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훈. 데뷔 23년 차 베테랑 가수다. 사실 한 분야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정상을 밟은 스타라면 더 그렇다. 대중이 갖고 있는 기대치를 충족시켜야 하고, 새로운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 ‘발라드 황제’ 신승훈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
실제로 그를 향한 질문들은 ‘변화’와 맞닿아 있었다. “신승훈에게 새로운 모습이 있을까?” 혹은 “이번에도 또 똑같은 발라드가 아닐까?”라는 시선이 많았다. 여기에 신승훈은 음악으로 답했다. 새 미니 음반 <그레이트 웨이브(Great Wave)>를 내놓은 것이다. 지난 6년 동안 공들인 음반이다. 여기에는 그간 신승훈이 시도한 도전과 실험, 그리고 발전을 함께 담았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전 제 스타일을 유지해야 했어요. 동시에 극복도 해야 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끝없이 실험했고 도전했습니다. 이번 음반으로 결실을 맺은 것 같습니다.”
가을비가 내리던 10월의 어느 날.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신승훈을 만났다. 그는 미니 음반을 발표하기까지 걸린 6년의 시간을 풀어놓았다. <그레이트 웨이브> 수록곡을 함께 들으면서.
“발라드 황제가 실험에 뛰어든 이유?”
사람들은 그를 ‘발라드 황제’라고 불렀다. 발표하는 곡마다 큰 사랑을 받아 대표곡만 수십 곡에 달했다. 마치 멈추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그랬던 그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게 6년 전 일이다.
“데뷔 후 23년간 총 10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전 앨범이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했죠. ‘발라드 황제’라는 별명도 얻었어요. 그런데 고민이 생기더군요. 대중에게 늘 똑같은 음악으로 들릴까 봐서요. 중간 점검이 필요했어요. 그 기간이 총 6년이 걸렸네요.”
그 결과가 <그레이트 웨이브>다. 지난 2008년 선보인 <라디오 웨이브(Radio Wave)>, 지난 2009년 발매한 <러브 어클락(Love O’clock)> 등을 잇는 마지막 시리즈다. 신곡 5곡과 이미 발표한 노래의 리메이크 4곡을 함께 공개했다.
녹록지 않은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컴백이 더뎌지자 비아냥거림이 쏟아지기도 했다. 일각에서 던지는 ‘구세대 가수라 이미 생명이 끝난 것 아니냐’는 조롱도 받아내야 했다. 그래도 신승훈은 웃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화로 비유해볼까요? 흥행 감독이 실험적인 단편 영화 3편을 6년간 찍었다고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어요. 그동안의 시간들은 다른 것을 찾기 위한 실험적인 기간이었습니다. 많은 걸 배웠어요.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 잘하는 것, 그리고 해야 할 것에 대해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의 도전은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23년 전 신인 신승훈의 모습을 되새겼다. 데뷔 곡 ‘미소 속에 비친 그대’(1990), 2집 ‘보이지 않는 사랑’(1991) 등처럼 100% 감성에 충실한 곡들을 떠올렸다. 그때와 같은 방법으로 곡 작업을 시도했다.
“데뷔 시절에는 외국에서 곡을 쓰곤 했어요.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자유롭게 작업하면 굉장히 좋은 작품이 나오더라고요. 그때처럼 해볼까 했어요. 이번엔 건반 하나를 챙겨 들고 청평, 가평, 포천 등 경기도 일대 펜션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동료 작곡가들과 술잔을 기울였죠.”
작사가 심현보와의 교류도 큰 도움이 됐다. 즐겨 찾는 카페에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가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심현보와의 대화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니고 있던 가사에 대한 고집과 편견을 깨줬다.
“1~7집 앨범 대부분을 제가 직접 작사했어요. 어느 순간 너무 꾸며 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심현보가 제 생각을 정리해줬어요. 전에는 직접적인 감정 표현이 촌스럽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어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게 됐죠.”
자연히 작사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는 “9집의 ‘두 번 헤어지는 일’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가사를 쓸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면서 “정규 11집부터는 직접 쓴 가사를 공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작업을 통해 무뎌진 감성을 살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발라드 황제, 그의 무한도전은?”
이날 신승훈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실험’이었다. 그만큼 그는 많은 것에 도전했다. 발라드는 물론 록, 펑키, 디스코, 네오 소울,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접목했다. 발라드만 고집했던 이전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대표적인 예가 타이틀 곡 ‘쏘리’(Sorry)로, 발라드와 브리티시 록의 만남이다. 그는 “브리티시 록 발라드를 들어보면 애절함이 없다”면서 “내 목소리가 지닌 한국적이고 애절한 정서와 결합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 결과물이 이 노래다”라고 설명했다.
