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노환규(53세) 회장을 만나기로 한 날, 그의 이름을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입력했다. 수많은 연관 뉴스 중에서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바로 연단 위에서 전국 안과 의사들에게 큰절로 사죄하는 모습이었다. 퍽 인상적이었다.
“지난해 7월 1일부터 강제 시행된 포괄수가제에 백내장 수술이 포함됐어요. 수가가 76만원으로 책정됐죠. 입원 기간에 상관없이 일련의 질병에 대한 진료와 수술은 똑같은 비용을 지불한다는 ‘포괄수가제’는 얼핏 국민에게 경제적으로 큰 이익인 것 같지만, 사실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약점이 많은 제도예요. 강아지의 백내장 수술 비용도 최소 1백만~1백50만원이 들어가는데, 이번에 책정된 금액이 76만원이거든요. 의료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대한의사협회 회장으로서 합리적인 수가를 정부로부터 받아내겠다고 약속했는데 결과적으로 못 지키게 됐고, 그래서 사과 드린 겁니다.”
그를 의사 입장만 대변하는 협회장이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한 대학병원에서 벌어진 의료사고에 대해 그는 병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병원 측에 정확한 사실 공개와 사과를 직접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그가 또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다. 세 번이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살아난 아들 이야기가 알려지면서다.
“제 아들이 태어난 것이 1987년인데, 당시 저는 세브란스병원의 인턴이었어요. 저 자신이 의사임에도 병원의 부주의한 진료 태도나 불성실한 진료 등 불합리한 의료제도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의사여서 더 무기력함을 느꼈던 것 같고요. 제 아들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드리고 싶은 것도 있지만 무성의한 진료 태도 등 의료제도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웃음)”
부부에게 날아든 청천벽력 같은 소식
그가 경험한 기적같은 이야기도 놀랍기만 하다. 노환규 회장은 중학교 3학년 때 과외 그룹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처음엔 그의 친구가 아내를 좋아해 몇 차례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다가 친구의 구애가 실패하자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친구가 좋아한 여자를 남한테 뺏길 수 없다’는 의협심이 발동했달까요? (웃음) 친구의 구애가 실패하고 나서 마음이 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꽤 오랫동안 쫓아다니다가 대학교에 가서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연애를 하다 본과 3학년 때 약혼하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죠.”
오랜 구애와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부부. 그의 가족은 미국 이민을 가기로 계획돼 있었다. 그래서 졸업 직후 가족과 함께 잠시 미국에 갔다가 인턴 생활을 위해 다시 세브란스병원으로 돌아와 동기들보다 1년 늦게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아내는 임신 5개월에 접어들고 있었다. 행복한 부부였다. 아내와 아이에게 이상 기류가 보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5개월이 지나면서 아내 배가 오른쪽만 불러오더라고요. 초음파검사 후 ‘쌍각자궁(bicornuate uterus complete type)’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자궁이 완전히 둘로 갈라져서 한쪽에서만 아이가 크는 거죠. 그러다 임신 8개월 반인 34주에 진통이 와서 산부인과 외래진료실에 갔는데 산부인과 교수님이 ‘진통이 아니니 집에 가서 안정을 취하라’고 한 거예요. 인턴 2개월차인 저는 지방 병원에 파견을 가 있었고 거의 집에 못 들어가는 상황이었고요. 아내 혼자 집에 돌아가자마자 양수가 터지면서 탯줄이 빠져나왔대요. 급하게 응급실로 갔죠.”
그는 오전에만 70명이 넘는 많은 진료를 해야 하는 산부인과 교수가 아내의 진단명을 놓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주의 깊게 진료했다면 아내의 진단명을 알았을 것이고, 아마도 즉시 입원조치를 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하면서 “짧은 외래 진료가 이렇게 위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응급실 도착 당시에 태아는 살아있었지만 응급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의사들은 태아가 이미 사망했다고 판단했다. 그 상태로는 생명이 붙어 있기 힘들다고 본 것이다. 남은 것은 산모의 선택이었는데, 자연분만을 하면 아내에게 상처는 남지 않지만 태아가 위험하고, 제왕절개를 하면 태아는 온전히 꺼낼 수 있지만 아내 몸에 상처가 남고 수술의 위험이 따르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제왕절개를 선택했다.
