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이(태명)와 함께한 촬영이었어요. 그래서 더 특별한 의미로 남을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임신 30주가 됐어요. 28주 차에 태교 여행 겸 하와이를 다녀왔는데,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컨디션이 좀 안 좋더라고요.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등산도 할 만큼 괜찮았는데 30주 차에 접어들었기 때문인지 컨디션이 확실히 달랐어요. 소화도 잘 안 되고 여러모로 좋지 않아 화보 촬영이 걱정됐는데 촬영 결과물을 보자마자 바로 컨디션이 좋아지는 거예요.(웃음) 촬영 현장에서 다들 응원하듯 리액션도 잘해줘 더 잘 나온 것 같아요.
아이가 없을 때 했던 여행과는 조금 다른 모습의 여행이었겠죠? SNS에 올린 여행 사진에서 에너제틱함이 느껴졌어요.
사진 찍는 순간만 에너지를 끌어올렸어요.(웃음) 기대했던 것보다 날씨도 좋지 않았고, 체력도 예전 같을 수 없고요. 재미있는 건 쇼핑 목록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태어날 아이의 크기를 상상하며 옷도 사고, 귀여운 쪽쪽이도 사고, 주변에 임신한 사람이 많아 선물도 많이 샀어요. 여행 가서 저를 위해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위해 쇼핑하는 것을 본 남편도 놀라더라고요. 마치 신세계를 본 것처럼 신기해했죠.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어떤 여행자였어요?
오롯이 저를 위한 여행자였죠. 남편과 여행할 때도 제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제가 좋아하는 것을 즐겼어요. 반면에 이번 여행에서는 자연스레 저를 위한 물건은 하나도 안 사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또 어떤 면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말로는 쉬러 여행 간다고 하지만 막상 여행지에서는 엄청 바쁘게 보내는 편이에요. 눈뜨면 산책 가고, 구경하고, 부지런히 다니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돼버려요. 아! 등산도 다녀왔어요. 임신 전 하와이에 갔을 때 다이아몬드 헤드에 올라가 언젠가 아이를 가지게 되면 다시 이곳에 올라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배 속 아이와 함께 올라간 거죠. 산에 올랐더니 눈물이 왈칵 났어요. 만삭으로 올라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어요. 남편이 말리는데도 제가 꼭 가야겠다고 우겨 등산을 시작한 터라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어 정말 이 악물고 올랐죠.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제 배를 보며 도대체 어떻게 올라온 거냐며 놀라워했어요.(웃음) 남들보다 좀 느리긴 했지만 무사히 올라갔고, 이번 하와이 여행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으로 남았어요. 아이의 첫 생일을 기념해 다시 한번 하와이로 여행을 가고 싶어요. 그때는 터틀 베이에 가서 거북이도 볼 거예요. 물론 아이는 기억 못 하겠지만요.
어떤 아빠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남편과 나누곤 하나요?
남편은 아기를 만날 생각에 엄청 설레고 있어요. 벌써부터 육아는 자신이 다 하겠노라고 말하곤 해요. 아기 기저귀도 자기가 갈고, 우유도 자기가 줄 거라면서요. 저는 친구 같은 엄마가 되길 바라죠. 무엇보다 제 엄마의 반만 따라가도 좋을 것 같아요. 엄마는 정말 저를 위해 희생하는 엄마였거든요.
한 번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지치지 않고
적당히 철들었을 때 아이를 가졌거든요.
딱 좋은 때인 것 같아요.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 대한 생각만큼이나 부모에 대한 생각도 많아지죠.
맞아요. 요즘 엄마가 저 키우던 시절 얘기도 많이 하세요. 엄마는 제가 공부 머리가 없는 데도 공부를 엄청 열심히 시키셨어요.(웃음) 그런데 후회하시더라고요. 손주는 산에서 놀게 하고 나뭇가지로 숫자나 글씨를 가르치면서 학원도 안 보내면 좋겠다고 하세요.(웃음)
난임의 시간을 지나 가지게 된 아이여서 온 가족의 관심 속에 있겠어요. 난임을 지나며 가장 힘이 됐던 것은 뭔가요?
