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지기 조성민과의 사적인 대화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2년 전이었다. 그가 사무실을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오가는 길에 종종 만났고, 이후 그가 두산 베어스 코치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전화 통화로 안부를 묻곤 했다. 그것이 그와 마지막 만남이 될지는 추호도 몰랐다.
그는 죽기 3년 전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지난해부터 본가와 도곡동 여자친구의 집을 오가며 생활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그는 점점 예전 모습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깊은 외로움을 숨길 수 없었을까.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죄책감, 부모님에게 상처를 준 후회, 대중의 차가운 시선, 사업 실패에 대한 스스로의 원망.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었다. 그래서 자신에겐 그 어떤 인터뷰도 무의미하다고 얘기했다.
그럼에도 그는 매번 기자에게 의리를 보여주었다. 대중으로부터 숨고 싶을 때 자신을 찾는 야속한 기자에게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혼 당시 세상으로부터 몰매를 맞을 때도, 재혼 후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았을 때도, 사업 실패로 힘겨울 때도 못 이기는 척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야속했을 것이다. 약하디약한 사람이기에.
그런 그를 볼 때면 영혼까지 상처받은 것 같아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그의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기자가 “외로워 보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외롭죠. 술 한 잔 마시고 싶어 휴대폰을 열었는데 수백 개의 번호 중 편하게 소주 한잔하자고 말할 사람이 없을 때 ‘내가 외로운 녀석이구나’ 하고 새삼 느끼죠. 이것저것 따지다가 결국 혼자 마시거나 체념하죠. 저는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잘 못 하고 힘든 모습도 보여주기 싫어요…. 해보니까 가끔 혼자 마시는 것도 괜찮더라고요. 물론 대화할 상대가 없으니 술 마시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 술맛이 매우 쓰다는 것 외에는.”
길을 가다 해장국집에 들어가 해장국 하나 시켜놓고 홀로 술을 마셨다고 했다.
한동안 환희, 준희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그는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들이 다니는 교회에 나간 것도 그 때문이다. 환희 친구들에게 교회 주차장에서 야구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시진은 지난 2009년 여름 본지가 촬영한 것이다.
“어쩌겠어요,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지. 사실 저는 혼자 밥 먹는 것도 싫어해요. 역시나 밥맛이 별로더라고요.”
“행복해지고 싶지 않으세요?” 기자가 물었더랬다. “저도 행복해지고 싶죠.” 되물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지 않으세요?”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리기엔 이미 늦었죠.” 단답형 질문과 단답형 대답이 이어졌다. “왜요?” “내가 평범하지 않으니까. 평범이 가장 큰 행복인데 상황 자체가 평범할 수 없어요.” 그가 담배를 물었다. 사흘에 두 갑, 습관적으로 태운다고 했다. 담배라도 피워야죠, 그가 그랬었다.
인생을 살면서 후회되는 일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후회가 무의미하다는 것도 알았다.
“다 지나간 일이에요.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럼에도 조성민이라는 남자에게는 최종 목표가 있었다.
“잘 사는 것. 아쉬운 것 하나 없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부모님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를 해주고 싶어요. 막연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뭐든 해주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제 희망 사항이죠. 그리고 영원한 야구인으로 남고 싶고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 그것이 그의 마지막 바람이었다.평범하고 싶었지만 평범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오랜 기간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자신을 그는 누구보다 미워했다.
그에게 행복은 두 아이와 함께 있는 순간이었다. 그가 사업을 할 때 아이들이 사는 집 부근에 사무실을 얻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사무실 앞에 아이들 스쿨버스가 설 때면 시간 맞춰 기다렸다가 아이들 얼굴을 보기도 하고 밥을 같이 먹기도 했다. “준희는 새침데기”라며 활짝 웃던 그다.
기자가 아는 그는 아이들에게 늘 목말라 있었다. 멋진 아빠가 아니라는 것,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 색안경을 끼고 보는 대중들의 시선. 함께 살고 싶지만 주변 여건이 쉽지 않았다. 언젠가는 꼭 함께 살 것이라고 했다.
“엄하지만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서 아직 친구 같은 아빠는 못 됐어요. 미안한 게 너무 많아 마냥 잘해주는 아빠죠. 아이들이 잘못한 부분을 고쳐주고 싶은데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요. 잔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사실 저는 지금 이렇게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수줍은 얼굴로 그가 말했다.
