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세현씨는 자살을 하려다 결국 총으로 왼쪽 손을 쏘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흉터 자국.
둘째 수현씨는 경원대학교에서 한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수현·태현·세현 3형제의 인생 스토리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3형제의 직업은 모두 한의사, 고향은 함경북도 상온포리다. 탈북한 3형제 한의사인 셈이다. 이들 형제는 북한에서 노동자 계급으로 어렵게 생활했지만 그렇다고 탈북을 꿈꿀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1993년, 박수현 씨가 운명처럼 탈북하게 되면서 북한에 남은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 원장의 귀순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가족들은 길주에 있는 추방 지역으로 쫓겨나 근 5년간을 생활하게 된다. 홀로 남한에서 생활하던 박수현 씨 또한 북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하루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1997년부터 줄곧 조선족 브로커를 통해 은밀하게 집으로 돈을 보냈다. 일종의 탈북자금이었다.
1998년 부모님과 함께 막내 세현씨가 탈북에 성공해 한국에 들어왔고, 셋째 태현씨는 천신만고 끝에 이듬해 1월 한국 땅에 발을 디뎠다.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한 박수현 씨는 2001년 경기도 성남시에 한의원을 차렸다. 형을 따라 태현씨와 세현씨도 한의대로 진로를 정했고, 현재 그들은 경기도 양주와 광주에 한의원을 개원했다.
귀순 1호 한의학박사 김수현씨 탈북기
“오늘이 꼭 20년째 되는 날이네요.”
박수현씨가 입을 열었다. 그와 인터뷰를 진행한 10월 13일은 그가 탈북 후 한국에 들어와 처음 기자회견을 연 날로부터 꼭 20년째 되는 날이었다. 광주와 양주에서 동생들이 도착하기 전,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박수현씨에 따르면, 그의 탈북은 갑작스러웠다. 1993년 10월, 골동품 밀매를 하던 친구가 중국어 통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이 계기였다. 그는 친구와 함께 국경을 몰래 넘었다가 되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다. 북한에선 국경을 불법으로 건너면 무조건 총살감이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친구는 이미 한국행을 계획하고 두만강을 건넌 것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박씨도 한국행을 결정했다. 중국에서 열흘간 공안원들의 눈을 피해 다닌 끝에 마침내 10월 11일 그는 한국 땅을 밟았다.
그에게 열흘이라는 시간은 10년처럼 길었다. 친구와 함께 밀항해 서울에 도착한 그는, 북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부모님과 형, 그리고 두 남동생을 데려오기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
박수현 씨는 대한민국 탈북 한의사 1호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청진의대 동의약학과를 다녔다. 맨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를 담당한 형사가 그에게 한의대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북한에서 전공한 부분도 살리고 한국에서 살 길도 스스로 마련하라는 의미였다. 그는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한 끝에 경희대 한의학과 예과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 의대 약학부에 다니며 온갖 약초에 대한 공부는 해봤지만, 남한에서의 한의학 공부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영어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는 어렵게 공부한 끝에 국가고시를 패스해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2001년 4월, 성남시에 묘향산 한의원을 열었다.
친구는 왜 중국어 통역을 수현씨에게 부탁했나요?
당시만 해도 북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어를 못했어요. 중국어도 외국어잖아요. 중국어를 배우는 학과는 동의약학과였어요. 북한에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50명 안에 제가 들어 있었던 거죠. 그 친구는 귀순하기 위해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제가 필요했던 거예요.
꼭 귀순이 아니더라도, 북한 당국의 허가 없이 국경을 넘는 것은 불법이 아닌가요?
왜 그렇게 덜컥 따라간 건가요?
저는 노동자 계급의 아들이고, 우리 집은 가난했어요. 남의 것을 훔쳐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 정도로요. 친구가 허리에 찬 돈다발을 보여주는데 그게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제게 3일간 통역을 해주는 값으로 3만원을 주겠다는 거예요.
대학을 졸업하면 한 달 월급이 1백원이던 시절이었어요. 그걸 보고 안 따라갈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선금으로 일부를 받고, 그걸 책 사이에 숨겨뒀어요. 그리고 당시 여자친구에게 신신당부를 했죠. 혹시라도 내가 열흘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 가족에게 그걸 꺼내서 전해주라고요.