“제왕절개 수술을 하려면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니 저한테 전화가 온 것이었어요. 부랴부랴 병원에 가니까 아내는 수술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의사는 이미 태아가 사망했음을 확신하고 수술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간호사가 아이가 죽지 않은 것을 발견한거죠. 그제서야 심폐소생술을 하고 신생아 중환자실로 옮겼어요. 병원에서는 별다른 기대를 안 했고요.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심한 뇌손상을 입은데다가 뇌출혈이 있었고, 폐와 간 등 주요 장기의 기능도 크게 떨어져 있었거든요.”
그의 아들은 수술실에서 한 번, 응급실에서 한 번 총 두 번의 사망 판정을 받은 셈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후 일주일 만에 뇌출혈 진단까지 추가됐다. 뇌출혈은 시야를 관장하는 부위에서 일어났다. 생후 약 3주만에 병원에서는 그에게 치료를 포기할 것을 권유했다. “의료진은 제게 아이가 살 확률도 없을 뿐더러 만에 하나 기적적으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뇌성마비가 될 확률이 99.99%이고 앞도 보지 못할 것이니 아이를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요. 제게 치료 중단을 권유할 때 저는 정말 무기력함을 느꼈습니다.” 가망이 보이지 않자 그는 의료진의 권유대로 치료 중단에 동의했다.
저도 희망이 없었어요. 돌이켜 보니 아이가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때, 의료진들과 의사인 아빠는 아이의 치료를 포기하고 있었던 거예요. 부모조차 희망의 끈을 놓았던 아이인데,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이어간 거지요
아들이 좋은 신붓감도 빨리 데리고 왔으면 좋겠어요. 요즘 유일하게 빠져서 보는 드라마가 <내 딸 서영이>인데, 거기 나오는 ‘호정이’ 같은 며느리만 데려왔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말하죠
아들이 제발 앞만 볼 수 있었으면…
의료진은 아이의 호흡을 유지하던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 그러나 곧 멎을 것 같았던 아이의 호흡은 멎지 않았다. 심장의 박동도 느려졌지만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자 의료진은 인큐베이터로 들어가는 산소의 공급을 중단했다. 아이의 몸은 더욱 새까맣게 변했고, 겨우 붙어 있는 숨은 더욱 가늘고 느려졌다. 아이는 그 상태로 또 며칠을 버텼다. 병원에서는, ‘호플리스 디스차지’(hopeless discharge 가망없는 퇴원)를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한마디로 “집에 데려가서 편안히 보내주라”는 의미였다. 세 번째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수액주사를 끊으면 사망하는데, 병원에서 그것까지는 하기 힘들다고 했어요. 물론 저도 희망이 없었어요. 돌이켜 보니 아이가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때, 의료진들과 의사인 아빠는 아이의 치료를 포기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공호흡기도 떼어내고 산소도 끊고…. 저는 당시 아이를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에 저희 부모님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셨어요. 저는 안 갔어요. 아내는 당시 수술 후유증으로 처갓집에서 요양 중이라 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요.”
그러나 아이가 집에 도착한 후 의료진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아이에게 뭐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그의 어머니는 찻숟가락으로 보리차를 입에 넣어 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아이가 받아먹은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보리차로 연명하다가 그 다음에는 우유를 먹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절망에서 조금씩 희망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집에 온 지 한 달 만에 첫 울음을 터뜨렸다.