“아들아, 씩씩하고 친절한 남자가 돼라. 힘든 때일수록 가슴을 펴고 앞을 바라보며 정직하게 살아라. 인생은 누구에게나 시련이 있기 마련이란다. 딸아, 기쁜 일이 있으면 크게 웃고, 슬픈 일이 있으면 펑펑 소리 내어 울어라. 네가 잘못했을 때는 유쾌하게 사과해라. 사랑한다, 아가들아.”
그의 사무실에는 준희가 활짝 웃는 사진이 놓여 있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죽기 전, 꽤 오래전부터 그는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더욱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토록 그리운 두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세상으로부터 끝없이 오해를 받았던 그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였다는 것을 기자는 안다.
# 도곡동 오피스텔, 조성민의 마지막 연인을 만나다
조성민은 마흔 살 동갑내기 여성과 교제 중이었다. 기자가 아는 그는 사랑 지상주의자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아이 같고, 세상을 등지더라도 전부를 바친다. 첫 번째 결혼은 가족을 등지며 선택했고, 두 번째 결혼은 세상을 등지고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무모한 사랑이었다. 어쩌면 그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사랑의 결말은 대부분 참혹한 버림과 상처라는 것을. 그가 그랬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 숨김이 없다. 솔직하고 진실됐다. 그 때문에 그는 안식처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는 마치 마약에 중독되듯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에게 여자친구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죽기 직전 도곡동 여자친구의 집과 남양주 본가를 오가며 생활했다. 사고가 난 당일 밤, 조성민은 여자친구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여자친구는 그 자리에서 이별 통보를 했다. 여자친구는 자정께 잠시 외출했고, 홀로 술을 마시던 조성민은 새벽 3시 40분께 화장실 샤워꼭지에 허리띠로 목을 매 자살했다. 외출하고 돌아온 여자친구가 싸늘한 그의 시신을 발견하고, 수십 분 뒤에 경찰에 신고했다.
조성민은 여자친구에게 “내 인생 마지막을 자기와 함께하지 못해서 가슴이 아프다 꿋꿋이 잘 살아”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자살 직전에는 어머니에게 “저도 한국에서 살 길이 없네요. 엄마한테 죄송하지만 아들 없는 걸로 치세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모자는 새벽 2시까지 몇 통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여자친구 박 모씨는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조성민이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인이자 힘겨운 사랑을 택했던 그녀다. 기자는 사건이 나고 보름 뒤 두 사람이 함께 머물던 도곡동의 한 오피스텔을 찾았다. 사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경비실 직원은 “사건이 난 뒤 박씨의 가족이 짐을 모두 빼서 갔다. 현재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취재 결과 박씨는 여전히 그 오피스텔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기자가 초인종을 누르자 “누구세요?”라는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고 신분을 밝히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 지금 많이 아파요”라고 울먹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고, 힘겨워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한 20평 남짓의 좁은 원룸에서 숨죽이며 홀로 지내는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인에 따르면 조성민은 가족에게 박씨를 소개해주었을 만큼 그녀를 아꼈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에게 환영받는 커플은 아니었다. 사랑했지만 결혼을 생각하기엔 현실이 버거웠던 두 사람이었다. 박씨가 이별을 고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씨는 한 차례 결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배려심이 깊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 박씨의 어머니는 지인에게 “내 딸이 많이 아프다, 심신이 지쳐 있다. 병원에라도 입원시켜야 할 상황이다”라며 사건 이후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딸을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박씨는 현재 외출을 삼가고 지인들도 만나지 않고 있다.
(위)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아래) 조성민의 어머니와 환희, 준희.
# 안암동 병원, 고인의 부모님을 만나다
그럼에도 산 사람은 산다. 살아야 한다. 귀하디귀한 아들을 앞서 보낸 부모님은 지금 죽지 못해 사는 심경이다. 발인을 치르고 열흘 뒤 조성민의 아버지 조주형씨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조씨는 허리가 좋지 않아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입원 치료 중이었다. 발인 당시 조씨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힘겨운 모습을 보여 주변을 숙연케 했다. 조씨는 운동선수 출신 금융인이다.
