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나길 ‘노력파’
“표지를 찍는다는 얘기를 들은 뒤 매일 밤, 표정 근육이 굳지 않도록 입꼬리를 올린 상태로 잠을 자고 지금의 행복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거울을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려보는 연습도 했어요.”
사람의 몸에 시계가 있다면 주부 염지선(37세)은 디지털보다는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달리는 아날로그 초침 시계 쪽일 것이다. K-QUEEN 콘테스트 준비 과정 때부터 그녀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화려한 치장으로 자신을 돋보이려고 하기보다 묵묵하게 자기 몫을 다하면서 기본에 충실한 ‘모범생’이자, 표지 촬영을 위해 몇 주 전부터 표정과 피부 관리, 포즈를 하나하나 물어가며 준비한 ‘완벽주의자’라고 하니 그녀가 아날로그 시계란 이유를 대변하기에 충분하지 않나. 그녀와 인터뷰하는 동안 진정성과 노력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등장했는지 모르겠다.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단어만으로 그녀를 가두어버리기에는 우리는 아직 그녀를 너무 모른다.
‘날고 기던’ 승무원, 살림의 여왕이 되다
K-QUEEN 염지선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운 무용을 대학에서 전공한 뒤 5년 동안 항공사 승무원 생활을 했다. 당시 항공사 승무원은 여대생이 꿈꾸는 직업 1순위였고,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하고 각계각층의 사람을 만나면서 얻은 화려한 배경이 나름 ‘내가 제일 잘나가’라고 뽐내는 시절을 보내게끔 했다. 그러다 결혼 후 일을 그만두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뒷바라지’가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인생 역전이 아닌 ‘인생 대반전’을 마주한 셈이다.
해가 지날수록 자신보다는 아이, 남편을 생각하게 되고 청소와 밥하기는 물론 하루에 빨래를 두 번 이상 할 정도로 ‘햄 볶아요(행복해요)’를 노래하며 점차 전업주부로 적응해갔다. 그 즈음이었다. 지난해 초, 그러니까 결혼 6년차에 남편이 이직을 하겠다며 회사에 사표를 던졌고 그녀에겐 갑상선암이라는 선고가 연타로 날아왔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찾아온다더니 정말 이때 인생의 쓴맛, 매운맛을 다 맛본 것 같다.
당시 그녀에겐 원망과 불신의 말이 늘 입에 붙어 다녔다. 예민함이 극에 달했고 ‘무서운’ 엄마이자 아내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 시기에 잡을 거라곤 신앙뿐이었다. 덕분에 감사의 마음을 알고 욕심을 내려놓는 여유를 배웠다. 갑상선 외의 다른 곳에 암이 전이되지 않아 다행이었고, 남편도 지금 공부해서 더 나은 노후를 대비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생겼다. 한차례의 성장통을 겪은 그녀는 확실히 단단해졌다.
또 한 번의 인생 역전
고진감래(苦盡甘來). 염지선의 2012년을 설명하는 단어로 충분할 것 같다. 아픔의 상반기를 보낸 뒤 그녀 스스로 내·외적으로 더 견고하고 성숙해지는 상승 곡선을 그려가던 중 K-QUEEN 콘테스트를 접하게 됐다. 정말로 딱 한 달 전, 남편에게 가계에 보탬이 되고 싶고 그녀 스스로 자존감을 찾기 위해 주부모델을 하겠다고 선포한 때인지라 기쁘면서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이들 동화책에 나오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마음먹은 순간 눈앞에 밥상이 펼쳐지니 고민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원서 마감 일주일 전, 본선 진출자 안에만 들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지원했다. 그 이후는 마치 각본에 짜인 것처럼 면접, 합격, 촬영, 본선 진출, 연습 등 정신없이 빠르게 ‘척척’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사는 또래 주부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 재미있을 뿐 아니라 화려한 드레스에 신나는 취미 활동을 접하면서 말 그대로 ‘신세계’를 경험했다.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 이를 발판 삼아 주부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게 웬일, 본선 무대에서 대상의 왕관까지 쓰는 ‘횡재’를 한 것이다. 본선 대회 이후 잠을 자다가 꿈인 것 같아 깨지 않기를 바란 적도 있다.
흰 도화지에 나를 그리다
K-QUEEN 콘테스트 대상 수상 이후 일본 미마녀대회에 출전했고 각종 봉사 활동, 잡지 화보 촬영, 방송 인터뷰 등 잘나가는 연예인 못지않은 빡빡한 스케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염지선. 앞으로 무엇이든 잘 흡수하는 흰 도화지 같은 모델이 되고 싶다고 한다.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건 자신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별로 좋은 일이 아닐 거라는 판단에서다.
언젠가 또렷한 이미지, 이를테면 ‘염지선 스타일’ 같은 것을 만들 때가 오겠지만 지금은 무조건 하얀 도화지처럼 무엇이든 배우고 익힐 거란다. 그녀는 용암을 뿜는 빙산처럼 양가적인 존재감을 지녔다. 시종일관 특유의 낙천적인 얼굴을 보이다가도 앞으로의 포부와 자세를 이야기할 때면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간절하고 강렬하며 담대한 그녀의 눈빛에서 <우먼센스>를 넘어 대한민국 주부를 대표하는 모델 염지선이 앞으로 만들어낼 경이로운 시간을 확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