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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판 ‘오체 불만족’닉 부이치치의 희망 메시지

‘잘 고른 캠프 하나, 열 학원 안 부럽다’는 말처럼, 고수 엄마들은 좀 더 알찬 여름캠프를 찾기 위해 벌써부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식상한 캠프는 더 이상 사절! 힐링과 창의력, 우주 체험까지 아우르는 콘셉트별 여름캠프 목록을 공개한다.

On October 17, 2013

저는 팔도 다리도 없지만, 한계도 없습니다.포기하지 않으면 절망도 얼마든지 희망으로 바꿀 수 있지요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다. 포기다. 포기하지 않으면 절망도 얼마든지 희망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국내 방송을 통해 한국에 처음 이름을 알린 닉 부이치치(Nick Vujicic, 31세). 포기하지 않고 삶에 대한 열정으로 장애를 극복한 그는 절망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준 ‘산증인’이다. 전 세계에 희망 메시지를 전할 목적으로 설립된 미국의 장애인 비영리단체 ‘사지 없는 삶(Life Without Limbs)’ 대표로 활동하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도전의 삶을 전하는 그는, 2010년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책 〈허그〉를 펴내고 그해 한국을 방문해 우리에게 꽤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특히 팔다리가 없는 그가 타이핑을 하고 드럼을 연주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런 그가 최근 한국을 다시 찾았다. 두 번째 책 〈플라잉〉 출간 기념 및 강연을 통해 희망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그의 강연이 열린 온누리 교회에는 ‘희망’을 직접 확인하러 온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찼고, 이후 〈힐링캠프〉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삶이 재조명되면서 대중은 또 한 번 감동하고 열광했다. 한국은 지금 ‘닉 부이치치 붐’으로 가득하다.

남과 다르다는 사실 알고 깊은 절망, 세 번 자살 시도
“저는 팔도 다리도 없지만, 한계도 없습니다.”
1982년 호주에서 목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난 닉은 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팔과 다리 없이 작은 왼발 하나만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충격과 슬픔에 잠긴 부모는 할 말을 잃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목 놓아 울었지만 도저히 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었고, 어머니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간이 꽤 흐른 뒤 울다 지쳐 잠든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흐느끼며 속삭였다. “여보… 근데… 애가 참 예뻐….”
닉의 병명은 일종의 해표지증(phocomelia, 바다표범처럼 팔다리가 짧은 기형)이라는 희귀병이다. 임신부들이 임신 초기에 진정제와 최면제를 복용한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는데, 닉의 어머니는 그 약을 복용한 적이 없었다. 답을 찾기 위해 병원을 전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한 답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4개월이 걸렸다.
팔다리가 없는 아이를 키우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부모는 닉을 특별하게 키우지 않았다. 여느 아이들처럼 똑같이 대했다. 부모가 자녀를 영원히 보호해줄 수 없다면, 자녀가 자립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는 그에게 스스로 앉는 법과 스스로 먹는 법을 가르쳤다. 혼자 서는 법도 터득하게 했다. 그의 부모는 “누군가 일으켜주길 바란다면 너는 영원히 일어나는 법을 모를 것”이라며 아들에게 끊임없이 용기를 불어넣었다. 닉은 수백 번씩 엎어졌다가도 주변의 벽이나 물건 등에 머리를 짚고 다시 일어나는 연습을 반복했다. 결국 그는 넘어졌다가도 금세 일어나는 법을 터득했다.
그래서일까? 어린 닉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유치원에 입학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유치원에 다녀온 첫날, 그는 “다시는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며 서럽게 울었다. 친구들이 그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놀렸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일반 학교에 들어가면서는 더욱 처절하게 실감했다. 닉이 특수 시설에서 보호받으며 연약하게 성장하는 것보다 세상과 당당히 맞서길 바란 부모는 그를 장애인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보냈다. 외로운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친구들은 닉을 가만두지 않았다. 신기한 표정으로 왜 팔다리가 없느냐고 물었고, 그가 지나갈 때마다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괴물 같다” “외계인 같다”고 놀리는 것은 기본이고, 무섭다면서 피하는 아이, 심지어는 휠체어에 앉은 그를 들어서 엉뚱한 곳으로 옮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으로 좌절한 그는 여덟 살 나이에 처음으로 삶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이 원망스러워 매일 절규하며 울부짖었어요. 다른 이들에게는 골고루 다 (팔다리를) 나눠주시면서 왜 나만 빼놓으셨느냐고.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고통을 주시느냐고. 왜 하필 나냐고…. ‘창조주의 실패작’ ‘어쩌다 태어난 괴물’ ‘하늘이 버린 자식’이라는 자괴감이 들었어요. 남들이 예사로 하는 일조차 해내지 못한다는 좌절감이 컸고, 자기 한 몸 간수하기도 버거워 가족에게 짐만 된다는 생각에 서러웠어요. 그때 문득 제가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닉은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겨우 열 살이었다. 한 번은 부엌 싱크대 위로 기어 올라가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질 양으로 몸을 날렸다. 아팠지만 다행히 목은 부러지지 않았다. 또 한 번은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던졌다. 몇 번이고 몸을 엎어서 물에 코를 박으려 했지만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순간, 이렇게 죽으면 부모님께 평생 슬픔과 죄책감을 안기게 된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런 부담을 지울 순 없었다. 그리고 그 즈음 한 신문 기사를 보면서 삶에 대한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저와 비슷한 장애를 안고 태어난 어떤 남자의 이야기였어요. 그 남자는 어린 시절부터 놀림을 당해 자살을 결심했지만, 결국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죠. 그때까지 제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는 저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꿋꿋하게 장애와 싸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
그때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닉의 부모는 그에게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네가 친구들과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용기 있게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의 조언대로 용기 내서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재치 있는 말을 하거나 농담도 건네고, 온몸을 던져 운동장을 굴러 또래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아이들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기쁨이었다. 그가 변하자 친구들도 하나둘 변하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그를 다정하게 대하는 친구가 늘어났다. 그는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스스로를 여전히 어두운 골방에 가두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모님은 제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런 저를 존중했어요. 그것이 제 삶에 아주 큰 동기 유발이 되었죠.”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면서 닉은 좋아하는 것을 느끼고 배우기 시작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그를 거치면 가능해졌다. 그는 드럼을 치고, 스케이트보드와 수영, 스쿠버다이빙과 축구는 물론 골프를 치고,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룬다.

