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머금은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던 5월 초입. 서울 성수동 중심가에 위치한 미스지콜렉션 사무실에 도착했다. <우먼센스>가 패션쇼가 아닌 인터뷰로 디자이너 지춘희를 만나는 것은 창간 이래 처음. 오래전 미스지콜렉션의 백스테이지를 촬영한 포토그래퍼와 패션 필드 입문을 꿈꾸며 미스지콜렉션의 티켓을 구매해 패션쇼를 보러 갔던 에디터는 조금 이르게 도착한 4층 사무실에서 그녀를 직접 대면한다는 설렘과 긴장감에 연신 차가운 음료만 들이켰다. 머지않아 계단 아래서 분주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인터뷰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트레이드마크인 뿔테 안경에 샌들과 데님 팬츠 차림으로 캐주얼하게 등장한 디자이너 지춘희.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브라운관에서만 듣던 우아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 그녀는 미스지콜렉션의 오랜 상징이기도 한 바로 그 타이틀, 예쁜 서울 여자 그 자체였다.
워낙 유명하시지만 <우먼센스>와 처음인 만큼 인사 부탁드립니다.
<우먼센스>와 첫 인터뷰라니. 안녕하세요? 지춘희입니다.
우선 지난 3월에 공개된 미스지콜렉션 2024 F/W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행사 규모부터 초대된 셀러브리티까지 굉장했는데, 최근 KBS2 예능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도 이 에피소드를 방영할 만큼 화제였어요.
운현궁에서 열린 미스지콜렉션 2024 F/W는 겨울 숲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오래전부터 사진으로 겨울 숲의 여러 가지 장면을 담으며 꼭 패션쇼로 구현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실현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겨울 숲이라고 하면 회화적인 면을 가장 많이 떠올리지만, 어떻게 보면 음악적인 부분도 충분히 담긴 곳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테마를 ‘새벽 숲 ; Misty Forest’로 붙이고, 새벽녘 안개 낀 고요한 겨울 숲을 이미지와 음악을 통해 완성했죠. 겨울 숲은 잎이 다 떨어지면 선만 남잖아요? 저는 나뭇가지 사이로 빛과 고요함이 차오르는 그 순간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모든 의상이 소중하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착장이 있을까요?
가장 마음이 간 건 모델 이현이 씨가 입었던 마지막 드레스예요. 운현궁의 옛날 벽과 곳곳에 자리한 나무들의 색이 ‘새벽 숲’이라는 주제가 담긴 의상 속 프린트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게 느껴졌거든요. 감탄스러울 만큼 아름다웠어요. 다시 생각해도 정말 좋았어.
이번 쇼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쇼 당일에 날씨가 춥고 쌀쌀했어요. 바람도 꽤 불어서 걱정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초봄 날씨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따로 스카프까지 준비한 참이었죠. 그런데 놀랍게도 쇼가 시작되자 바람이 멈추고 런웨이 위로 햇빛이 쏟아졌어요. 다행이고 행운이었죠. 초대된 분들도 아름다운 고궁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편안하게 쇼를 관람하는 것을 보면서 기분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나요.
우리나라 패션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행사인 미스지콜렉션 패션쇼는 배우는 물론 대중에게도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어요. 미스지콜렉션만의 롱런 비결은 무엇일까요?
저는 앞만 보면서 저만의 방식대로 열심히 해온 것뿐, 특별한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다만 최근에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출연하면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온 김소연 에스팀 대표가 말하길 미스지콜렉션의 의상은 수많은 옷 더미 속에 있어도 단번에 찾아낼 수 있다고 해요. 그리고 그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요. 브랜드의 색이 명확한 건 참 다행이고,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패션쇼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시즌은 언제인가요?
쇼를 할 때 내 만족도가 있잖아요. 나만의 점수가 있는데, 그래도 정말 패션 디자이너 같다고 생각한 쇼인 2013 F/W입니다. 그때 컬렉션 의상 모티브가 줄자였는데 제가 일하는 도구, 나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사물에서 영감받아 컬렉션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요. 직업에 대한 남다른 긍지를 느끼게 해준 컬렉션이었죠.
‘디자이너 지춘희’ 하면, 아직까지 청담동 며느리 패션을 떠올리는 이들도 많아요.
정확히는 제가 한 말은 아니에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제가 만든 의상이나 스타일링은 눈에 띄거나 과한 편이 아니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수식이 붙은 것 같아요. 저는 디자이너지만, 옷보다는 사람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옷은 보조적인 역할로서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어줘야 해요.
2018년 론칭한 디자이너 지춘희의 세컨드 브랜드 지스튜디오 덕분에 팬덤이 더욱 올라갔죠?
많은 분이 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만족스러워요. 디자이너로서 많은 여성이 제 옷을 입고, 또 그 옷을 입어서 행복하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건 없으니까요.