“부모조차 희망의 끈을 놓았던 아이인데,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이어간 거예요. 그제야 아내나 저도 ‘혹시’ 하는 기대를 하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아들을 보면서 ‘후유증이든 뭐든 그냥 살아만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아이가 점차 회생할 기미가 보이니까 이제 ‘뇌성마비는 괜찮으니 앞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욕심이 생긴 거죠.(웃음)”
그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걸까. 어느 날 밤 자다 일어나 불을 켜니 아이가 깜짝 놀라며 빛에 반응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앞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39℃가 넘는 고열에 폐렴 증상으로 한 차례 더 입원했다. 다시 찍은 뇌 CT에서는 전에 없던 뇌경색 병변이 확인됐다. 어렵게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을 시켰지만 병원에서는 여전히 ‘가망 없음’으로 판단하고 적극적인 치료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퇴원 후 아이는 점차 건강을 찾아가고 있었다. 걷지 못할 줄 알았던 아들은 평범한 아이들보다 4달 늦은 16개월 만에 첫 걸음마를 뗐다. 그렇게 아이는 기적처럼 쑥쑥 커가고 있었다.
“만 두 살쯤 지났을까. 애가 커가면서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는 것 같은 거에요. 소아신경과 교수님께 데려갔죠. 교수님은 일종의 간질일 것이라며 간질약을 처방해주었어요. 차트를 보고 ‘뇌 손상이 많은 아이니까 그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간질약을 먹기 시작하자 아이가 심하게 축 가라앉는 거예요. 용량이 좀 과한가 싶었지만 교수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아이를 데리고 갈 때마다 고개를 옆으로 절레절레 흔들면서 마치 ‘너는 안 될 거야’라는 식의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지요. 아이 아버지가 그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인데도 말이죠. 결국 어느 날 저는 제 임의대로 약을 끊었어요. 그리고 ‘다시는 병원에 안 데리고 간다’고 마음먹었죠.(웃음)”
그는 가족한테 미안한 게 많다. 레지던트 생활을 할 때는 한 달에 22일에서 많게는 28일까지 당직을 섰다. 자연스럽게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시부모까지 모셨던 아내의 부담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터. 게다가 아내는 자신 때문에 아이가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자책감 때문에 오랫동안 힘들어했다. 그만큼 아이에게 헌신했다.
“그래서 지금도 장애우 아이를 둔 부모를 보면 그 마음이 어떨까, 짐작이 가요.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둘째이고 나 때문에 내 아이가 이렇게 아프구나 싶은 자책의 마음이 들죠. 그런 걸 보면, 잠시나마 아들을 ‘포기’하려 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고, 아들에게 그 부분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미안해요. 이 미안함은 평생 씻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노환규 회장의 아들 노성은(27세)씨와 그의 아내 김효숙(53세)씨. 바쁜 노회장의 일정 탓에 가족이 오붓이 여행한 기억이 없어 늘 아쉽다고.
아이에게 평생 미안한 아빠
뇌성마비 후유증이 있을 것이라던 의사의 진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아이가 다섯 살 즈음이 돼서야 부부도 조심스럽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아이가 건강하게 걸을 수 있자 그의 꿈은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로 바뀌었다. 물론 그의 바람은 또 한 번 이루어졌다. 그렇게 아들은 초등학교까지 무사히 입학했다. 하지만 그 당시 아이는 심한 주의력결핍장애(ADHD)를 앓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15분이 지나면 아이는 어김없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그런 아이가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전학을 권유했다. 그때 전학만은 피하기 위해 학교를 설득한 건 아내였다.
“아내가 학교 측에 수업 시간을 활용해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했어요. 음악을 전공한 동료, 후배들을 모아서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악기 하나씩 다룰 수 있도록 가르치겠다고 제안을 한 것이죠. 아내가 아이 학교의 교사로 들어간 후 아이는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고 다닐 수 있었어요(웃음). 달라진 것은 아이가 수업 중에 운동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있는 교무실로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죠. 초등학교 저학년을 그렇게 보내고, 제가 수원 아주대학병원으로 옮겨가면서 수원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어요. 교회에서 운영하는 그 학교는 외국식 수업방식을 도입한 학교였는데 아들에게는 조금 더 개방적인 외국식 교육이 많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아이를 키우면서 한 번도 ‘공부해라’ ‘책 읽어라’ 잔소리한 적이 없다. 그저 건강한 것이 감사해서 아이에게 어떤 스트레스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그래서인지 성적이 나오면 거의 꼴찌였다”며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들을 키우면서, 반에서 중간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웃음). 아이를 키우면서 평범함도 얼마나 큰 감사인지 알게 된 것이죠.” 오히려 성적표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건 아들이었다고. 그래서 중학교 때 시작한 것이 아이스하키였다. 공부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운동을 해보라는 그의 권유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경기 중 심하게 다치는 사고를 겪으면서 운동도 그만뒀다. 그리고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모가 있는 캐나다로 홀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대학에 진학해 비즈니스를 전공했다.