어떻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나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친구가 국경경비대에게 돈을 쥐어줬더라고요. 골동품 밀수를 하던 친구였으니 국경경비대에 아는 사람도 많았겠죠. 그때 친구가 허리에 차고 있던 돈을 거의 대부분 경비대에게 줘버렸다고 하더군요. 글자도 보이는 환한 밤이었는데, 완전 미쳤던 거죠.
중국에서 있던 열흘 동안, 가장 긴박한 순간은 언제였나요?
중국 심양에 한국 대사관이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들었어요. 택시를 타고 심양 한국 대사관으로 가자고 했는데, 택시 기사가 저희를 북한 대사관 앞에 세워주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오금이 저려서 발이 안 떨어졌어요. 저희는 얼른 차를 돌려 안전할 것 같은 일본 대사관으로 가자고 했죠. 그랬더니 기사가 20원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가진 돈은 10원이 전부인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차 안에서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고 저 멀리서 경비병이 걸어오더라고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어요. 그런데 그때 택시 기사가 나지막이 한국말을 하는 거예요. “아이, 이 새끼들 돈도 없네”라고요. 알고 보니 중국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한국 사람이었던 거죠. 바로 매달렸어요. 한국에 가야 한다고, 도와달라고요.
그 얘기를 들은 택시 기사가 잠시 고민하더니 다가온 경비병들에게 별일 아니라고 둘러대며 차를 돌리더라고요.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저는 거기서 경비병들에게 붙잡혀 죽었을 거예요. 저희 사정을 딱하게 여긴 그가 살려준 거죠. 나중에 택시에서 내릴 땐 저희 손에 1백원씩 쥐어주면서 ‘꼭 한국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담당 형사는 왜 수현씨에게 한의대 편입을 권유했을까요?
일종의 조언이었던 거죠. 한국에서 자립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는 뭔가 살 길을 찾아야 하니까요. 제가 북한 청진의대에서 동의약학과를 다니기도 했고요. 일화가 하나 있는데, 사실은 그 형사가 전립선염을 앓고 있었거든요. 북한에서 배운 솜씨로 실력 발휘를 좀 했죠. 제가 지은 약을 달여 먹은 형사가 염증이 싹 나았어요. 한의사 하면 정말 잘하겠다고 추천을 해주더라고요.
한의사 꿈 이룬 탈북 3형제
둘째 수현씨의 탈북, 그 후 남은 가족들은…
박수현씨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셋째 태현씨와 넷째 세현씨가 도착했다. 다섯 살 터울인 이들은 누가 봐도 형제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 넷째 세현씨는 부모님과 함께 1998년 11월 한국에 들어왔고, 셋째 태현씨는 내몽골까지 들어가 갖은 고생을 하다가 1999년 1월에 한국에 오게 됐다.
수현씨의 탈북 이후 가족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태현(셋째)_형이 13일 날 한국에서 귀순 기자회견을 열었고, 그날 바로 보위사령부에서 공안원들이 들이닥쳤어요. 아버지는 끌려가서 숱한 고문을 당하시기도 했고요. 북한에는 반동 세력들만 따로 모여 사는 마을(함경북도 길주군)이 있는데 저희 가족도 그쪽으로 쫓겨났어요.
세현(넷째)_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군 생활 중이었고, 전방으로 재배치됐어요. 형이 반동 세력이라는 이유로 군대에서 저는 갖은 괴롭힘을 당했죠. 군에서 매일 충성 맹세를 하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반역자 가족으로 찍혔는데, 매일 구타와 고문으로 제 생활이 어땠겠어요? 정말 죽고 싶었어요.
자살을 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턱에 총구를 겨누었지만 방아쇠를 당기진 못했어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 왼쪽 손을 쏴버리는 것뿐이었죠. 그때는 형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어요. 전쟁만 나 봐라, 제일 먼저 형부터 쏴 죽이겠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태현(셋째)_끔찍한 곳이었어요. 평소엔 해발 1500m에 있는 외진 광산 마을에서 목숨을 걸고 일해야 했어요. 매일 일터를 오가는 데 6시간 동안 40~50km를 걸어야 했죠. 식량 배급도 없어 스스로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어요. 반동세력과 경제사범들만 모인 지역이었기 때문에 까딱 잘못하다간 바로 총살을 당하게 되는 곳이었죠.