이질적인 두 장르가 만난 만큼 믹싱에 신경 썼다. 신승훈은 “피아노, 첼로, 일렉트릭 기타 등 모든 악기가 제대로 조화를 이뤘다. 어떤 장소에서, 어느 파트를 들어도 모든 소리가 제대로 들린다”며 “그렇게 만들기 위해 믹싱을 4차례 이상 했다. 좋은 사운드가 탄생한 것 같다”라며 흡족해했다.
3번 트랙인 ‘그대’라는 곡도 주목할 만하다. 정통 발라드지만 기존 신승훈의 곡과는 다르다. 이전 곡들이 묵직하다면 ‘그대’는 좀 더 담백하다. 그는 “발라드 장르의 정서는 처절함, 애절함, 애잔함, 애틋함 4가지로 나뉜다”면서 “다른 것은 자신 있지만 애틋한 감성만은 잘 표현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치열하게 고민해 만든 애틋한 발라드가 ‘그대’다”라고 강조했다.
래퍼와의 컬래버레이션도 처음이다. ‘다이나믹 듀오’ 최자와는 재즈와 힙합 장르를 섞은 재즈합(Jazz-Hop) ‘내가 많이 변했어’를 작업했다. 경쾌한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에 힙합 비트가 어우러진 곡이다.
“‘내가 많이 변했어’는 이별한 남자의 슬픈 마음을 표현한 노래예요. 그런데 실제로 들어보면 슬프지만은 않을 거예요. 오히려 따뜻하고 흥겹죠. 슬픈데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애이불비(哀而不悲)라고 할 수 있어요. 최자가 랩으로 이 점을 잘 살려줬어요.”
버벌진트와는 ‘러브 위치(Love Witch)’라는 곡을 함께 만들었다. 감각적인 1980년대풍의 디스코 장르다. 주제는 일탈을 꿈꾸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섬세한 기타 리프로 신나는 멜로디를 구성했다.
“‘러브 위치’는 신승훈 음악 중 역대 가장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곡입니다. 발라드와 힙합의 배틀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볼륨을 크게 해 칵테일이나 맥주를 마시며 들어줬으면 하는 노래예요. 40대 중반 남자가 큰 소리로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이 노래는 무조건 버벌진트와 함께해야만 했다고. 그는 “디스코 장르라 하이 톤에 반 가성을 사용했다. 반대로 래퍼는 중저음의 도시적인 톤이었으면 하고 바랐다”며 “이 기준에 부합하는 래퍼가 버벌진트뿐이었다. 힙합의 세계를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신승훈은, 23년째 진행 중이다”
고민 끝에 도전한 앨범이었다. 좀 더 신중해졌고,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치열하게 노력했고 가차 없이 깨부쉈다. 이미 발매된 곡이라도 아쉬움이 남았다면 주저 없이 재편곡했다. 신보 수록곡 중 후반부 4곡이 리메이크 곡에 해당한다.
“‘라디오를 켜봐요’는 리듬 부분이 아쉬웠어요. 공연장에서 더 잘 즐길 수 있도록 리드미컬하게 바꿔봤죠. ‘사랑치’는 평론가에겐 반응이 좋았던 곡인데 대중에게는 어렵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는 대중가수잖아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오만한 거죠. 다시 방향을 바꿔 편곡했어요.”
자신에 대한 선입견을 극복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러브 어클락>의 수록곡 ‘그랬으면 좋겠어’를 리메이크한 것이 그 예다. 라디(Ra.D)와 함께 네오 소울로 재탄생시켰다. 대중이 쉽게 말하는 ‘신승훈 스타일’이라는 선입견에 대한 항변이었다.
“23년간 대중에게 들려준 제 목소리가 있어요. 저만의 개성이고 장점이죠. 문제는 그게 너무 강하다는 거예요. 반주만 들었을 땐 신선한 노래도 제 목소리가 들어가면 신승훈표 발라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라디의 손을 잡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신승훈은 또 한 번 발전했다. 적어도 도전 정신이 돋보였다는 점에서 박수를 받을 만하다. 이 기세를 몰아 그는 또 다른 목표도 세워놓았다. 단순한 사랑과 이별 노래를 넘어 노래로 대중을 치유하는 곡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제 앨범에는 사랑, 이별을 주제로 한 곡이 너무나 많았어요. 하지만 삶에 위안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는 노래는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보 수록곡 ‘마이 멜로디(My Melody)’처럼, 앞으로는 힐링 뮤직을 많이 만들고 싶어요. 멜로디로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