그동안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흉부외과 전문의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의사로서 큰 기회가 주어진 것. 아주대학교병원 재직 시절인 1999년, 그는 미국 듀크대에 흉부외과 임상전임의로 가게 된 것이다. 임상전임의는 직접 환자를 보고 수술하는 의사를 말한다. 미국에 가는 많은 의사가 대부분 기초학 교실에서 실험하는 기초임상의로 가는 것에 비하면 파격적인 기회였다. 그는 임상전임의 과정을 위해 미국의사면허증까지 취득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듀크대에 가지 않았다. 듀크대학을 방문하여 인사까지 마친 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 인터넷 관련 잡지를 보고, ‘어쩌면 인터넷을 통해 내 꿈이 이뤄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는 바로 다음 날 병원에 사표를 제출한 것이다.
“한국의 의료제도에 너무 실망했던 저는 미국에 가면 다시 오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일종의 도피여서 마음의 부담이 있었죠. 그런데 잡지를 보는 순간 어쩌면 도피를 하기 전에 마지막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터넷을 통해, 의료제도에 대한 여론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된 거예요. 정말 바로 다음 날 병원에 사표를 제출했어요. 바로 의료정보 회사를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죠.(웃음) 비즈니스를 전혀 몰랐던 거예요. 결국 제가 만든 회사를 두 번이나 뺏겼어요.(웃음)”
투자를 받아 창업한 회사가 투자한 회사에 넘어가는 것을 두 번이나 경험한 후, 빼앗기지 않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개인병원을 시작했고 대한의사협회장에 선임되기 전까지 4년 정도 개인병원을 운영하며 다시 의사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기적 같은 인생, ‘사랑’이 답이다
오로지 일만하며 살아온 탓에 그는 그간 아내와 아들에게 소홀한 것이 가장 미안하다. 특히 아들에게는 평생 씻지 못할 마음의 짐이 있다. 가족이 오붓하게 여행을 다녀온 것도 평생 두 번에 불과하다고. 의사로, 왕성한 사업가로, 또다시 의사의 삶을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촉망받는 성공 가도를 달렸는지는 모르지만, 가족과 나눌 애틋한 추억 하나 없는 것은 그에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들은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지난해 말 한국에 들어왔어요. 지금은 장애인 시설에서 공익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어요.(웃음) 제가 늘 ‘동대문 가서 옷 장사부터 배워라’라고 말해요. 회사에 들어가는 것보다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배우고 자기 일을 찾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또 좋은 신붓감도 빨리 데리고 왔으면 좋겠어요. 요즘 유일하게 빠져서 보는 드라마가 <내 딸 서영이>인데, 거기 나오는 ‘호정이’ 같은 며느리만 데려왔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말하죠.(웃음) 그럼 아들이 그래요. ‘엄마처럼 예쁜 여자는 데려올 수 있겠는데, 엄마처럼 착한 여자는 찾기 힘들다’고요.”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에게 살뜰한 남편이 되어주지는 못했지만, 그와 얘기를 나누는 순간마다 얼마나 아내를 아끼고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연애 기간까지 포함하면 꼬박 38년을 만났는데, 그사이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단다. “세상에 싸워서 이길 것이 얼마나 많은데 사랑하는 사람과 싸워서 이기려 하느냐”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지금도 하루에 여러 번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 아는 로맨티스트다.
“ 아이를 이만큼 키우고, 제가 묵묵히 제 일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아내의 희생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아요. 기적처럼 아들이 살아나고, 천사 같은 아내까지 얻고…. 온통 감사한 일 뿐이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