세현(넷째)_제 눈앞에서 사람을 총살하는 것도 여러 번 봤어요. 형! 형은 몇 번이나 봤어? 나는 형 없을 때 한 번 더 봤는데.
두 분의 탈북 시기가 다른데…
세현(넷째)_근 5년간 추방 지역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함경북도의 살던 집으로 가족이 돌아왔어요. 먼저 귀순한 둘째 형이 조선족 브로커를 통해서 1997년부터 해마다 집으로 돈을 보내줬어요. 당시 4만원을 보내줬는데, 그때 북한 노동자의 월급이 80원 정도 하던 때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4억 정도 되는 큰돈이었죠.
태현(셋째)_탈북은 제가 먼저 했는데, 귀순은 막내가 먼저 했어요. 저는 큰형과 함께 탈출했는데 중간에 연락이 끊겼어요. 정신없이 도망 다니다가 인신매매단에게 잡혀 내몽골까지 끌려가기도 했죠. 그곳에서 머슴처럼 남의 집에서 일을 해주면서 숨어 살았습니다.
누가 나를 잡으러 오는 건 아닌가 하고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떨면서요. 당시에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긴장했어요. 그곳에서 매일 둘째 형에게 편지를 썼어요. 착신지를 찾지 못해 버려진 편지만 수십 통이었어요.
세현(넷째)_저는 부모님을 모시고 1998년 11월 8일에 북한을 나왔어요. 그리고 11월 24일에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죠.
그럼 두 분은 어떻게 한국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태현(셋째)_제가 내몽골과 중국을 떠돌며 한국에 있는 가족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하루는 지인이 제게 ‘한국 사정을 잘 아는 사업가가 있다’면서 어떤 사람을 소개해주었어요. 그 사람을 만났는데, 대뜸 전화를 바꿔주더라고요. 네 형이 맞는지 확인해보라면서요. 수화기 너머에서 형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어요. 눈물을 펑펑 쏟았죠. 아마 그때 그 사람이 국정원 직원이었던 모양이에요.
수현(둘째)_저 역시 연락이 끊긴 셋째를 애타게 찾고 있었어요. 남한에 간다면서 나간 애가 감감 무소식이 됐으니 저로서도 많이 답답했죠. 점쟁이까지 찾아다니면서 셋째의 행방을 물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전화 한 통이 왔어요. “수현아, 한국 지낼 만하지? 네 동생이라는데 맞는지 한번 확인해봐” 하더라고요.
세현(넷째)_형이 보내준 귀순자금으로 브로커를 통해서 귀순할 수 있었어요. 셋째 형에 비하면 뭐, 제 귀순 상황은 순조로운 편이었죠.
가족의 첫 상봉이 이루어졌을 때 감회가 어떠셨나요?
부모님과 4형제가 모두 만나게 됐을 때 무척 감격스러웠을 것 같아요.
태현(셋째)_그렇죠. 그때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죠.
세현(넷째)_남한에 가는 걸 그렇게 원했으면서도 막상 가족들을 만나니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어요. ‘이게 진짜가 맞나? 우리가 이렇게 남한 땅에서 만나는 것이 꿈은 아닌가?’ 하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수현(둘째)_어찌 보면 우리 가족이 남한으로 오게 된 건 저 때문인 거잖아요. 우리 형제와 부모님이 한 명도 안 죽고, 결국엔 다 살렸다는 기쁨이 무척 컸던 것 같아요. 혹시라도 전화가 올까 여기 앉아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었거든요. 진짜 모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은 것 같았어요. 그게 무거운 짐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웃음)
한국에 와서 특별히 놀란 점이 있다면요?
수현(둘째)_처음 제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담당 형사가 목욕탕을 데려가더라고요. 좀 씻으라면서요. 한낮에 대중목욕탕에 들어갔는데, 배 나온 사람들을 보고 무척 부러웠어요. 저는 북한에 있을 때 그렇게 배가 나온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걸 보고 ‘나도 남한에서 열심히 살면 저렇게 배도 나올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셋째(태현)_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한국 땅을 내려다보는데, 아파트가 꽉 차 있고, 고속도로엔 차가 가득하더라고요. 북한에서 군 생활을 할 때 장갑부대에 있었는데, 2~3일짜리 훈련을 나가면 하루는 훈련하고 나머지는 쉬었어요. 기름을 아껴 써야 하니까요. 한국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 차가 많을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넷째(세현)_저는 한국 여자들을 보고 놀랐어요. 북한 여자들이랑은 완전 딴판이던걸요?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고,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요. 북한에서는 절대 여자가 술이나 담배를 할 수 없어요. ‘이런 게 자본주의구나!’ 싶었어요.