그는 어릴 때 대학에 들어갈 수도 , 직장을 가질 수도, 결혼 할 수도,아이를 안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란 걸 안다.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길이 있다는 것 또한 안다. 그는 지금 누구보다 행복하다.

심지어 치아로 낚싯줄을 문 채 적절한 시점에 풀어주고 당기기를 되풀이하는 그만의 방법으로 낚시도 하고, 지휘봉을 잡은 손 대신 영혼을 담은 어깨를 움직이며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큰 파도를 타고 내려오는 서핑을 즐기기도 한다. 어린 시절 스케이트보드에 매달려본 덕분에 비슷한 메커니즘에 익숙한 편이라 가능한 것이었다. 서핑할 때 얼마나 짜릿했는지에 대해 닉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다만 목청껏 표현한다. 당시 거대한 물결 꼭대기에 서서 어린아이처럼 질러대던 그 비명을 말이다. 닉은 이제껏 살면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을 이때로 꼽는다.
“언젠가는 부드럽게 움직이는 팔다리를 만들어줄 과학자와 발명가들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만 믿고 기다리기보다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할 힘을 기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부모님은 늘 저에게 시도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걷고 뛰고 헤엄치고 날 수 있을 거라고. 그땐 몰랐어요. 제가 이 모든 것을 해낼 것이라고는. 시도하지 않고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에요.”
이후 닉은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 속에 호주 역사상 처음으로 장애인으로서 공립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생회장에도 당선됐다. 열일곱 살에는 사회복지단체 ‘사지 없는 삶’을 조직했으며, 대학에도 진학해 경영학과 회계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명과 목표가 생겼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 그래서 현재 닉의 직업은 행복을 전하는 전문 강사다. ‘행복 전도사’라는 타이틀로 삶에서 배운 희망을 전 세계에 나눠주고 있는 것이다. 신체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지만, 그의 마음은 더 먼 곳의 약한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다. 강연으로 얻은 수익을 캄보디아에서 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식수와 인프라 사업 등 사회개발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 2월에는 강연 중 만난 일본계 미국인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 올 2월엔 아들을 얻기도 했다. 닉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어릴 적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너는 혼자야. 너는 결혼도 못할 거야. 결혼한다 해도 아내의 손도 잡아주지 못할 거야. 아이는 낳을 수 있을까? 낳는다 해도 아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지도 못하고 품에 안고 달래주지도 못할 거야. 그러니까 포기해. 제 안의 어디선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하지만 이제 몸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요. 마음으로 아내의 손도 잡아줄 수 있고 마음으로 아이를 보듬어줄 수도 있어요. 저는 지금 누구보다 행복합니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미리 포기하는 것은 팔과 다리가 없는 것보다도 더 큰 불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바닥에 넘어지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메시지를 전한다.
“살다 보면 가끔 넘어져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여러분은 제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이렇게 넘어져 있고, 팔다리도 없어요. 제가 다시 일어서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저는 백 번이라도 다시 일어나려고 시도할 거예요. 제가 포기하면 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실패해도 계속해서 다시 시도한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에요. 어떻게 끝낼 것인가가 중요하죠. 실패했다는 것은 다시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팔다리가 없어도 행복하다는 닉. 하지만 그는 여전히 팔다리가 다시 생기는 꿈을 꾼다. 그의 옷장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도 신발 한 켤레다.
“저는 기적을 믿어요. 그래서 아직도 정상인들처럼 자유롭게 걷고,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고, 도구를 잡는 날이 오리라고 믿죠. 만일 제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제가 누군가의 기적이 되고 싶어요. 신은 저에게 너무나 위대한 사명을 주셨어요. 제 삶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희망을 얻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에요. 신이 저를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세계를 다니며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비록 남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오히려 팔다리를 모두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며 누구보다 넓은 세상을 살아가는 닉 부이치치. 그를 통해 장애는 몸이 아닌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절감한다. 절망이 희망으로, 생각이 현실로, 실패가 기회로, 한계가 비전이 되는 삶을 꿈꾸며, 앞으로도 그가 들려주는 가슴 따뜻한 메시지를 기대한다.

CREDIT INFO
취재
정은혜
사진
두란노 사진팀
2013년 07월호
2013년 07월호
취재
정은혜
사진
두란노 사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