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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으로 시를 짓는 여자, 한복선

On October 06, 2013

발그스름하고 새콤한 오미잣국에 분홍꽃국수 홀홀 풀어내는 손끝, 삶의 기품이 명랑하게 흩어져 내리는 순간. 그 순간을 포착해 한 권의 시집에 오롯이 담아낸 한복선 시인을 만났다. 단 내음이 풍기는 행간에서 느꼈던 삶의 갖가지 추억들을 듣다 보니, 갓 지은 밥사발을 받은 듯 가슴 구석구석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내린다.

“친정어머니 손바닥 그대로 닮은 나
나는 매일 밥한다
우리 식구가 모두 나에게 밥 달라 응석이고
밖에 나가서 일하는 것도 밥 책상에 앉아 글로도 밥을 짓는다
나는 매일 밥하는 여자”

Essen 요리연구가로 명성을 얻으셨는데, 시를 쓰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한복선 40년 동안 음식을 했는데 저에게는 그것이 시를 짓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각각의 악기를 모아 하나의 아름다운 선율로 이끌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도 같고, 캔버스를 앞에 두고 팔레트의 어느 물감을 사용할까 고민하는 화가와도 같지요. 비단 음식을 할 때뿐 아니라 음식을 표현할 때도 단어 하나하나를 고민해야 하고요. 저에게는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요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제가 평생 해온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뿐이지요. 사실 음식에는 딱딱하고 정형화된 레서피만으로 표현될 수는 없는, 인생의 다양한 즐거움과 추억이 담겨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까지 펴내던 조리서와는 달리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고, 많은 표현 방법 중 시라는 장르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E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며, 마치 따뜻한 이야기가 담긴 밥상을 건네받은 느낌이었어요.

한복선 시 속에 음식에 얽힌 다양한 추억을 담았습니다. 학교에서 까 먹던 양은 도시락이나 한 겨울 쨍한 동치미 국물 등, 음식 그 자체뿐 아니라 그에 얽힌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담았지요. 많은 이들이 음식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이유는 만든 이의 배려와 친절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할 때 먹는 이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를 지을 때에도 읽는 이를 생각하며 지었습니다. 독자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거워하듯, 제가 지은 시를 맛있게 읽고 음식과 사람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길 바랐지요.

김장김치를 미어지게 베어 물고 ‘우짝우짝 씹는다’거나, ‘아작아작’한 여름 오이지에서 ‘짭쪼름한 땀 맛’이 난다거나… 단어를 선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음식의 향과 질감, 그리고 그 맛이 입안에 맴도는 듯한 기분이었고요.

한복선 아무래도 어머니인 고(故) 황혜성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요. 어머니는 항상 음식에 관해 풍부한 표현을 사용했고, 고풍스러우면서도 고운 단어를 즐겨 썼습니다. 같은 단어라도 ‘쿰쿰하다’고 얘기하는 것과 ‘콤콤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감이 많이 다릅니다. 특히나 우리말은 미묘하고도 섬세한 맛의 차이를 나타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언어이지요. 한편,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표준어에 맞춰 표현을 모두 바꾸려고 하는 편집자와 실랑이하기도 했습니다. 더욱 섬세하고 강렬하게 음식을 표현하고 싶어서 시를 선택한 것이니 만큼 고집을 꺾을 수 없었지요.

E 요리하는 과정 자체가 아름다운 서정으로 탈바꿈한 것이 놀라웠습니다. 이처럼 시집 자체가 온전히 음식에 헌정된 작품은 현대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식문화사에도 유의미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시대의 규수 문학도 떠올리게 했고요.

푸성귀 채마밭 초록의 벌판
한여름 가뭄에
목말라했다
뿌려 준 단물에
잎을 내준다

풋내 없이 살살 씻어
보리밥 다홍고추 갈아 넣으니
잘 익은 볼그레한 열무김치
국수 넣어 열무국수
고추장 넣고 쓱쓱 비빈 열무비빔밥

한여름 뭉게구름
그늘질 멍석 위 양푼 속에서
숟가락들 게 눈 감추듯 들락날락
침 흘리며
꿀맛으로 먹는다
- <열무김치> 중에서

한복선 40년 동안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음식에 관한 풍습과 지식을 풍부하게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단순히 조리법이나 추억뿐 아니라 요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음식의 유래나 잊혀져가는 풍습, 밥상머리 예절까지도 담으려고 노력했지요. 조선 시대의 규수 문학처럼 후세에 제 시가 지금의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 궁중음식의 대가인 황혜성 선생님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한복선 고 황혜성 선생은 제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스승님이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는 항상 일에 둘러싸인 어머니 밑에서 외롭기도 하고 응석 한 번 제대로 부리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야 했지요. 그래서 ‘나는 커서 절대로 일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고 있어요. 어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제 인생은 음식으로 꽉 차 있는데 그 음식 하나하나에 어머니에 관한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아플 때
엄마가 끓여 주신
흰죽
세상의 고달픔
응석이고 싶다
- <흰죽> 중에서

E 음식을 하는 여자, 밥을 짓는 여자라는 모티프에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애틋한 정서가 느껴집니다. 가족들 먹을 음식을 홀로 준비할 때 느끼는 묘한 외로움은 여자라면 누구나 느껴본 것이겠지요.

한복선 제 성정 자체가 밝고 후회하지 않고, 긍정적입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어요. 많은 주부나 여인들이 부엌이라는 작은 세상에서 쓸쓸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뜻을 밖으로 펼치지 않아도 자신 안에서 뜻과 철학을 세워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계향 선생은 <음식디미방>을 만년인 75세에 썼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차분차분 쌓아간 것을 노년이 되어 후세를 위해 글로 남겼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고 있지요. 저도 이 시집을 통해 젊은 여인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지혜와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E 궁중음식연구가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시를 짓고 민화를 그리며 여전히 기운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한복선 저는 궁중음식을 하지만 그것을 현대화해 대중에게 퍼뜨리는 일도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시집에 그려 넣은 민화처럼 그림을 그릴 때도 현대적인 터치를 가미하려 노력하지요. 시를 쓸 때에는 옛것의 아름다움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자연스레 조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아직 초보 작가지만 풋풋한 풋배추는 그 나름대로 맛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시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다음번 작품들은 이것보다는 숙성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푹 쉰 묵은 김치처럼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튼실하니 두들두들 두터운 노란 겉껍질
쌉쌀하고 도톰한 하얀 풀솜 같은 폭신한 속껍질
몸서리치도록 시고 떫은 속살
오미오감이 다 어우러진 신비의 과일

21세기의 여인
유자이고 싶다
고귀함과 화려한 끼 그리고 은장도가 있는
곱게 품고 싶은 기품 있는 여인

시원한 배 채 상큼하고 톡 터지는 석류알
푼주에 옆옆 담고
얌전히 달콤한 귀대접에 꿀물 부으면
살그머니 떠오르는 건지
향기롭고 시원한 유자화채의 멋이다
- <유자이고 싶다> 중에서

발그스름하고 새콤한 오미잣국에 분홍꽃국수 홀홀 풀어내는 손끝, 삶의 기품이 명랑하게 흩어져 내리는 순간. 그 순간을 포착해 한 권의 시집에 오롯이 담아낸 한복선 시인을 만났다. 단 내음이 풍기는 행간에서 느꼈던 삶의 갖가지 추억들을 듣다 보니, 갓 지은 밥사발을 받은 듯 가슴 구석구석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내린다.

Credit Info

촬영협조
북스쿡스
포토그래퍼
강태희
에디터
강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