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왈츠를 주제로 한 촬영이었어요. 콘셉트 때문인지 촬영 내내 밝은 분위기였죠.
오랜만의 화보 촬영이어서 정말 즐겁고 재미있었어요. 아름다운 옷이 준비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좀 더 촬영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마지막 컷이더라고요.(웃음) 공연하고 노래 부르는 걸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활동 중 하나가 화보 촬영이에요. 사진 찍는 걸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완성해나가는 거라서 더 좋아요. 저는 포즈만 잘 취하면 되니까 정말 행복하고 즐거워요.
멈춰진 모습이 한 장의 사진에 담긴다는 건 어색할 것 같기도 해요.
매 순간 어렵긴 해요. 의상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 그러기 위해 어떤 표정과 포즈를 취해야 할지 쉽지 않아요. 포즈 레슨 같은 게 있으면 받아볼까 생각해본 적도 있어요.(웃음) 화보 촬영이 있는 날이면 혼자 연습도 해보고 모델들 사진을 찾아보기도 해요.
모든 것을 열심히 준비하는 편인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무엇이든지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요. 해야 할 것이 있으면 사전에 준비와 연습도 많이 하죠.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늘 열심히 해요.
최근에 가장 열심히 한 것이 있다면 뭘까요?
지난겨울에는 스케줄 없이 푹 쉬었어요. 쉬는 걸 정말 열심히 했어요. 1~2월에는 목이 별로 좋지 않아 일부러 휴식의 시간을 가졌죠. 목을 아끼기 위해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집에서 쉬었더니 다시 활동할 수 있는 기운이 생겼어요. 열심히 쉰 만큼 목 상태도 많이 좋아졌고요.
가수가 가장 아끼고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는 건 결국 자신의 목소리일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목 관리에 가장 많이 신경 쓰게 돼요. 이제 곧 콘서트(3월 16·17일)를 앞두고 있어 겨우내 목 관리를 열심히 했어요(인터뷰는 <2024 송가인 전국투어 콘서트 ‘가인의 선물’>이 열리기 전에 진행) 요즘은 콘서트 준비에 한창이에요. 의상도 준비하고, 합주도 맞추고, 포스터 촬영도 하고요. 새로운 곡 연습도 하며 팬들 앞에 서기 위해 다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어요.
콘서트 제목이 ‘가인의 선물’이에요. 선물이라 이름 붙인 이유가 있나요?
항상 팬이 주는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노래이기 때문에 노래라는 선물을 준비하고 싶어 선물을 콘서트 주제로 정했어요. 휴식의 시간이 선물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던 셈이죠. 더 나은 목소리를 들려드리고 싶었어요. 1회 공연이 아니라 전국 투어 콘서트라서 목 관리를 하면서 사람도 덜 만나고 체력도 아꼈죠.
콘서트가 시작되면 6회 공연을 모두 마칠 때까지 컨디션 관리가 중요하겠어요.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야 하는 만큼 피부 관리도 신경 쓰일 것 같아요.
너무 피곤하면 갑자기 피부가 뒤집어질 때도 있어요. 타고나기를 피부가 좀 좋은 편이어서 평소에 특별히 관리하는 건 없지만 뷰티 디바이스인 ‘뉴채 리프팅 샷’의 도움을 받아요. 피곤하면 아무래도 혈액순환이 잘 안 되면서 얼굴이 붓는데, 그런 날 뉴채 리프팅 샷을 사용하면 신기할 만큼 부기가 가라앉아요. 전날 밤에 라면을 먹고 자도 다음 날 뉴채 리프팅 샷으로 얼굴을 마사지하면 부기가 없어져요. 주변에 추천도 많이 했어요.
송가인은 가명이에요. ‘가인’이란 이름에는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에 대한 바람이 투영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가수가 되고 싶나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그런 가수가 돼가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뿌듯하기도 해요.
어떤 점에서 그런 가수가 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관객의 반응 때문이에요. 제가 웃으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정작 관객은 울 때도 많아요. “왜 우시냐”고 물어보면 이유 없이 그냥 좋아서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고 답하죠. 그리고 어떤 관객은 너무 슬퍼서 그냥 눈물이 난다고도 하세요. 제 노래를 들으며 울기도 하고, 회포도 풀고, 마음에 쌓인 한도 털어버리고, 우울한 마음도 많이 덜어낼 수 있기를 바라요. 한 번은 관객이 저를 일컬어 ‘음악 치료사’라고 했어요. 우울증도 나을 만큼 큰 위로를 주었다면서요.