남한으로 건너온 태현씨와 세현씨도 둘째 형 수현씨를 따라 한의사가 됐다. 탈북 3형제가 모두 남한에서 한의사가 된 셈이다. 맏형만 직업이 달라 조선업 회사에서 일한다. 막내 세현씨는 둘째 형을 따라 한의대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2001년 상지대에 입학했다. 고려대 물리치료학과를 졸업한 태현씨도 두 형제를 따라 2003년 상지대 한의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원래 북한에서 한의학 관련 공부를 했던 수현씨와 달리, 태현씨와 세현씨는 한의학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한자와 영어도 어려운데, 전공 공부도 하려니 많이 벅찼다. 막내 세현씨는 2009년에, 셋째 태현씨는 2011년에 한의사국가고시에 합격했다. 두 사람 모두 세 번이나 시험을 치른 끝에 얻은 결과였다. 이들 형제는 경기도 성남·양주·광주에 ‘묘향산 한의원’이라는 똑같은 이름을 내걸고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의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어떤 점이 제일 힘드셨나요?
세현(넷째)_남들은 척척 붙는 한의사국가고시에 저는 여러 번 떨어지니까 많이 힘들었죠. 그렇다고 안할 순 없었어요. 북한에서 도둑질해 먹고, 군인 밖에 한 게 없는데, 지금 당장 번듯한 직업을 찾지 않으면 한국에서 살아가긴 더 힘들겠더라고요. 장가가려면 번듯한 집이 있긴 해야겠는데, 둘째 형을 보니까 한의사만 한 게 없더라고요.
태현(셋째)_둘째 형이 거짓말을 했어요. 한자 1천 자만 외우면 한의사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순진하게 그걸 믿은 제가 바보죠. 영어도 해야 하고 약재 이름도 외워야 하고, 침도 놓아야 하고…. 이미 오랜 세월 공부에 손 놓고 있던 저에게는 참 어려운 시험이었어요.
북한의 한의학과 한국의 한의학이 많이 다른가요?
수현(둘째)_똑같아요. 예를 들어 ‘체했을 때 진피와 꿀을 물에 타 먹으면 좋다’는 비슷한 문구가 양쪽에 모두 있죠. 하지만 북한에서는 진피나 꿀 같은 약재를 구하기가 어디 쉽나요? 북한에선 ‘황백나무 가루’가 만병통치약처럼 쓰여요. 감기에도, 설사에도 무조건 황백가루죠. 북한은 이미 배고픈 인민들이 풀까지 다 뽑아 먹어서 약재가 거의 없었죠.
이제 가족들도 다 한곳에 모였고, 한의사라는 번듯한 직업도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지낼 작정이신가요?
세현(넷째)_이제 가족도 다 오순도순 모여 있고, 보고 싶을 때 마음껏 볼 수 있으니 더 바랄 게 없죠. 그냥 계속 대를 이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태현(셋째)_제가 탈북한 사실을 알면, 사람들 반응은 두 부류로 나뉘어요. 하나는 ‘왠지 북한의 한의학이 더 잘 들을 것 같다’ 하는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좋은 약재 쓴 것 맞나?’ 하는 의심의 눈초리죠. 무엇보다 환자들과의 유대 관계가 중요할 것 같아요. 그걸 키우기 위해 노력할 거고요.
수현(둘째)_북한 출신 한의사 1호잖아요. 북한과 남한의 한의학을 집대성해 접목하고 싶어요. 그것이 저의 재능을 살려 한반도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어요. 통일은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한의학을 통일하는 꿈에는 제가 한번 도전해보려고요.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드라마틱한 인생사가 있다. 그 인생의 굴곡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며칠 밤을 새워도 이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겪은 긴박했던 순간들을 다 이야기 할 순 없을 것이다. 꿈도 없이 살아야 했던 북한에서의 생활. 30~40대에 접어든 지금, 그들은 이곳에서 각자의 꿈을 펼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