종교가 큰 힘이 됐어요. 조혜련 선배님과 성경 공부를 함께하는데, 하루는 선배님이 “분명 하나님이 너에게 아이를 주셨을 거야”라고 말씀했어요. 그때 확신이 들었죠.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언젠가 아이를 가질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1년 넘게 버텼어요. 언젠가 올 시간이기에 저만 지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난임의 시간이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았어요. 한 번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지치지 않고 적당히 철들었을 때 아이를 가졌거든요. 딱 좋은 때인 것 같아요.
철이 들고, 들지 않았을 때는 그 모습이 어떻게 달라요?
철들지 않았을 때는 저만 생각했어요. 이제는 남편을 비롯해 가족을 생각해요. 좀 더 주변을 살피게 된 것 같아요. 시간이 철들게 했다기보다 원하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일종의 결핍의 시간이 저를 겸손하게 하고 제 삶을 한 번씩 되돌아보게 했어요. 다행히 지금은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아주 건강한 임신부가 돼 아이와 만날 준비를 하고 있네요.
아이에 대한 가족들의 기대감도 매우 크겠죠?
친정 부모님이 육아를 도와주기로 하셨어요. 시댁 역시 든든한 지원군이고요. 모든 어른들이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해주려고 해요. 아마도 집안의 첫아이여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얼마 전에는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아버님이 바로 연락을 하셨어요. “배 드러내고 사진을 꼭 찍어야 하는 거냐”면서 좀 차분히 있는 것도 괜찮다고 하시더군요.(웃음) 좋은 일을 막 드러내고 싶어 사진을 안 찍을 수 없었어요.
지난해에는 영화 <3일의 휴가>가 개봉했어요. 촬영할 때는 아이를 가지기 전이었다 보니 지금 와서 영화를 보면 그 감정도 좀 다를 것 같아요.
촬영할 때는 신민아 배우가 연기한 딸의 입장에서 더 많이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김해숙 선생님의 역할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나도 극 중 엄마처럼 자식을 위해 그런 희생까지 할 수 있을지 이입해보곤 하죠. 물론 그런 희생을 할 수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이전보다 자식이 아닌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 건 분명해요.
영화나 드라마에는 많은 ‘엄마’가 등장하죠. 각각의 엄마가 저마다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고요. 언젠가 그런 엄마의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나요?
아이를 낳고 나면 연기의 폭이 달라진다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그런 것에 대한 기대 또한 있고요. 예전에는 뭔가 좀 ‘예쁜’ 역할이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이제는 서사가 있는 엄마 역할을 절실히 잘 해내보고 싶어요. 반면에 셀린 송 감독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처럼 긴 호흡의 시간을 캐릭터에 담아내는 역할도 해보고 싶고요. 아, 엄마 역할은 시간이 더 지나서 해봐야겠어요.(웃음) 다시 생각해보니 천천히 해보는 게 좋겠네요. 스물두 살에 고등학생 역할로 데뷔했어요. 동안이다 보니 성인 역할로 넘어가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30대가 되니 그제야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이 들어왔어요. 연기 인생에서 그 중간의 시간이 사라진 것 같아요. tvN 드라마 <일타 스캔들>에서 엄마를 연기하긴 했지만 나이에 맞는 역할이라기보다 좀 젊고 철없는 엄마였어요. 세월의 흐름이 담긴 인물을 연기할 수 있기를 바라죠.
모든 스태프를 배려할 수 있는 그릇의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그런 걸 잘하는 사람이에요.
‘황보라’라는 사람은 굉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밝은 면이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에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요.
밝고 활발해요.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그래요. 주변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 스태프와 함께 있을 때도 에너지를 채워 밝게 만들고 싶어요. 좀 우울한 기분이 드는 사람도 저로 인해 조금이나마 밝아질 수 있으면 더 좋고요.
그럼 황보라의 에너지는 무엇으로부터 채워지나요?
저로 인해 에너지가 채워지는 사람들을 보며 채워요. 20년 넘게 배우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주변 사람들을 잘 대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게 앞으로도 오랫동안 연기하며 살고 싶어요. 언젠가 주인공으로 극을 끌고 가고 싶기도 해요. 한 작품에서 주인공을 한다는 건 물론 연기력이 따라야 하지만, 모든 스태프를 배려할 수 있는 그릇의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그런 걸 잘하는 사람이에요. 주인공을 한다면 지금까지 연기하며 쌓아온 것들이 빛을 발할 수 있을 거예요. 연기적인 갈증도 풀고 싶고요.