배우 윤여정, 이나영, 심은하, 장진영, 이다해 등 여배우와 다양한 작업을 했죠. 웨딩드레스나 시상식 의상은 아직까지 회자되기도 하는데, 이런 작업은 컬렉션 준비와는 또 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함께 작업을 하면 아무래도 가까워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스토리가 생겨나죠. 배우 장진영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선생님 옷을 입어야 상을 탈 수 있다고 말하며 당돌하게 저를 찾아와 자기소개를 했어요. 그 솔직함이 참 마음에 들었고, 나중에는 제가 직접 리무진을 타고 뉴욕 공항에 마중을 갈 정도로 많이 친해졌습니다. 배우 이정현과도 가까운데 애교가 정말 많은 친구예요. 배우 이나영도 자주 만나고요. 배우들과의 작업은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고마운 마음과 함께 색다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것 같습니다.
좀 더 개인적인 질문도 해볼게요. 서울 성수동에 자리한 이 건물과 사무실이 정말 예뻐요. 최근 MZ세대가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 성수동이잖아요.
마음에 드시나요? 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면 뚝섬역에서 성수역으로 이어지는 지하철이 다니는 것도 볼 수 있어요. 그 장면을 직접 보면 정말 멋있는데, 사진을 찍어도 괜찮을 정도죠. 성수동은 젊은 세대가 많은 만큼 그들만의 특별한 힘을 갖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것과 옛것이 다채롭게 섞여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또 자연도 가까이 있잖아요. 자연과 사람, 낡은 것과 새것이 모두 녹여져 에너지가 되어 끊임없는 용암처럼 분출하는 것 같아 여기 오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집니다.
최근 청담동 쇼룸보다 성수동 사무실에 더 자주 오신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여기에 와서 일도 하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있어요. 편안한 일상을 영위하듯.
그렇다면 커리어 우먼, 디자이너 지춘희의 하루 루틴은 어떤가요?
아침 시간을 좋아해요. 일찍 일어나서 회사 나오기 전까지 4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데, 그 시간을 즐기는 편입니다. 차도 마시고, 신문도 읽고, 유튜브도 보고, 집안일도 하고요. 퇴근 후에는 집에 들어와 빵을 반죽하거나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요. 일할 때의 나와 집에서의 나를 구분하는 편인데, 집에 들어와 몸을 움직이면서 영위하는 평화로움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합니다.
특별하진 않아요. 제철 음식을 먹고, 건강에 나쁜 건 피하는 것. 가능한 한 몸을 자주 움직이고, 운동도 시간 나면 하는 편이에요. 요가나 골프.
주말에도 지인과의 약속으로 늘 바빠 보이는데, 스케줄 없이 온전히 쉬는 날도 있나요?
아까 말한 오전 중 4시간, 그때가 바로 쉬는 시간이에요. 퇴근 후 저녁 시간도 휴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때릴 때도 있고, 밀가루 반죽을 치대거나 장아찌를 담그는 게 저에게는 휴식이에요. 가장 즐거울 때는 할 일 다 마치고 앉아서 유튜브로 다음에 갈 여행지를 찾을 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여자는 예뻐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내면이나 외면, 삶, 나아가는 방향 무엇이든 다 괜찮으니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추구하며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러면 당신과 당신 주변의 모든 게 다 예뻐질 테니까요.
여행을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2024 F/W 컬렉션을 마치고 하와이에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이번 휴가 계획도 정했나요?
유럽 출장이 예정돼 있어 출장 일정보다 열흘 정도 일찍 출국해 유럽을 좀 돌아보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출장 마치고 돌아와서는 다시 일을 열심히 해야겠죠. 그래도 여름에 회사 전체 휴가 기간이 있어 그때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가려고 합니다.
수많은 곳을 다녔을 텐데, 가장 좋았던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사실 비행기를 타면 다 좋아요. 탑승하는 순간부터.(웃음)
자유로운 느낌을 받는 걸까요?
맞아요. 내가 사는 곳, 지내는 곳으로부터 벗어나는 거니까. 홀가분한 느낌이 든다고 하면 맞을까? 비행기를 타는 매 순간이 설레고, 가는 여행지마다 모두 각각의 이유로 좋았기 때문에 여행을 멈출 수 없는 것 같아요. 일단 떠나면 기분이 참 좋아.
지난해 한국패션산업협회 코리아패션대상 대통령표창을 받으면서 이제 완전한 궤도에 올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춘희’라는 이름에서 역사와 저력이 느껴져요.
과찬이에요. 저는 디자이너가 이렇게 큰 상을 받았다는 게 부끄럽기만 합니다. 1979년 미스지콜렉션을 론칭했으니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회사를 이끌어오면서 생산팀, 디자인팀 등 수많은 직원이 미스지콜렉션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직원들에게 월급 주느라 애썼다고 주신 상인 것 같아요.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있고 이룬 것도 많지만, 그래도 목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을 계속 잘 유지하면서 최소한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야 한다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미미해도 괜찮으니,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춘희에게 미스지콜렉션이란 무엇인가요?
내 삶. 제 삶이에요. 미스지콜렉션 안에 내 인생이 전부 녹아 있으니까.
여성을 위해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 지춘희를 알고 있는 수많은 여성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각자 추구하는 길은 다르지만, 그래도 여자는 예뻐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내면이나 외면, 삶, 나아가는 방향 무엇이든 다 괜찮으니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추구하며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러면 당신과 당신 주변의 모든 게 다 예뻐질 테니까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미스지콜렉션의 디자이너 지춘희로서 오래 있어주실 거죠?
그럼요! 물론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