켜봐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