신기한 건 아직 마흔이 채 되지 않은 나이인데 목소리 자체에 서사가 담겨 있다는 점이에요. 아마 관객도 그런 점에서 더 큰 공감을 하는 것 아닐까요?
목소리에서 서사가 느껴지는 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타고난 것 같기도 해요. 아마 어렸을 때부터 자란 환경의 영향이 크겠죠. 부유하지도 않았고, 슈퍼마켓도 하나밖에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라다 보니 순수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그 시간이 지금의 제 목소리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물론 노력도 했죠. 선배님들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공부와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 선배님들이 가진 장점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죠. 이미자 선생님이나 심수봉 선생님 같은 선배님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장점을 하나씩 가져오다 보니 제 것이 완성됐어요.
가수 송가인의 시작점에는 판소리가 있어요. 국악에서 트로트로 장르를 바꾼 이유가 궁금해요.
대학에서도 판소리를 배웠고, 당연히 국악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트로트 가수의 길을 가고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힘이 됐던 건 부모님의 응원이었죠. 건강하게만 열심히 해보라는 부모님의 응원이 아니었더라면 트로트 가수가 돼야겠다는 꿈을 꾸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판소리라는 기초 덕분에 트로트가 지닌 깊이 있는 ‘한’의 감성을 남들보다 좀 더 빠르게 목소리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앞서 말한 바처럼 고향 진도도 목소리에 많은 영향을 미쳤겠죠?
진도는 그야말로 소리의 고장이에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도 전라도 대표 민요인 육자배기 한 소절을 부탁드리면 정말 잘 불러주세요. 밭을 매면서도 마치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애국가라도 부르듯이 진도아리랑을 구성지게 잘 부르시죠. “진도에 와서 소리 자랑, 노래 자랑 하지 말라”고 할 정도예요. 진도는 예술의 고장이기도 해요.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화를 배웠고, 자연스레 예술에 늘 열려 있었어요. 진도는 학교마다 문화예술 영역을 하나씩 지정해 관련 무형문화재 선생님들이 학교에 와서 수업을 해요. 어려서부터 다양한 예술의 영역에 스며들게 되죠.
고향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진도와 관련된 행사나 홍보 대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 같아요.
내 고향 진도, 내 고향 보배섬이라는 생각에 아무리 바빠도 고향과 관련된 일은 되도록 하려고 해요. 제 음악의 시작이 진도에 있기 때문에 더 발 벗고 나서는 것도 있겠죠. 고향 자부심이 큰 만큼 애정도 커요.
얼마 전엔 서경덕 교수와 함께 춘사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을 소개하는 영상 작업을 했어요. 영상에서 내레이션과 아리랑 한 소절을 맡았죠. 한국적인 것, 그리고 한국의 전통, 역사 같은 것에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나요?
고향에 대한 자부심만큼 우리나라에 대한 애착도 있어요. 역사에 대한 관심도 많고요. 대한민국이나 태극이라는 단어에 이상하게 뭔가 끓어올라요. 후손들이 우리 역사와 전통을 잘 보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역사적인 의미가 담긴 행사나 활동에 마음이 많이 가요.
큰 맥락에서 보면 정의롭고 바른 사람이 되고 싶은 방향성 같기도 해요. 삶의 방향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아마도 부모님 아닐까요? 부모님은 늘 저에게 “착하게 살라”고 하셨어요.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베풀면서요.
SNS 프로필에도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 내게 좋은 사람이 오도록”이라는 문장이 있어요. 자신의 가치관이 드러난 거겠죠?
몇 년 전쯤 그 문장을 봤는데 제 마음에 딱 와닿았어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사람이 저에게 올 수 있다는 다짐을 늘 해요. 저라는 사람은 원래 감정을 표현하는 데 굉장히 소극적인 편이었어요. 그러다 대학교에 가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점점 더 활발해졌죠. 화가 나거나 힘들 때도 지금 겪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다독여요. 앞으로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더 많을 테니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잘 넘어가자고요. 안 좋은 감정을 사라지게 하려고 노력해요.