사실 부자는 한동안 서로를 등지고 지낸 시간이 있었다. 유독 특별했던 부자지간이었기에 서로에게 실망과 상처가 더 컸던 것이다. 이혼 후 재혼을 했을 때가 그즈음이다. 기자는 오래전, 이혼 공방이 한창일 때 그의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 당시 아버지는 “내가 그 녀석한테 어떻게 했는데…”라며 아들에 대한 실망감을 이야기하며 많은 술잔을 비웠고,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조주형씨도 마찬가지였다. 2년 전 조성민은 기자에게 아버지에 대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직도 대화가 많은 건 아니에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받았고, 접어두는 거죠. 부모와 자식 간이니까. 하지만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도 아버지입니다. 야구하는 저를 무척 자랑스러워하셨고, 거의 모든 경기를 보셨을 만큼 아버지에게 저는 특별했어요. 요즘 아버지는 손자, 손녀 보는 재미로 사세요. 운동회에도 가고 손자 앞에서 재롱도 부리세요. 휴대폰에도 온통 손자, 손녀 사진뿐이에요.”
입원 중인 조씨는 발인 때보다 한결 건강해 보였다. 휠체어 없이 조심조심 걸어 다닐 만큼 재활 치료에 열심이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스스로 주문을 거는 듯 보였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살아생전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을 처음 받았어요, 아들 보내는 발인 때…. 지금도 내가 혼이 나가 있어요. 한데 누워만 있으면 안 되니까 일부러라도 밥 한 그릇 다 비우고 있어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살겠지, 암. 성민이가 많이 보고 싶은데, 그래서 행여 꿈에서나 나올까 매일 밤 기대하는데, 이 녀석이 꿈에서도 나오지 않네. 기다려봐야지 뭐.”
차마 아버지를 꿈에서조차 볼 낯이 없었던 것일까. 기자와 아버지는 한참,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그렇게 속을 썩인 아들이지만 그럴 때마다 먼저 손을 내밀고 안아준 것도 부모님이었고, 그 아들을 애지중지 보살핀 것도 부모님이었다. 두 번째 결혼 생활 역시 살패한 조성민은 한동안 사무실에서 생활했다. 한겨울 추운 사무실에서 덜덜 떨고 있는 아들을 어머니가 집으로 데려왔고, 그날 이후 조성민은 본가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그게 3년 전이다. 부모는 몸뚱이와 달랑 가방 두 개를 들고 온, 만신창이가 된 아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 과거도 묻지 않았다. “새롭게 태어나자. 마음가짐을 고쳐먹고 처음부터 시작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응원했다. 여느 때보다 조성민은 마음이 안정되어 갔고, 점점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부자는 그간 못다 한 길고 긴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보듬고 미래를 이야기했다.
“아버님, 제가 잘할게요. 이제 효도하며 살겠습니다.” 지난해 아버지의 생일날 케이크와 와인을 사들고 와서 손수 요리한 음식을 정성스럽게 접시에 담아 생일상을 차렸던 아들이다. 아들 덕분에 행복한 생일이었다. 그런 아들이었는데 세상을 떠났다. 믿기지 않는다. 꿈만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성민이의 모습이 있어요. 제가 은행에 다닐 때인데, 요미우리 선발 투수로 활약하던 아들이 다음 날 경기에 선발 투수로 나간다는 거예요. 너무 보고 싶어 은행장에게 집안일이 있다며 거짓말하고 아내와 함께 바로 나고야로 갔죠. 구단에서 극진히 대접을 해주더라고요. 야구복을 입은 우리 아들이 늠름하게 마운드에 나와 멋지게 완봉승을 거뒀어요. 너무 대견하고 행복했죠. 갑자기 장내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잡더니 조성민 선수가 오늘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구장에 오신 부모님의 응원 덕분이라며 우리 부부를 무대 위로 나오라는 거예요. 그게 생방송으로 고스란히 나갔어요.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은행장에게 불려갔죠. 혼나면 어때요? 우리 아들이 완봉승을 거뒀는데. 갔더니 은행장이 TV를 봤다며 막 웃더라고요. 그렇게 행복을 많이 줬던 아들이에요.”
아내가 힘겨워할 때마다 그는 아내를 다독인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행복을 주었던 아들이냐. 그 기억만 하자. 그 추억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성민이가 훨훨 날아갈 수 있게 이제 놓아주자. 편안히 보내주자.”
죽기 이틀 전 아들은 아버지가 평소 좋아하는 석화굴을 사들고 병원을 찾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유달리 새까맣던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걱정스러워 물었다. “성민아, 얼굴이 왜 그래?” 다이어트 중이라는 아들의 대답이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늦게 본가에서 발견된 유서를 보면 이미 조성민은 죽음을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기 직전까지 조성민은 어머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들은 부모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어머니는 수차례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성민은 받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날 아들에게 달려가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
“바보예요. 성민이는 착한 게 아니라 바보야…. 두산 코치를 그만둔 것도 상처가 컸고, 사업도 적성에 맞지 않았죠. 누구한테 뭘 부탁할 줄도 모르는 순둥이가 무슨 사업을…. 사기도 당했죠. 죽은 날에는 뭐에 씌었어요. 술을 마셔도 정신은 놓지 않는 녀석인데 죽기 두 달 전부터는 정신을 놓더라고.”