배우라는 일을 왜 계속 해내고 싶은 걸까요?
모르겠어요. 하고 싶다기보다는 평생 배우 외의 직업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만큼 익사이팅한 일도 없고요. 연기가 가장 저를 설레고 열심히 하게 해요.
나이 들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있나요?
점점 조심스러워져요. 과거에는 새로운 것을 할 때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컸다면, 이제는 조심스럽죠. 대신 여유가 생겼어요. 절실함과는 좀 다른 얘긴데, 훨씬 마음이 여유로워요. 아마도 결혼 후 영원한 내 편이 생겼다는 든든함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결혼이 자신을 달라지게 했을까요?
많은 면에서 달라졌어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제 인생에서 저를 가장 우선시했어요. 지금은 아니죠. 그런 모습에 저도 놀라고, 제 부모님도 놀라워해요. 그리고 부모님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요. 남편을 잘 길러주신 부모님에게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요. 그런 점에서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아요. 가령 예전에는 친구들과 보내는 신나는 크리스마스가 좋았다면, 이제는 중요한 날이면 늘 가족과 함께하는 게 좋아요.
여전히 많이 걷나요?
예전엔 매일 2~3시간은 기본이고 종종 5시간 넘게 걸었어요. 디스크가 심했었는데 많이 걸으면서 디스크도 사라지고 불면증도 없어졌어요. 5시간을 걸으면 피곤하지 않을 수가 없죠.(웃음) 걸으면서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저는 걸으면서 오히려 많은 생각을 해요. 걷다 보면 아이디어도 많이 생각나고, 대사도 엄청 잘 외워지면서 어떤 식으로 연기할지 생각하게 돼요. 걷는 것 자체가 액팅이다 보니 연기하면서 보여줄 움직임에 대해서도 여러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하루를 돌아보며 생각도 정리하고, 단순하게는 걷고 난 뒤에 뭘 먹을지 생각해보기도 하죠.
가장 좋아하는 걷기 코스가 궁금해요.
남편과 함께 한강 잠원지구를 걷는 걸 좋아했어요. 영동대교 지나 성수까지 걷고 시원한 생맥주로 마무리하면 그보다 좋은 하루가 없죠. 요즘은 몸이 무거워져 만 보 정도만 걸어요. 여전히 남편과 함께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곤 해요.
앞으로 계속 나이가 들면서 가장 기대되는 부분이 있다면요?
아버님을 보면서 생각한 건데, 현장의 모든 스태프가 아버님을 좋아해주세요. 아버님이 그만큼 스태프를 잘 챙기시고요. 나이가 많거나 경력이 오래됐다고 해서 젊은 사람들과 거리감을 두지 않고 먼저 다가가는 편이죠. 저 역시 아버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현장에서 만나는 젊은 배우나 스태프와의 나이 차이가 점점 벌어질 텐데, 제가 어려운 존재가 되면 안 되니까요.
아버님인 동시에 배우로서 대선배이기도 해요. 선배 배우로서 조언도 해주시나요?
항상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사람들에게 잘하고 겸손해야 한다면서요. 조언이라기보다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시는 분이죠.
앞으로 우리는 어떤 황보라를 기대하면 좋을까요?
플랫폼이 다양해진 만큼 좀 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싶어요. 물론 연기도 열심히 하고, 언젠가 저만의 토크쇼도 해보고 싶어요. 이상하게 사람들이 저와 술을 마시다 보면 마음속 얘기를 많이 꺼내놓거든요. 그게 제 강점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50~60대가 되면 토크쇼를 진행하고 싶은 로망이 있어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진행도 해보고 싶고요. 연기로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보고 싶어요.
<우먼센스> 5월호를 위한 인터뷰예요. 황보라의 5월은 어떤 모습일까요?
5월에 오덕이를 만나요. 아이를 낳고 2주 동안 열심히 산후조리를 한 후 집에 돌아와 저 자신을 토닥이며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남편에게도 “전우여, 수고했다”고 말할 거예요. 셋이 함께 5월을 맞이하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정말 꿈꾸던 순간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