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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과 ‘유희’의 향신료

후추의 재발견

On May 28, 2014

이집트 파피루스에 등장하고, 로마 시대에도 인기를 누렸던 후추는 3500년 전부터 현재까지 최고의 향신료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잘 모르는 후추의 색다른 매력 속으로.

아시아에서 서방으로 교역된 최초의 향신료

후추의 원산지는 인도 남서부의 열대 해안 산악 지방이며, 적어도 3500년 전부터 바다와 육로를 이용해 교역이 이루어졌다. 1490년대 말 바스쿠 다가마가 유럽에서 인도 남서부로 가는 해상 루트를 발견하면서 포르투갈이 수십 년 동안 후추 무역을 장악했고 네덜란드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1635년 무렵부터는 대영제국이 그 뒤를 이었는데, 영국인들은 후추 플랜테이션 농장을 확립했다. 20세기 들어 남미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후추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이 주요 생산국이다.

블랙 후추와 화이트 후추

후추는 피페르(piper) 속(屬)에 속하는 넝쿨식물인 피페르 니그룸(piper nigrum)의 열매다. 이 열매가 자라고 익으면서 매운맛을 내는 화학물질 성분인 ‘피페린’이 증가하고, 향 물질들 또한 정점에 이르면서 붉게 익는다. 익은 열매의 껍질은 붉은색이지만, 수확한 뒤에 갈변 효소의 작용으로 짙은 갈색 또는 검은색으로 변한다.

가장 흔한 블랙 후추는 열매의 향이 가장 좋으면서 익지 않은 상태인 초록빛을 띠고 있을 때 수확해 말린다. 넝쿨에서 열매를 딴 다음 뜨거운 물에 1분 동안 데쳐서 열매를 깨끗하게 만드는 동시에 열매를 이루는 세포들을 터트려 갈변 효소의 작용을 가속화한다. 마지막으로 여러 날 동안 햇볕에 널거나 기계를 이용해 말린다. 말리는 동안 과육 겉면이 까맣게 되면서 블랙 후추가 된다. 화이트 후추는 겉의 과육 층을 제거하고 후추 씨앗만으로 만든다. 완전히 익은 열매로 만드는데, 일주일 동안 물에 담가두었다가 비벼서 과육 층을 제거한 뒤 말린다.

흔히 볼 수 있는 블랙 후추와 화이트 후추 외에 그린 후추과 핑크 후추가 있다. 푸아브르 로제(poivre rose)라고도 하는 핑크 후추는 막 익은 붉은색 열매를 소금과 식초에 재운 희귀한 후추로 핑크 페퍼콘과는 전혀 다르다. 그린 후추는 익기 시작하기 일주일 전에 수확한 열매로 만든다. 열매를 이산화황 및 탈수 건조 처리하거나 소금물이 든 캔 또는 병에 담아 밀봉한다. 또는 냉동건조해 보존처리한다. 보존처리 방법에 따라 풍미가 달라지지만, 약간의 매운맛과 후추 향은 공통적이다.

혀끝에 전해지는 자극적인 유희의 맛

통후추 알갱이를 씹어 먹는다면 매운맛이 다른 감각들을 완전히 제압해 신경에 거슬릴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양을 넣는다면 압도하지 않으면서 적절한 자극을 준다. 고기에 없는 풍미를 보태주며 그 음식들의 맛을 더 복합적이고 입맛 당기는 것으로 만든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두 가지 향신료는 고추와 후추다. 이 둘의 특징은 ‘맵다’로 표현된다. 사실 맵다는 표현보다는 ‘자극적’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것은 맛도 아니고 향도 아닌, 통증에 가까운 일반적인 자극 감각이다. 심리학자 폴 로진(Paul Rozin)은 통증 감각은 우리 뇌로 하여금 천연의 통증 경감 화학물질을 분비하게 만드는데 자극적인 느낌이 사라지면 은근한 쾌감이 남기 때문에 자극적인 맛에 끌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후추가 전하는 자극적인 맛의 진원지는 무엇일까? 바로 ‘피페린’이라는 화학물질로, 얇은 과육과 씨앗 표면에서 발견된다. 피페린은 고추의 캡사이신에 비하면 매운 맛은 100분의 1 정도. 풋내, 감귤류 향, 나무 향, 꽃 향 등이 어우러진 블랙 후추의 전체적인 맛은 테르펜인 피넨, 사비넨, 리모넨, 카리오필렌, 리날룰의 화학 성분이다. 화이트 후추는 매운맛은 블랙 후추와 대등하지만, 과육을 제거했기 때문에 후추만의 향이 상당 부분 누락되어 있다.