마음을 다독여도 무명의 시간은 불안감이 컸을 것 같아요.
항상 불안했어요. 당장 다음 달에 카드값을 내야 하는데 스케줄은 한두 개밖에 없으니 불안하고 초조했죠. 그래서 슬럼프가 올 때도 있었어요. 그럴 때면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다 상황에 잘 대처해 버텨내려고 했어요. 가족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버텨지더라고요. 무명 시절에는 돈을 벌려고 비녀까지 만든 적도 있어요. 노래로 돈을 벌 수 없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본 거죠. 하지만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기에는 행사가 언제 생길지 모르니 섣불리 일자리를 얻기 어려웠고, 그러다 제가 무엇을 잘하는지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손재주로 뭔가를 만들기로 한 거예요. 국악인들이 머리 뒤에 꽂는 비녀를 만들기 위해 동대문에 가서 재료를 사 왔어요. 40여만원어치 재료를 카드 할부로 구입한 다음, 비녀 하나에 6시간 넘게 공을 들여 만들었죠. 만들고 나니 정말 뿌듯하고 그 과정도 즐거웠어요. 결과물도 마음에 들었고요. SNS에 올렸더니 반응도 뜨거웠죠. 기존의 비녀와 달리 제가 만든 건 색감이 강렬해서인지 인기가 많았어요. 국악인이나 결혼을 앞둔 분들이 DM을 보내와 팔기도 하고, 한복집에 납품하기도 하며 생활비를 벌었어요. 주문이 많은 날엔 정말 기분이 좋지만, 주문이 전혀 없는 날엔 너무 불안했어요. 하나라도 주문이 들어와 택배를 보내러 우체국에 가는 길이 정말 신났죠.
마음먹은 대로 스스로 슬럼프의 시간을 이겨낸 셈이네요. 유튜브 채널 <조현아의 목요일 밤>에 나온 걸 본 적이 있어요. 어느 순간에도 망설임 없이 노래를 즐기며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트로트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대부분 어르신들이다 보니 그분들이 제게는 친숙하고 항상 더 많이 노래를 불러드리고 싶어요. 그 촬영장에서도 마음 같아서는 조현아 씨 아버님의 친구분들까지 모셔 오고 싶었어요.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많은 분에게 노래를 들려드리는 것이 제가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제 노래를 듣고 좋아하고 울기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어요. 그분들이 보내주시는 박수 소리에 모든 게 다 풀리는 것 같죠. 노래할수록 제가 더 큰 에너지를 얻어요.
다른 장르의 음악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나요?
그럼요. 록과 발라드를 좋아하고, 뮤지컬 스타일의 음악도 좋아해 그런 장르의 음악을 조금씩 시도해봤어요. 종종 팬들이 트로트가 아닌 곡 중에 제 목소리로 듣고 싶다며 요청하는 곡도 있고요.
이번 콘서트의 세트 리스트는 어떻게 구성됐는지 궁금해요.
앨범 수록곡 중 이전 콘서트에서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곡이나 제가 한 번도 부른 적 없는 곡 위주로 짰어요. 5년 가까이 몇백 곡의 노래를 불렀어요. 장르와 상관없이 많은 노래를 불렀죠. 그렇게 많은 곡을 불렀다는 건 그 곡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전쟁에 나가기 위해서는 무기가 충분해야 하는 것처럼 저는 누구보다 많은 노래를 알고 있어야 해요. 그런데 몇 년간 쏟아붓다 보니 그 무기가 바닥나더라고요. 다시 채우고 있어요. 많이 불러보지 않았기 때문에 연습도 그만큼 더 많이 해야 해요. 저는 우선 그 곡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속이 메스꺼울’ 만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들어요. 잘 때도, 누워 있을 때도, 씻을 때도, 밥 먹을 때도 계속 들으며 제 것으로 만들어가요. 충분히 듣고 나면 그제야 노래를 불러봐요.