아버지는 아들이 보고 싶다. 오늘 밤에는 꿈에서라도 만나려나, 목 놓아 불러도 볼 수 없는 그립고도 그리운 아들이다.
故조성민의 유서 내용 전문
우선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못난 자식이 그동안 가슴에 못을 박아드렸는데 이렇게 또다시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드리고
떠나가게 된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이젠 정말 사람답게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도 가져갑니다.
이 못난 아들 세상을 더는 살아갈 자신도
용기도 없어 이만 삶을 놓으려고 합니다.
행복한 날들 가슴 뿌듯했던 날들도 많았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이 드네요.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우리 OO이.
제가 이렇게 가게 된 것에 대한 상처는
지우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딸 환희 준희야. 너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상처를 아빠마저 주고 가는구나. 불쌍한 우리 애기들….
이 모자란 부모를 용서하지 말아라.
법적 분쟁을 위해 저의 재산은
누나 조성미에게 전부 남깁니다.
# 발인, 최진실 모친을 만나다
조성민의 유골이 안치된 경기도 광주시 분당 스카이캐슬 추모공원. 정옥숙씨가 화장기 없는
모습으로 조성민의 가족과 떨어진 곳에서 전 사위의 마지막 길을 동행했다.
정씨의 심경은 어떨까. 한때는 내 딸을 저세상으로 보낸 장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내 딸 잡아먹은 귀신’이라며 원망도 하고 보기도 싫었다. 서로를 갉으며 살았던 세월도 수년이었다. 허나
세월은 흐르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 손자, 손녀의 유일한 핏줄 아닌가. 아이들은 아빠를 원했고, 아빠는 아이들이 유일한 행복이었다. 그 자연의 이치를 무슨 수로 막겠는가. 설사 막았다면 지금 누구보다 가슴 찌릿한 사람이 정씨일 것이다. 그런 사위가 딸이 있는 그곳으로 뒤따라갔다.
지금 심경이 어떤지? 사돈댁 일이라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럽네요. 세상에 이런 일이… 애들 아빠잖아요. 이제 노인네들만 남아서 애들은 어쩌라고….
준희가 커갈수록 아빠를 많이 닮아가는 것 같다. 그러게요. 커갈수록 골격이나 인상이 아빠를 많이 닮아가더라고요. 아무래도 여자애다 보니 환희보다는 제 아빠한테도 싹싹하게 잘했어요. 밤중에 아빠와 문자도 주고받고 그랬는데….
혹시 최근에 조성민씨가 힘들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나? 몰랐어요. 간혹 통화만 하는 정도였죠. 애들한테 크리스마스 때 뭐 갖고 싶으냐고 전화했어요. 그러고는 결국 만나지 못하고 이런 일이….
한 언론에 따르면 아이들과 자주 만나지 못해서 힘들어했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만났어요.
아이들이 걱정스럽네요. 어떻게 감당할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아이들은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라요. 나도 제정신이 아닌데 아이들은 오죽하겠어요. 어젯밤엔 갑자기 환희가 엉엉 울더라고요. 아빠한테 너무 미안하다고 계속 울더라고요. 전화도 자주 못해줘서 너무 미안하다고, 아빠가 너무 불쌍하다고….
소식은 언제 들었나요? 인터넷을 안 하니까 몰랐어요. 연락이 와서 알았는데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또 생기나, 그 충격이 어제 같은데…. 아무렴 애들 아빠잖아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이들 핏줄인데…, 세상에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하네요.
그이의 말처럼 세상에 이런 일도 생긴다. 조성민의 지인에 따르면 조성민은 죽기 전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조성민은 휴대폰 속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많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하늘에서는 맘껏 내려다볼 수 있기를….
환희는 아빠의 어릴 적 사진을 보고 “엇, 나네!” 하고 말했을 만큼 아빠와 닮았다. 왼쪽 사진은 지난 운동회 때 조성민이 촬영한 휴대폰 셀카 사진이다. 이것이 그가 참석한 마지막 운동회가 됐다.
옆 사진은 조성민의 사무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준희 사진.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죽기 직전 그의 카카오톡 글이다. 위의 사진은 일본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카카오톡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