풍미의 발산

우리는 입안에 있는 맛봉오리와 코 윗부분에 있는 냄새 수용기 감각의 조합으로 음식 맛을 느끼게 된다. 또 음식을 먹을 때 맛을 보고 냄새를 맡는다. 사실 미각은 오미(단맛, 신맛, 짠맛, 쓴맛, 감칠맛)가 전부다. 반면에 냄새 종류는 수천 가지가 넘는다. 이처럼 우리가 맛으로 인지하는 것의 대부분이 실은 냄새다. 향신료는 특유의 향 분자들을 지녀 음식에 맛을 강화한다. 다른 향신료와 마찬가지로 후추 또한 음식에 1%도 되지 않는 미량만 사용되지만 특유의 향 때문에 모든 식재료 가운데서도 높은 찬사를 받아왔으며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후추의 풍미는 잘게 부술수록 풍미 분자들이 빠져나오는 표면적이 넓어져서 요리에 빠르게 배어든다. 따라서 음식을 먹기 직전에 통후추를 그라인더에 갈아 음식에 뿌리면 가장 신선하고 좋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반면 풍미를 내는 데 시간이 걸려도 좋은 육수와 소스, 피클, 잼 등에는 통후추를 사용한다.

통후추라도 그라인더에 한 달쯤 방치해두면 그 향이 상당 부분 소실된다. 달군 팬에 살짝 볶으면 향이 되살아나므로 오래 방치된 것은 살짝 볶은 뒤 사용한다. 후추의 피페린 성분은 빛에 노출되면 무미한 분자로 변형되므로 단단히 밀봉해서 차고 어두운 곳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좋다.

흑돼지볼살햄, 흑후추를 묻힌 배, 고르곤촐라크림
음식을 먹기 직전 후추를 흩뿌리면 마력적인 향으로 침샘을 자극한다. 기분 좋은 자극으로 혀끝을 지배하는 후추는 입맛을 돋우기 위한 애피타이저에 뿌려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다. 생햄의 숙성된 맛과 배의 달콤함, 고르곤촐라크림의 부드러움, 후추의 매콤함을 담은 애피타이저.

후추피치와 페코리노치즈(Cacio e Pepe)
후추가 맛을 돋우는 부재료가 아닌 주재료로서 후추의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린 음식도 존재한다. 이탈리아 요리인 ‘카치오 에 페페(Cacio e Pepe)’인데 치즈와 후추라는 뜻이다. 치즈와 후추로 만든 소스를 곁들인 파스타 요리 중 하나인데, 통후추를 즉석에서 절구에 빻아 뿌려 치즈의 독특한 향과 방금 빻은 후추의 자극적인 매운 향이 어울린다. 소스가 아닌 후추를 빻아 파스타 면에 넣어 만든, 카치오 에 페페를 재해석한 요리로 씹을수록 입안이 후추 향으로 가득 찬다.

리코타치즈젤라토를 채운 후추파르메산치즈카놀리와 딸기콩소메
향 화학물질들은 물보다는 기름 또는 (유)지방에서 더 잘 녹는다. 따라서 후추의 맛과 향을 좌우하는 향 화학물질 역시 기름 또는 유지방에 추출이 더 잘 된다. 유지방으로 만든 파르메산치즈가루에 후춧가루를 더해 구운 뒤 카놀리(관이나 나팔 모양의 페이스트리 껍질을 튀기고 속을 채운 이탈리아 음식) 모양으로 만들어 그 속에 리코타치즈젤라토를 채워 디저트를 완성했다. 또한 후추의 강렬한 맛과 딸기의 강한 단맛이 잘 어울리므로 딸기콩소메를 곁들인다.

이집트 파피루스에 등장하고, 로마 시대에도 인기를 누렸던 후추는 3500년 전부터 현재까지 최고의 향신료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잘 모르는 후추의 색다른 매력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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