완벽한 가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진심을 다해 부르는 것. 저 역시 가끔 진심을 다해 부르지 못할 때가 있어요. 체력이 유독 떨어지거나 목 상태가 잘 받쳐주지 않을 때 그렇죠. 진심으로 쏟아붓지 않은 날에는 관객에게도 감정이 덜 전달되는지 반응이 좀 다르게 느껴져요. 반면에 진심을 다하면 관객에게도 노래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죠.
음악을 어려서부터 체득했고, 한길을 걸어왔어요. 그 과정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판소리 전공에서 트로트로 전향했을 때 엄마가 이렇게 말씀했어요. “이 길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로 열심히 해야 한다.” 트로트로 전공을 바꾼 이후로는 정말 모든 것을 걸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활동해왔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했고요. 연습실에서 한눈팔지 않고, 쉬지도 않으며 버텼어요.
가창은 타고난 것이 클까요, 노력하는 부분이 클까요?
노력인 것 같아요. 노력하고 공부한 만큼 가창에 다 드러나요. 깊이 공부할수록 정말 어려운 장르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완벽한 가창을 100이라고 했을 때 지금 어디쯤 도달한 것 같나요?
70 정도 아닐까요? 트로트를 시작한 뒤 제가 이렇게까지 유명해질 줄은 몰랐어요. 유명해지더라도 10년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죠. 디너쇼와 콘서트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모든 것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왔어요. 그래서 더 기뻤던 것 같기도 해요. TV조선 예능 <미스트롯>에 출연했을 때도 우승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어요. 인기상만 받더라도, 입상만 하더라도 감사하게 생각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1등을 하게 됐을 때 정말 너무 기뻤어요. 마치 꿈꾸는 것 같았죠.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항상 생각해요. 그 기회가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갈고닦아 준비해둬야 언제라도 보여줄 수 있죠. 앞으로도 계속 더 잘하고 싶어요. 많은 사람이 지금도 최고라며 많은 칭찬과 응원을 보내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라이브를 할 때도 더 디테일하게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씩 남아요. 무대마다 더 완벽하게 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요. 팬들에게도 칭찬만 하지 말고 부족한 점을 얘기해달라고 하지만 늘 좋은 피드백만 줘요.(웃음) 스스로 채찍질하는 수밖에 없죠.
계속 노래하고, 발전하고 싶은 마음은 팬을 위한 마음이기도 한 것 같아요.
팬을 보면 그렇게 눈물이 나요. 코로나19 때문에 공연이 취소되며 한동안 팬들을 만날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러다 어떤 음악 프로그램 녹화 일정이 있어 방송국에 갔다가 녹화가 끝나고 나왔더니 팬들이 절 기다려주신 거예요. 그때 눈물이 왈칵 쏟아져 함께 울었어요. 마스크 낀 채로 한 분 한 분 모두 안아드렸죠.
목소리는 컨디션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나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해요. 변수가 많아 걱정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성대도 나이가 든다고 해요. 과거 목소리보다 지금 목소리가 더 구성지다고 말씀하는 분들도 있죠. 사실 이 목소리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도 돼요. 목 상태가 좋을 때 잘 유지하고 싶어요. <미스트롯> 우승 이후 쉬지 않고 목을 써왔기 때문에 어떤 날은 더 디테일한 음색을 내고 싶어도 잘 안 되는 날도 있어요. 이제는 목소리 컨디션을 잘 유지하며 목을 너무 혹사시키지 않고 활동하려고 해요.
콘서트 외에 올해 계획하는 활동이 있나요?
구체적으로 결정된 건 없지만 바람이 있어요. 무명 시절에 만들었던 비녀를 다시 만들고 싶어요. 하나하나 만든 비녀를 액자에 담아 전시해보면 어떨까 해요. 비녀를 착용하지 않고 하나의 작품처럼 전시해보고 싶어요. 제 음악과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지금 한복 홍보 대사이기도 해서 그런 지점과도 맞아요. 그렇게 한국의 전통을 지키고 알리며 국악의 뿌리를 잊지 않고 끈을 놓지 않는, 한국의 맥을 이어가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우먼센스> 4월호를 위한 촬영인 만큼 독자를 위해 들려주고 싶은 봄노래를 꼽는다면요?
‘장미꽃의 전설’. “백만 송이 꽃 사랑의 장미꽃, 5월이 오면 피어나는 내 사랑.” 이 가사를 들려드리고 싶어요.