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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 위스키의 새 길

아열대기후에선 위스키 주조가 불가능하다? 카발란은 편견을 깨뜨리고 최고 반열에 올랐다.

UpdatedOn January 2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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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VA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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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이든 사회 구성원이 받아들이는 통념이 되기 위해선 믿음직한 근거가 필요하다. 일례로 위스키는 숙성 기간을 늘릴수록 맛과 향이 깊어진다. 알코올이 증발하는 만큼 원액의 향미가 살아나는 한편, 남은 알코올이 수분과 결합해 부드러움을 더해 가기 때문이다. 21년산, 30년산 위스키의 인기를 상기해 보자. 이런 명백한 근거로 숙성 기간과 맛의 인과관계는 모두가 인정하는 유일한 통념이었다. 단, 위스키 하나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숙성 기간을 파격적으로 줄인 이 위스키를 마시고 몇몇이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오래 숙성하지 않아도 맛과 향이 그윽할 수 있다.’ 생각은 빠르게 확산한 끝에 모두가 인정하는 또 하나의 통념이 되었다.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고 업계의 판을 흔든 위스키, 바로 카발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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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개척한 새로운 세상

액체는 증발한다. 서로 당겨서 결속한 분자들 가운데 표면에 위치한 것부터 인력을 끊고 날아간다. 분자의 운동에너지에서 기원하는 증발 현상은, 당연하게도 시간 흐름을 전제로 한다. 움직임, 충돌, 에너지 생성과 형태 변환이 시간을 따라 거듭 일어나는 것이다. 위스키 또한 액체이기에 숙성할 때 원액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를 감내해야 하는 위스키 업계는 증발한 원액을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 불러 왔다. 충분히 이해한다. 향미를 얻고자 반드시 지불하는 비용인데, 차라리 천사에게 주었다고 여기는 게 마음이라도 편하겠다. 평균기온이 낮은 영국 스코틀랜드 스카치위스키 증류소의 원액은 1년에 2~3퍼센트 기화한다. 이 정도 수준에선 천사를 끌어들인 익살스러운 표현이 마음을 위로해 주겠지만, 매년 10퍼센트 이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크통에 넣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증발하는 탓에 6~7년 뒤엔 후하게 쳐 봐야 절반만 생존하는 비극(?)이 기다린다. 악마의 몫이라 명명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정말 비극일까. 놀랍게도 카발란은 타이완에서 주조한다. 2005년 설립한 카발란 증류소가 첫 위스키를 선보인 2008년 무렵엔, 다시 말해 수백 년에 달하는 위스키 역사를 통틀어 그때까지는 극소수의 증류소를 제외하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원액이 1년에 최소 10퍼센트 증발하는 아열대기후에서 주조하겠다니, 설령 그리 밀어붙였다 해도 생산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까? 서늘한 스코틀랜드 날씨는 장기 숙성을 위한 최적의 환경으로 공인받았다. 천사가 가져가는 몫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오크통에 오래 보관함으로써 맛과 향에 깊이를 배가하는 마법 같은 환경이다. 업계의 통념에서 한참 벗어난 타이완 기후를, 카발란 증류소를 세운 킹카 그룹 리톈차이 회장은 행운으로 보았다. 막대한 원액 증발량도 역발상을 통해 비극이 아닌 축복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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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각의 전환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주조 기술에 알맞은 기후가 있다기보다 기후에 알맞은 주조 기술이 있다.’ 주어와 대상어를 바꾸기만 한 아이디어는 활로를 개척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일단, 타이완에서는 천사의 몫을 감안하더라도 숙성 기간이 짧아 제품을 빠르게 생산하고 유통한다. 떨어지는 생산 효율을 오히려 기회로 판단한 셈이다. 거의 시도해 본 적 없기에 과연 그럴까 했으나, 빠른 생산과 유통의 강점이 생산 효율의 약점을 상쇄한다는 숨은 진실이 드러났다. 위스키 성숙도가 정점을 찍는 숙성 기간이 스코틀랜드에서는 30년인 데 비해 카발란 증류소에서는 길어야 8년이었던 것. 나아가 오크통 품질과 블렌딩 기술을 전면 개선해 고가의 스카치위스키 못지않은 향미를 완성했다. 아열대기후에선 보리를 재배하기 힘들다는 약점 역시 질 좋은 품종을 까다롭게 골라 수입하면서 강점으로 승화했다. 하나하나 길 없는 길이어서 모두 앞이 캄캄한 도전이었다.

위스키 증류소를 지을 당시 리톈차이 회장은 해외 전문가를 대거 초빙해 조언을 받았다. 그들은 입을 모아 불가능하다며 만류했다. 모든 게 상식에서 비켜난 환경이었다. 현재는 카발란이 걸어왔고 걷는 그 길을 상식이라고 말한다. 세상사로 확장해서 이것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생각의 전환, 도전, 실현과 성공의 드라마틱한 사례로 꼽힌다. 시야를 좁히면 증류소 한 곳의 이야기지만, 넓게는 꿈과 희망을 믿고 관념을 혁신하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바야흐로 확실하게 언급할 차례다. 두 이야기 중 무엇을 선택하든 상관없이 카발란은 기가 막히도록 맛있다.

열대 과일 맛이 섬세하게 어리는 디스틸러리 셀렉트, 숙성 전에 오크통을 그을리고 태워 바닐라 향이 더욱 은은한 솔리스트 비노 바리끄, 감귤 향에 뒤따라 견과류 맛이 긴 여운을 선사하는 솔리스트 포트. 무엇보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 등장한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 싱글 캐스크 스트렝스는 카발란의 시그너처 브랜드다. 스페인 주정 강화 와인인 셰리를 담은 캐스크에서 숙성한 이 제품을 마시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위스키로 만들 수 있는 궁극의 감미로운 향기와 가슴에 번지는 풍요로운 셰리 맛을, 두고두고 기억하리라 문득 깨달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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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열대기후라는 불리한 여건을 뒤집어 기회로 삼은 카발란은 솔리 스트 포트, 올로로소 셰리 오크 등 명품 위스키를 연달아 개발하고 내놓으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열대기후라는 불리한 여건을 뒤집어 기회로 삼은 카발란은 솔리 스트 포트, 올로로소 셰리 오크 등 명품 위스키를 연달아 개발하고 내놓으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잊을 수 없는 궁극의 향

세상은 카발란에 경배에 가까운 찬탄을 보낸다. 2010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이스팅(브랜드 라벨을 가리고 시음해서 평가하는 테스트) 대회에서 쟁쟁한 스카치위스키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많은 위스키 증류소가 카발란을 좇아 숙성 기법 개발에 천착하는 흐름이 형성된 것도 마찬가지. 이후 다수 대회를 석권한 카발란은 오늘도 아열대기후 속에서 빠르게, 그러나 깊이 익어 간다. 이제 카발란을 잔에 따라 보자. 천사에게마저 넘겨주기 아까운 향기가 몸을 흠뻑 적실 것이다. 그다음에 한 모금. 무슨 말을 보태랴. 두고두고 기억하리라는 것을, 다만 우리는 느끼고 예감하고 확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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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김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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